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세기 ‘眞書論’ 힘실리나

2003.02.20 18:48 입력

진위 여부를 둘러싸고 논쟁의 초점이 되고 있는 화랑세기가 진짜일 가능성이 있다는 설을 뒷받침할 만한 자료가 발굴됐다.

일본 근현대사가인 박환무 숭실대 강사는 남당 박창화(1899~1962)가 일본의 중앙사단(中央史壇) 1927년 12월호와 28년 2월호에 실린 ‘신라사에 대하여(新羅史に ついて)’라는 제목의 논문 2편을 발굴, ‘역사비평’ 봄호에 공개했다.

최근 ‘화랑세기’를 쓴 김태식씨는 ‘역사비평’ 같은호에 붙인 논문에서 “이 박창화의 논문은 신라향가 1수를 포함한 화랑세기가 1929년 2월 오쿠라 신페이 교수가 향가를 처음 해독하기 전인 1927년과 28년 사이에 화랑세기가 이미 존재했음을 알려주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는 박창화가 향가가 해독된 이후인 1930~45년 사이에 화랑세기와 그 안에 담긴 향가 1수를 조작했다는 가짜론자들의 주장을 뒤엎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또 “박창화는 신라의 문자사용과 불교 도입이 중국의 양서(梁書·양서에는 521년까지는 신라에 문자가 없었다고 했다)에 전하는 것보다 훨씬 빠른 시기에 이뤄졌음을 증명했다”면서 “또한 신라의 주축사상을 신도(神道)로 주목한 점, 신라 실성왕비를 내류부인으로 지목한 점, 삼국유사에 전하는 소위 사금갑 설화를 신라소지왕비 간통과 연결한 점 등은 박창화가 화랑세기를 참조한 대표적인 증거물”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윤선태 충남대 교수(백제학 교육연구단)는 논쟁의 초점이 되고 있는 향가 ‘송사다함가’에서 19세기 이후 국어의 영향을 받은 위작일 가능성을 시사하면서 여전히 ‘위작설’을 제기했다. ‘박창화가 과연 향가까지 창작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까’ 하는 의문점이 ‘화랑세기 진짜론’에 힘을 실어준 게 사실이지만 이 향가가 19세기 이후 누군가가 전승되던 이 향가의 일부를 수정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윤교수는 또한 “박창화의 ‘사금갑 설화와 내류부인에 대한 언급’은 안정복의 동사강목이나 심지어는 광산 김씨 등의 족보류에서도 보인다”면서 “박창화는 필사본 화랑세기가 없어도 언제든 조작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기환기자 lk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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