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리스트 판결’의 밝음과 어둠

2017.07.30 14:59 입력 2017.07.30 21:23 수정
김현정 | 서울시동부병원장

우주소설의 원전으로 꼽히는 <스페이스 오디세이>에는 할(HAL)이라는 인공지능 컴퓨터가 등장한다. “파티를 방해해서 미안하지만 문제가 생겼습니다.” 기계는 자의적 판단을 하고 상관인 인간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다.

[정동칼럼]‘블랙리스트 판결’의 밝음과 어둠

“법치주의를 지켜야 할 공무원은 대통령을 비롯한 윗선의 위법한 지시보다 헌법이 보장하는 ‘국민의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먼저 따라야 한다.” 지난 27일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에 대한 1심 선고를 바라보며 할의 불복종이 생각났다.

전직 대통령비서실장, 장차관 또는 고위공무원으로서 아마도 상당한 지적능력을 지녔을 것으로 추정되는 피고인들에게 맹목적으로 복종한 죄의 책임을 엄중히 묻고 있다. “왜 불복종의 권리를 행사하지 않았느냐? 너희는 그 정도의 판단력도 없느냐? 기계만큼의 영혼도 없는가 말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시민의 불복종>이라는 책에서 세 가지 선택을 묻는다. “부당한 법률이 있다고 하자. 우리는 그 법률을 그저 준수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그 법률을 고치려 노력하겠는가, 그도 아니면 당장 그 법을 어기겠는가?”

곰곰 생각해 본다. 세월호 침몰 때 많은 아이들은 가만 있으라는 어처구니없는 지시를 따랐다. 지하철 참사 때에도 전동차 안에 대기하라는 안내방송을 많은 사람들이 그대로 따랐다. 무례한 질문을 받았을 때에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자동반사적으로 대답을 하려고 애쓴다. 상대가 하는 질문이 적절한 것인지조차 생각하기도 전에 허둥지둥 답부터 하려 든다. 나는 기회가 될 때마다 아이들에게 일러둔다. “때론 대답하지 않아도 돼. 네겐 대답하지 않을 권리가 있어. 왜 질문하냐고 거꾸로 물을 권리도 있단다.”

아마도 우리는 복종이라는 습관에 지나치게 길들여져 있는 것 같다. 이 집단적 습관에서 벗어나려면 의지적 노력이 많이 필요할 터인데 이번 판결은 불복종이 미덕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법원 차원에서 환기시켜 준 것 같아 내심 반갑다. 이것이 이번 판결의 첫 번째 밝음이다.

한편 이번 선고에는 ‘팔 길이의 원칙’(arm’s length principle)이라는 생소한 용어가 등장한다. “문화예술계 지원 배제 범행은 팔 길이의 원칙을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권력의 기호에 따라….” 팔 길이라니 무슨 뜻일까? 언뜻 초등학교 체육시간 땀 뻘뻘 구령 붙이며 뛰어다니던 제식훈련이 떠오른다. “기준!” “양팔간격 좌우로 벌려.” “하나 둘 셋, 야!”

뜻을 찾아보니, 1946년 잉글랜드 예술평의회를 만들 때 생겨난 용어로서 예술계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보장해주기 위해 행정관료와 예술계는 ‘팔 길이’로 표현되는 적절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개념이다. 공적지원을 빌미로 권력자가 의도하는 예술을 유도·강요하는 일이 없도록 ‘지원은 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이 원칙을 재천명해준 점, 이것이 이번 판결의 두 번째 밝음이다.

그런데 실은 내가 찾아본 용어가 하나 더 있다. ‘집행유예’라는 낱말이다.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명확하게는 몰랐다. ‘유죄가 인정된 피고인에 대해 형을 선고하면서 그 집행을 일정기간 동안 유예하고 문제없는 상태로 그 기간이 지나면 선고된 형의 효력이 상실되는 제도로서….’ 요거 참으로 편리한 제도로세. 만능 요술방망이 같구나.

같은 죄목으로 함께 단죄 받으면서 누구는 집행유예를 받아 석방되고 누구는 못 받아 감금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아이러니하게도 이날 블랙리스트 재판부는 팔을 폈다 굽혔다 하면서, 팔 길이 원칙과 팔 굽힘 변칙, 두 가지 상반되는 현상을 동시에 보여주는 ‘신기방기’를 펼쳤다. 피고인에게는 팔 길이 거리를 지켜야 한다고 꾸짖고서 스스로는 팔을 안으로 굽히는 판결을 보여준 셈이다.

우리에게 세세한 법지능은 없지만 법정서는 분명 있다. 공정하다고 느끼는가? 공평하다고 느끼는가? ‘라면도둑’이니 ‘포클레인’이니 인터넷이 시끄러웠던 이유는 판결을 바라보는 국민정서가 곱지 않다는 방증이다. 만약에 법원이 좀 더 사려 깊고 지혜롭다면, 좀 더 국민정서를 존중하고 배려한다면 사실여부 반박에 급급하기보다는 사람들이 석연치 않아 하는 부분을 명쾌하게 짚어주는 데에 먼저 힘을 쏟았을 것이다.

느낌은 단순히 느낌으로 멈추지 않는다. 집행유예를 비롯하여 우리나라 양형관행에서 법관에게 지나치게 큰 재량이 부여되어 있다는 비판에 점점 힘이 실리게 될 실마리를 법원 스스로 제공하고 있진 않은가? 여기에 이번 판결의 어둠이 있다.

재판을 마치고서 검찰과 피고인 어느 쪽도 만족했다는 표현이 없었다. 진심인지, 작전상 멘트인지 알 수 없으나 일단은 서로 항소하겠다고 한다. 아직 재판은 끝난 것이 아니다. 국민도 일단은 지켜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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