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어디서부터 걸어왔는지 헤아릴 순 없을까

2024.04.30 20:59 입력 2024.04.30 21:00 수정

나는 10여년간 우울, 불안으로 내원한 20~30대 청년들을 주로 진료해왔다. 비교적 잘 지내다가 어떠한 사건이나 피로의 누적으로 인해 우울증을 겪게 된 내담자들은 1년 전후의 내원으로 회복되어 치료를 종결하였다. 그러나 유년기에 애착 트라우마를 경험하였거나, 집단 따돌림, 부적응 등으로 오래 힘들어하다가 병원을 찾은 내담자들과는 해야 할 작업이 적지 않아 긴 치료기간이 필요하기도 했다. 이렇게 오랜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를 마무리해가는 청년 내담자들과 한 번씩 나누게 되는 대화가 있다.

“선생님, 5년 전 이 병원에 처음 왔을 때를 생각하면 저 정말로 많이 좋아졌어요. 죽고 싶은 마음도 거의 사라졌고, 문제가 생겨 우울감이 올 때도 전만큼 깊게 침체되지 않아요. 그 우울에서 회복되기 위해 대처하는 요령도 여러 개 생겼고,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 요청도 잘해요. 이제는 저를 그렇게 미워하고 싫어하지도 않아요. 그런데요, 나아지고 보니 이 사회에서의 객관적인 저의 위치가 보여요. 그동안 어려움을 겪고 회복하느라 학교와 직장에서 좋은 성적과 경력을 쌓지 못했어요. 제가 가지고 있는 역량의 반도 보여주지 못한 것 같아요. 요즘 같은 경쟁사회에서 해놓은 것도 없고 지지기반도 약한 저는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요.”

“OO님, 지금의 막막함과 불안을 이해합니다. 같이 상황을 개선해나갈 방법을 찾아보았으면 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는 꼭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당신을 잠깐 본 사람들, 그리고 당신의 직장 상사나 입사 면접관은 모르겠지만, 당신과 나는 분명하게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여기까지 걸어왔는지를요. 얼마나 가파르고 힘든 길을 포기하지 않고 걸어왔는지 말입니다. 세상의 단순한 평가로는 0일지 모르지만, 사실 당신은 -50에서 0까지의 드러나지 않는, 담대한 진전을 이뤄냈습니다. 저는 당신의 용기와 인내를 존경하며, 역경을 견뎌낸 당신이 큰 잠재력을 가진 인재라고 생각합니다.”

주치의로서의 나의 말이, 내담자들이 스스로의 노력과 성과를 인정하는 근거가 되길 바란다. 그리고 청년들이 역경에서 회복해나가는 과정을 수없이 지켜본 목격자로서 경영자, 중간관리자, 교육자 여러분께 중요한 건의를 하고 싶다. 학교와 직장의 인재 선발과정에 지원자가 어디서부터 어떻게 걸어왔는지, 그 진전의 맥락과 방식을 고려하는 단계를 추가하면 좋겠다. 누군가의 출발선, 장애물, 역경의 난이도, 역경을 극복하고 대처하는 방식, 그러니까 -50에서 0까지 걸어온 성과 또한 반영하자는 것이다.

이상적인 의견이라 치부하기 전에 한번 생각해보자. 현재 대부분의 선발체제는 성적, 학벌, 자격증, 경력 등 과거의 성과와 탁월함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좋은 스펙을 최대한 많이 제시하면 합격할 확률이 높아지니, 청년들은 누구도 마음을 놓지 못한 채 준비단계에 과도한 시간과 자원을 쏟아부으며 소진된다. 그렇다고 이 방식이 적절한 인재를 잘 찾아내는 것도 아니다. 조직심리학자 애덤 그랜트는 책 <히든 포텐셜>에서 학력, 직장경력, 과거 업무수행 성과가 향후 지원자가 업무를 잘 수행할지를 충분히 예측하지 못한다는 연구결과들을 제시한다.

삶의 고난을 겪은 지원자를 우대하자는 것이 아니라, 역경을 헤쳐오느라 가시적 성과와 기반이 취약할 수밖에 없으나 잠재력을 가진 지원자들에게도 기회를 주자는 것이다. 이런 노력들이 인재를 통해 발전해 온 우리 사회의 힘과 성과를 이어가는 방법이 될 것이다. 사회라는 배에 처음으로 탑승하는 청년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걸어왔는지를 고려하며 잠재력과 어려움을 헤아리는 것은, 기성세대가 그들을 개성과 맥락을 지닌 구성원으로 존중하고 환대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안주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안주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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