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는 왜 교권을 외면했나, 보편적 약자의 종말

2023.09.18 20:23 입력 2024.01.09 15:57 수정

[이범의 불편한 진실] 진보는 왜 교권을 외면했나, 보편적 약자의 종말

지금의 교권 논의는 ‘약자’ 개념의 개별·맥락화의 수용 과제를 진보세력에 부여한다
대중의 약자 개념은 상당히 변동하였다. 이것을 ‘백래시’로 보고 배척할 것인가, 상호교차성으로 보고 수용할 것인가
아마도 후자의 개념 속에 86세대와 단절한 새로운 진보의 가능성이 존재할 것이다

‘교권 침해’라는 개념은 오류다. 교권은 원래 없었기 때문이다. 교사에 대한 존중은 문화적 전통이었을 뿐, 교권을 보장하는 법령은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10여년 전 교육청에 근무하다 법령상 교권이 없음을 절감한 적이 있다. 첫째로 교사가 자신이 담당할 학년과 과목을 개학하기 겨우 1~2주일 전에 통보받는다. 창의적인 기획, 충실한 준비를 하기에는 턱없이 촉박하다. 둘째로 교사가 학생을 방과후에 남겨서 개별적인 보충지도를 할 권리가 없다. 학부모가 아이를 보내달라고 하면 당장 귀가시켜야 한다.

시스템과 법령이 교사의 교육활동을 지원하거나 보호하지 않으니, 뭔가를 해보려고 의욕을 발휘한 교사는 상처받고, 남들 하는 대로 적당히 따라 하는 교사는 안전했다. 학교는 그렇게 안분지족을 향해 진화했다(2021년 12월23일자 칼럼 ‘교사에게 권력을’, 2022년 4월16일자 칼럼 ‘공교육 걱정없는 세상’ 참조).

2000년대까지 학교는 법령상 교권과 학생인권이 모두 존재하지 않는, 폭력과 부조리가 횡행하는 공간이었다. 그러다 2010년대 들어 학생인권조례, 체벌 금지, 아동학대법 등 학생인권의 수준을 높이는 제도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교권의 수준은 그만큼 높아지지 못했다. 예를 들어 대표적인 교권 관련 법률인 교원지위법(교원의 지위 향상 및 교육활동 보호를 위한 특별법)을 보자. 교권 침해 사례가 발생하면 교장에게 보고하고 교권보호위원회를 소집하라고 되어 있다. 정작 교사가 현장에서 즉시 취할 수 있는 조치가 아무것도 없다. 수업방해행위를 하는 학생을 교실 밖으로 내보낼 수도 없고, 폭력을 휘두르는 학생을 막기 위해 완력을 사용하기도 어렵다. 교사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긴급행동권과 같은 ‘구체적’ 권리 조항들인데, 이것이 공백으로 남겨져 있었다.

그러니 ‘학생인권조례 때문에 교권이 침해되었다’는 착시현상이 나타났다. 백화점에서 고객을 상대로 짝퉁을 팔고 현금 결제를 강요하는 등 온갖 부당행위를 한다고 가정해 보자. 이를 바로잡으려 소비자보호법을 제정했고, 이로 인해 소비자의 권익이 보호되었다. 그런데 차츰 소비자 중에 판매사원에게 갑질을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렇다면 이들의 갑질은 소비자보호법 때문인가? 소비자보호법이 너무 강해 갑질이 일어났으니 소비자보호법을 없애거나 약화시켜야 하는가? 이는 명백하게 논리적 오류다. 소비자보호법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보호법을 제정하고 효력을 높이는 것이 올바른 해법이다. 이를테면 근로기준법이나 산업안전보건법이 필요한 것이다.

학생인권조례의 뼈대는 ‘때리지 말라’와 ‘차별하지 말라’이고, 그 어디에도 모욕이나 수업방해를 조장하는 내용이 들어 있지 않다. 따라서 ‘학생인권조례가 교권을 침해했다’는 주장은 완벽한 오류다. 지금의 사태는 학생인권조례가 ‘있어서’ 생긴 게 아니라 교권보호법령이 ‘없어서’ 생긴 것이다.

교권 부재, 진보·보수 다 직무유기

그렇다면 교권을 법령으로 보장해달라는 요구는 왜 지속적으로 묵살당했을까? 여기서 진보와 보수가 모두 직무유기를 했다. 보수의 직무유기는 이유가 단순했다. 보수는 가뜩이나 학생인권조례나 체벌 금지를 반대해서 비난을 산 전력이 있는데, 여기에 더하여 교권을 옹호하겠다고 나섰다간 스스로에게 찍혀 있는 낙인을 더 깊게 만들 우려가 있었다. 한마디로 욕 먹기 싫었던 것이다. 이에 반해 진보의 직무유기에는 내밀한 사상적 이유가 있다. 진보 세력은 ‘약자 보호’가 자신의 주요한 임무라고 생각하는데, ‘아동’이 대표적인 약자이기 때문이다. 진보 진영에게 약자를 옹호한다는 것은 곧 특정한 ‘집단’ 전체에게 특별한 대우를 해주는 것이었다. 즉 진보의 약자 개념에는 ‘개별성’과 ‘맥락’이 결여되어 있다.

약자(minority)에 대한 대중의 감수성은 지속적으로 변화해왔다. 나는 2000년대부터 여러 커뮤니티들을 관찰하다가 ‘약자’에 대한 대중의 태도 변화를 발견했다. 맨 처음 눈에 띈 것은 노점상이었다. 과거엔 노점상이 단속을 당하면 동정과 연민의 감정을 느끼는 것이 인지상정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2000년대 중후반이 되면 노점상이 단속 대상이 되는 것이 당연하거나 최소한 불가피하다는 인식이 우세해진다. 그들 중에는 기업형 노점상도 있고, 생계형 노점상이라 할지라도 그들을 방치하는 것은 세금과 임차료를 부담하면서 장사하는 일반 상인들에 대한 역차별이라는 논리였다.

비슷한 시기에 노동자에 대한 인식이 변화했다. 예를 들어 현대자동차 소속 노동자가 2차 또는 3차 하청업체의 사장보다 약자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를 계기로 ‘노조는 약자를 위한 조직’이라는 인식에 균열이 생긴다. 개별 기업 수준에서는 노조가 약자(노동자)를 옹호하는 조직이다. 그러나 거시적으로 봤을 때에도 과연 노조가 약자를 옹호할까? 이로 인해 특히 청년 세대에서는 ‘노조를 원하지만 동시에 노조를 욕하는’ 기이한 양가감정이 발전한다. 그들이 보기에 대기업 정규직 노조란 근본적으로 위선적인 조직이다.

‘집단적 약자’ 의문은 세계적 현상

가장 극적으로 변화한 것은 길고양이에 대한 태도일 것이다. 2010년대 길고양이는 인간에 의해 버려진, 돌봐야 할 가련한 대상이었다. 그런데 2020년대 길고양이는 습관적으로 소형 포유류와 조류를 사냥하는 유해 동물이다. 관악산에 다람쥐가 부쩍 줄어든 것은 등산객들이 길고양이에게 밥을 주면서 길고양이들이 산에도 살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난 3월 제주도 인근 마라도에서는 천연기념물 뿔쇠오리가 길고양이에게 잡아먹히는 사태를 막기 위해 길고양이를 제주도로 옮겨야 했다. 그리고 바로 그 뜨거운 감자, 여성이 약자냐는 반문이 등장한다. 여성이 집단으로서 약자로 상정됨으로써 여성에 대한 혜택이 정당화되고 ‘남성은 잠재적 가해자’라는 논리가 성립한다. 하지만 많은 ‘이대남’들은 생각이 다르다. 군대도 가야 하고 결혼하면 집도 마련해야 하며 심리적 부양 의무도 더 크게 지는 자신이 오히려 더 약자다. 통계적으로는 가해자가 주로 남성이고 피해자는 주로 여성이지만, 개별 사건에서는 남성이 무고의 피해자일 수 있다.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간주하는 것에 대한 남성들의 반발이 교사를 ‘잠재적 가해자’로 간주하는 아동학대법에 대한 반발과 닮은꼴임은 의미심장하다.

‘집단적 약자성’이 의문시되는 것은 세계적 현상이다. 영국 중부의 소도시 로더럼에서는 파키스탄계 이민자들이 1997년부터 2013년까지 1400명의 백인 여성 청소년을 성착취해서 충격을 준 사건이 있었다. 저소득층 백인 소녀들은 이들의 조직적 폭력과 가스라이팅에 속수무책이었고, 경찰과 지역 정치인들은 상당한 단서가 있었는데도 이를 인지하지 못했다. 이민자·유색인종·이슬람 등 약자로서의 정체성을 중첩적으로 지닌 가해집단의 정체를 직시하지 못하도록 방해한 것은 정치적 올바름(PC)에 의한 일종의 ‘인식적 장애’란 주장이 일었다.

올해 6월 미국에서 소수자 우대법(affirmative action)이 위헌 판결을 받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1960년대 소수인종의 대학 입학에 혜택을 주기 위해 제정된 이 법의 수혜자는 의사나 변호사를 부모로 둔 부유한 흑인 학생이라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되었다. 백인 중에서도 저소득층은 열악한 교육환경에 처해 있는데, 과연 이들보다 저런 흑인이 더 약자라고 볼 수 있느냐는 것이다.

진보 교육감들은 상당수 교사 출신이다. 교사의 구체적 권리를 법령화해달라는 요구가 전달될 만한 여러 통로를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왜 이를 수용하지 못했을까? ‘약자 옹호’는 진보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 진보의 패러다임에서 약자란 ‘집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동이 특정한 경우에 ‘폭력 행사의 주체’이거나 ‘상황의 지배자’일 수 있음에 애써 눈감은 것이다. 하지만 대중의 감수성은 진즉 달라졌다. 14세 미만 촉법소년의 범죄행위에 대한 분노의 수위가 높아진 것이 대표적인 증거다.

지금의 교권 논의는 ‘약자’ 개념의 개별화 및 맥락화를 수용해야 한다는 과제를 진보세력에게 부여한다. 이러한 작업이 노동자, 여성, 난민 등 여러 집단으로 확장되는 것은 불가피하다. 이미 대중의 약자 개념은 상당히 변동했다. 이러한 변동을 백래시(backlash)의 사례로 보고 배척할 것인가, 상호교차성(intersectionality)의 반영으로 보고 수용할 것인가? 아마도 후자 속에 86세대와 단절한 새로운 진보의 가능성이 존재할 것이다.

■이범

[이범의 불편한 진실] 진보는 왜 교권을 외면했나, 보편적 약자의 종말


서울대 학부에서 생물학, 대학원에서 과학사·과학철학을 전공했다. 박사과정 수료 후 수능 과학탐구 강사가 돼 ‘메가스터디’ 창업에 참여했다. 2003년 ‘일타강사’ 시절에 은퇴한 드문 기록을 갖고 있다. 이후 교육평론가, 정책전문가로 변신했다. 서울시교육청 정책보좌관, 민주연구원 부원장, 한겨레신문·시사인·허핑턴포스트 칼럼니스트로 활동했다. 현재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지난 40년간의 한국 교육정책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주제로 연구를 시작했다. 저서로 <문재인 이후의 교육>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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