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판막증 수술과 심부전, 대장암. 아버지는 오랫동안 대학병원 단골손님이었다. 외래진료 날이면 아침 일찍 들러 검사를 하고, 오전 오후 여러 진료과를 순례했다. 그나마 같은 날짜로 맞출 수 있다는 것이 다행. 자식들은 출근을 해야 하니 아버지와 어머니, 두 노인이 서로를 의지하며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고 병원을 왕래했다. 하지만 보조기 없이 걷기 힘들어지면서, 어머니 혼자 외래를 방문하여 대신 상담과 처방약을 받아오게 되었다. 그럴 바에야 진료기록을 옮겨와서 가까운 동네의원에 다니시라고 몇번이나 이야기했지만, 내 말을 듣지 않았다. 중병이고 약이 많아 복잡하기 때문에 동네의원에서는 치료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마침 ‘재택의료 시범사업’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고 신청하려 했을 때에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의사가 직접 집에 와서 진료해준다면 좋아하실 줄 알았는데, 대학병원 교수님이 아버지 상태를 제일 잘 알고 있다며 필요 없다고 했다. 그 명의들을 직접 만나지도 못하고 약만 받아오고 있는 상황에서도 그 믿음은 좀처럼 흔들리지 않았다. 대형병원에 비해 동네의원은 전문성이 떨어지고, 세부 전문 분야별로 최고 전문가한테 진료를 받는 것이 최선이라는 믿음 말이다.

정부의 ‘필수의료’ 대책도 맥락은 조금 다르지만 비슷한 전제를 공유한다. 응급환자들이 병원을 찾지 못해 ‘뺑뺑이’를 돌다 사망하고 소아과 ‘오픈런’이 일어나면서 사회적 우려가 고조되자, 올해 1월 보건복지부는 필수의료 지원대책을 발표했다. 응급의료체계 구축, 응급 심뇌혈관질환 전문 치료역량 강화, 상급종합병원의 중증 진료 기능 강화처럼 병원급 이상 의료기관의 진료역량을 강화하고, 적정 의료서비스 공급이 어려운 분만이나 소아 분야에 초점을 두고 있다. 지난 10월 발표된 ‘필수의료 혁신전략’도 같은 맥락이다. 이는 국립대병원을 필수의료의 중추로 육성하겠다는 것이 핵심이다. 이를 위해 소관 부처를 교육부에서 복지부로 이관하고 인력과 연구·개발, 시설·장비 개선을 지원하며 중증·응급진료에 대한 보상을 강화하겠다고 강조했다. 매우 시의적절하고 필요한 정책임에 틀림없다.

다만 아쉬운 것은 일차의료의 중요성이 간과되고 있다는 점이다. 전국의 중증 환자들이 굳이 서울까지 이동하지 않아도 지역에서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보장받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대학병원이 건강 문제의 모든 것을 책임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고혈압과 당뇨병 같은 만성질환 관리를 잘하면 심근경색이나 뇌졸중 발생을 막을 수 있으며, 이는 일차의료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영역이다. 마찬가지로 대학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이후에도 재발을 막으려면 투약과 생활 습관 교정 같은 꾸준한 관리가 필수적인데, 역시 일차의료의 역할이 중요하다. 양질의 일차의료야말로 중증·응급의료체계를 떠받칠 수 있는 필수의료의 주축이다. 하지만 바람직한 일차의료에 대한 우리의 ‘경험치’가 부족하다보니, 지역에 대형병원 유치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커도 일차의료 강화를 요구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최근 아버지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했는데, 병원 입원을 원하지 않으셨다. 재택의료기관에 연락하자 다음날 저녁 8시가 넘은 늦은 시간에 의사가 직접 방문해주었다. 황망한 상황에서 의사가 방문하여 아버지를 직접 봐주고 전문적 조언을 해주는 것은 의사인 나에게도 커다란 의지가 되었다. 가족들은 ‘의사 선생님’이 집을 직접 방문해준 것 자체에 놀랐고, 차분한 설명과 진심 어린 위로에 너무나 고마워하며, 진작 방문진료를 받았으면 어땠을까 아쉬워하기도 했다. 짧지만 강렬한 경험이 인식을 크게 바꾼 것이다.

아버지 임종을 앞둔 상황에서, 일차의료의 ‘효능감’을 더 많은 사람들이 경험함으로써 일차의료 강화를 요구하게 만드는 필수의료 전략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쩔 수 없는 직업병이다.

김명희 노동건강연대 운영위원장·예방의학 전문의

김명희 노동건강연대 운영위원장·예방의학 전문의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