다시, 간호법과 기능 분화

지난 칼럼에서 나는 간호법 제정을 기능 분화의 관점으로 접근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직역 간의 밥그릇 싸움, 정치권의 전략적 표 계산, 보수와 진보의 이념 투쟁이 온통 언론을 뒤덮었다. 여론을 살피던 윤석열 대통령은 결국 5월16일 거부권을 행사했다. 국회로 다시 넘어온 간호법 제정안은 제대로 된 심의 없이 정치공학적 숫자 싸움에 떠넘겨졌다. 마침내 5월30일 국회 본회의 재표결에서 부결돼 폐기되었다. 예상에서 단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잘 짜인 시나리오처럼 진행되었다. 의료 환경의 변화로 새로운 간호법이 필요하다고 모두 인정하면서도 도대체 왜 이럴까?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나는 지난번 제안의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 체계이론가 루만의 논의를 빌려왔다. ‘계층적으로 분화된 사회’에서 ‘기능적으로 분화된 사회’로 사회가 진화한다. 이러한 낙관적 진화론이 현실 세계에서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잘 알지만, 혹 몰라 잠시 희망을 걸어 보았다. 하지만 역시. 사회체계로서 의료계는 지독하게 계층적으로 분화되어서 환경이 아무리 복잡해져도 이를 해결하기 위해 기능적으로 분화하지 못한다. 겉으로 볼 때 의사와 간호사는 서로 고유의 전문기능을 수행하도록 분화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카스트처럼 엄격한 위계서열로 움직이고 있다. 1만명이나 된다는 PA(Physical Assistance) 간호사가 말해주듯, 기능상 자신의 업무가 아니어도 의사가 위계로 찍어누르면 할 수밖에 없다. 사실상 의사업무를 대신 수행하고 있지만, 열악한 간호사 처우를 받는다.

정부와 여당은 새 간호법을 제정하는 대신, 간호사 처우를 개선하겠다고 약속한다. 여전히 간호법 제정을 직역 간 밥그릇 문제 정도로 인식한다. 밥그릇을 조정하면 문제가 해결될까? 아니다. 문화사회학자인 내 눈에는 이 모든 문제가 ‘성스러움’이 여러 영역으로 분화하지 못한 탓에 벌어진 일로 비친다. 의료지식을 독차지한 의사집단이 절대 권력을 휘두른다. 이런 ‘지식’과 ‘권력’의 결탁은 밥그릇을 통째로 차지하는 것을 넘어 의료 전문직의 ‘신성화’를 낳는다. 어떤 다른 직종도 의사집단이 독점한 성스러움을 나눠 가질 수 없다.

이것이야말로 기능 분화가 아닌가 반문할 수 있다. 의사가 되기 위해 쌓는 훈련 기간과 강도를 고려하면, 실력주의 사회에서 마땅히 누려야 할 성스러움이다. 누구나 손쉽게 될 수 있는 간호사가 감히 여기에 도전하면 안 된다. 이러한 주장은 돌봄의 가치를 낮게 평가하는 사회가 만든 거짓 신화다. 돌봄은 전문지식 없이도 누구나 할 수 있는 허드렛일이라는 낮은 가치 평가. 간호사를 독자적인 간호법으로 규정해야 하는 전문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이런 ‘직업 위계’는 전통적으로 여성이 돌봄을 전담해왔다는 점에서 ‘젠더 위계’와 겹쳐 있다. 간호는 한마디로 여성이 전담해야 할 저열한 돌봄노동이다! 간호법 제정 불발에 한국 사회가 오히려 간호사에게 짜증내는 이유. 돌봄노동이나 하는 여자 주제에 감히 의사와 성스러움을 나눠 가지려 생떼를 쓰다니.

성스러움의 분화를 가로막는 사회에는 시대착오적 기현상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초등학생 대상으로 소수 정예 의대반이 성행한다. 보험용으로 서울대에 등록해놓고 의대 진학 공부를 한다. 한의사가 정확한 진단을 위해 엑스레이를 찍을 수 없다. 의료지식을 패턴화한 AI 기술이 발달했음에도 원격진료를 할 수 없다. 젊은이 사이에서 자기표현 방식으로 자리 잡은 타투가 불법의료행위로 범죄화된다.

근본적인 문제는 ‘성스러움의 미분화’가 의료계를 넘어 온 사회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낮은 계층에 갇힌 사람이 자기 ‘얼굴’을 성스러운 이미지로 연출해 보여줄 무대가 없다. 공적으로 인정받는 얼굴이 없어 무대 후면에 고립돼 죽도록 노동만 하는 사람이 넘쳐나는 사회가 좋은 사회일 리 없다. 어서, 돌봄 실천자에게 얼굴을 허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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