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시민의 지성을 존중하지 않는가

2023.11.19 20:31 입력 2023.11.19 20:32 수정

얼마 전, 언리미티드 에디션에 다녀왔다. 이것은 2009년 시작해 올해 열다섯 번째를 맞은 독립출판과 아트북의 축제다. 처음에는 갤러리나 카페, 미술관 등을 옮겨다니며 치러졌고, 2015년부터는 노원구 중계동에 위치한 서울시립북서울미술관에서 열린다. 전혀 다른 경로를 통해 알던 사람들이 한 공간에 모여 있는 모습은 기묘했다. 디자이너, 사진가, 편집자, 시각예술가, 작가, 일러스트레이터, 학생 등이 자신이 만든 책을 즐겁게 사고파는 중이었다. 언리미티드 에디션을 제외하면 어떤 예술이나 디자인 관련 행사에서도 이렇게 다양한 이들이 뒤섞여 웅성거리는 모습을 보기는 어렵다.

나름대로 책을 만들며 살아왔지만, ‘독립출판’이라는 말을 명쾌하게 설명하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진다. 일반적으로 작가나 예술가가 책을 출간하기 위해서는 대형 출판사를 비롯한 기존의 출판 구조에 의존해야 했다. 그런데 상업출판물에는 제약이 많다. 수천 부가 팔려나갈 수 있도록 일정한 보편성을 지닌 주제여야 하며, 편집과 디자인은 대체로 친절해야 한다. 심지어 환경을 생각해 표지 용지에 코팅을 하지 않는 결정을 하기도 어렵다. 반품을 받은 책의 표지가 훼손되어 있으면 다시 판매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립출판은 개인이 자신의 작업이나 글을 보여주기 위해 직접 책을 만들어 판매하는 일이므로, 내용과 형식 모두 훨씬 자유롭다. 그러다 보니 꽤 난해하거나 실험적인 책들도 많다. 어려운 현대미술 이론서를 비롯한 좁은 영역의 지식을 묶어 낼 수도 있고, 표지에 제목을 넣지 않는다거나 본문을 거꾸로 인쇄하는 식의 실험도 가능하다. 책이라는 매체에 비교적 익숙한 편인 나로서도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많다.

그런데 언리미티드 에디션을 둘러싼 열기는 대단하다. 그리 접근성이 좋지 않은 위치임에도 매년 수만 명이 독립출판물을 보러 방문한다. 행사가 열리는 미술관 정문 앞에는 긴 줄이 늘어서고, 주변 주차장은 방문객 차들로 북적인다. 행사 기간 동안 SNS와 블로그는 후기글로 도배된다. 행사장에는 책을 사고파는 이들의 상기된 목소리와 함께 일종의 기이한 행복감이 떠다니는 듯했다.

올해 유난히 잦은 공공 문화예술 거점 공간들에 대한 폐쇄나 훼손의 소식을 들으며 나는 언리미티드 에디션을 생각했다. 예를 들어 인천시는 국내외 예술가들이 입주해서 창작 활동을 벌이는 인천아트플랫폼 레지던시(Residency) 프로그램을 폐지하겠다는 것을 골자로 한 운영개편안을 발표했다. 소수 예술가들이 아니라 시민들을 위한 공간으로 운영하겠다는 것이 인천시의 주장이다. 물론 좋은 의도에서 나온 말이라는 것을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이 시민들의 지성을 충분히 존중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나를 포함한 시민들은 물론 관광 테마거리나 ‘레트로’ 카페를 즐기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책이라는 존재가 가닿을 수 있는 실험성과 다양성을 흥미롭게 바라보고 열광한다. 그런 복잡성을 지닌 것이 시민의 지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공의 문화예술 영역에 대한 지원이 반드시 공무원이나 정치가들이 생각하는 ‘시민들의 눈높이’에 맞춰져야 할 필요는 없으며, 그것이 가능하지도 않다. 만약 공무원들이 ‘시민들’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면 인천시청의 유튜브 채널에 있는 특정 동영상들의 조회수가 고작 수십 회에 머무르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관공서가 생산하는 정보 중에는 조회수에 무관하게 반드시 만들어야 하는 것들이 있을 것이며, 단순 계량적인 수치로 이를 비판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동일한 잣대가 인천아트플랫폼 레지던시에도 적용될 수 있기를 바란다. 레지던시에 입주한 여러 예술가들의 실험적인 성취는 문화예술에 대한 시민의 다양하고 복잡한 수요 일부를 성공적으로 충족시켜 왔다. 이를 존중하는 것이 곧 시민의 지성을 존중하는 일이라는 점을 그들이 이해한다면 좋겠다.

김현호 사진비평가·보스토크 프레스 대표

김현호 사진비평가·보스토크 프레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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