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연의 색다른 인터뷰

퇴임 앞둔 박용만 상의 회장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의 고교 시절 꿈은 사진기자가 되는 것이었다. 비록 아버지 박두병 두산그룹 초대회장의 반대로 사진기자가 될 수는 없었지만, 그는 수십년째 시간이 날 때마다 카메라를 들고 거리 풍경을 담아왔다. 지난 25일 박 회장이 평소 몸에 지니고 다니는 카메라를 들고 사진촬영을 하고 있다.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의 고교 시절 꿈은 사진기자가 되는 것이었다. 비록 아버지 박두병 두산그룹 초대회장의 반대로 사진기자가 될 수는 없었지만, 그는 수십년째 시간이 날 때마다 카메라를 들고 거리 풍경을 담아왔다. 지난 25일 박 회장이 평소 몸에 지니고 다니는 카메라를 들고 사진촬영을 하고 있다.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66)이 7년8개월간의 노정을 마치고 오는 24일 퇴임한다. 오는 9월이면 두산인프라코어 회장직에서 물러남으로써 ‘두산’과도 결별한다. 진정한 ‘자유인’이 되는 셈이다. 그는 호기심 많은 ‘얼리어답터’이자 왕성한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활동가, 소통에 능한 최고경영자(CEO)로 유명하다. 그에겐 또 다른 일상이 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카메라를 들고 거리 풍경을 담는다. 국제적인 봉사단체 ‘몰타기사단’ 한국지부 회장으로서 주 2회 요리사가 되어 봉사에도 나선다. 최근 첫 산문집 <그늘까지도 인생이니까>(마음산책)를 펴내고 제2의 인생을 준비하는 박 회장을 지난달 25일 서울 성북구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9월엔 두산인프라코어 회장 퇴임
‘자유인’으로 제2의 인생을 준비
백지상태에서 다시 시작할 것

- 몇 달 후 두산에서도 떠나는데, 소회가 어떻습니까.

“스스로도 놀랄 만큼 깨끗하고 담담해요. 두산에서 39년을 보냈어요. 아쉬운 것도 없고 후회도 없어요. 제 능력 한도 내에선 최선을 다했으니까요. 그래서 만족스러워요.”

- 앞으로 뭘 할 건가요.

“가만히 보니 제가 지금껏 살아온 방식의 연장선상에서 앞으로 뭘 할지 소재를 몇 개 놓고 고민하고 있더라고요. 그렇게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업할 때와 똑같이 연구조사하고 목표 설정 후 그것을 달성하려 분투할 테니까요. 그건 좀 재미없잖아요. 하하하… 그래서 백지에서 시작하기로 했어요. 백지명함도 팔 거고요.”

- 백지명함이라고요?

“(고개를 두어 번 크게 끄덕이며) 적힌 건 박용만, 전화번호 끝. 제2의 삶인데, 지금까지 해오던 방식에서 벗어나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제 나이를 고려하면 지금부터 할 수 있는 10여년에 대한 답이 나올 거예요.”

그는 유쾌했다. 자주 웃었고 농담도 잘했다.

- 첫 산문집 <그늘까지도 인생이니까>는 어떻게 출간하게 된 건가요.

“내가 하는 생각을 글로 옮겨 즐기자는 생각에서 써내려간 책이에요. 커리어가 바뀌고 삶이 바뀌는 시점이 되니까 저절로 동기부여가 되더라고요. 마침 코로나19로 인해 해외 출장은 엄두도 못 내는 환경이 됐으니까요.”

- 후속 책도 예정돼 있다고요.

“출판사와 서너 권까진 더 내보자고 이야기돼 있어요. 주제는 결정하지 않았지만 제가 천성적으로 사람을 좋아하고 사진과 음식, 여행도 즐겨요. 요리와 사진, 여행을 매개로 사람 이야기, 삶 이야기를 하되 메시지가 있는 책을 내고 싶어요.”

- 글쓰기가 쉽지는 않았을 텐데요.

“예전에 햇빛발전소라는 개인 홈페이지를 운영했어요. 거기에 글을 매일 올렸는데 사람들이 재미있어하고 웃어주니까 행복하더라고요. 그러다 싸이월드로 옮겨 긴 글을 썼고, 트위터로 이동 후엔 100자 이내로 써야 했어요. 자연스럽게 긴 글을 짧게짧게 줄이는 훈련이 됐죠. 트위터 할 때는 하루 30건 이상 멘션을 날렸어요. 팔로어도 피크 때는 27만명까지 갔고요. 지금은 페이스북을 이용하는데 주로 차 타고 이동할 때 써요.”

- TV 시청 중에도 아이패드 등 2대 이상 기기로 외부와 소통한다던데, 피곤하지는 않나요.

“저는 즐거워요. 다른 종류의 사람, 새로운 이야기를 좋아해요. 트위터 할 때도 그랬고 요새도 메신저로 연락 오면 짧든 길든 답해요. 누가 말 거는데 무시하는 건 예의가 아니니까요. 물론 힘들 때도 있죠. 페이스북 친구가 3000명이 넘는데, 생일이면 축하메시지가 500~600개씩 오거든요. 그래도 일일이 감사인사 다 했어요. 도저히 못하겠으면 그때는 SNS를 떠나면 돼요.”

<그늘까지도 인생이니까>는 총 69개 챕터로 구성돼 있다. 그가 기업인으로 성장하고 경영 일선에서 겪었던 여러 에피소드, 지켜온 가치와 꿈꿔온 미래에 대한 이야기도 담았지만 그에게는 ‘그늘’이기도 한 내밀한 가족사도 들어 있다. 박 회장은 박두병 두산그룹 초대회장(1910~1973)의 6남1녀 중 5남이다. 박 회장은 위 4남1녀와 어머니가 다르다.

- 개인사 공개에 고민은 없었나요.

“사실은 조금 더 썼다가 자서전도 아닌데 굳이 다 이야기할 필요가 없겠다 싶어서 줄였어요. 책에 쓴 가족 이야기는 그 정도는 말해야 나머지 글들을 이해할 수 있겠다 싶어 넣은 거예요. 주변 사람들은 이미 다 아는 이야기이고. 제가 잘못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괜찮아요.”

그는 서울 명륜동에서 외할머니,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아버지는 엄했다. 중학생이 되고부터는 학교를 걸어다니라고 해 대학로 근처에서부터 지금의 화동 정독도서관까지 걸어다녔다. 당시 아버지로부터 상처받은 적도 있었다. 중2 겨울 어느 날 등굣길, 새벽부터 내린 폭우로 바지까지 흠뻑 젖은 채 떨고 있는 그가 횡단보도 앞에 서 있는 것을 흘낏 보고도 승용차 뒷좌석에 앉은 아버지는 그냥 지나쳤다. 그는 “이제는 웃으며 이야기할 추억일 뿐이지만 그날 일이 한동안 상처로 남았었다”고 했다.

- 아버지는 어떤 분이었습니까.

“굉장히 무서웠어요. 잘하면 가만히 계시고 잘못하면 무지하게 야단치셨죠. 칭찬은 딱 두 번 들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무섭다고 싫은 아버지가 아니었어요. 일방적인 훈계이긴 해도 이야기도 많이 하셨으니까요. 저한테 아버지는 무서워서 편안한 대화는 안 됐지만 늘 엄한 그 모습이 그리운 존재예요.”

- 두 번의 칭찬은 뭐였나요.

“제가 경기중학교에 합격했을 때와 고등학생 시절 집안일로 어려워진 친구를 돕게 돈 좀 달라고 했을 때였어요. 두 번째 때 정말 놀랐어요. 그 말 꺼내기가 참 힘들었는데 그 무서운 아버지 입에서 칭찬이 나와 대박 놀랐거든요(웃음). 1년 치 용돈을 달라고 했는데 ‘어려운 친구를 돕는 건 잘한 일이다’라고 딱 한마디. 그러고는 다음날 주셨어요.”

- 아들이 공부를 잘하니 내심 대견해하시지 않았을까요.

“전 못 느꼈으니까…. 그런데 그런 건 있었어요. 아버지와 외출할 때면 꼭 교복을 입게 하셨어요.”

- 가족의 형태가 여느 집과 다르다는 걸 알게 된 건 언제쯤이었나요.

“중학교 1학년 때….”

순간 그가 가방에서 주먹만 한 빨간색 음성기기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누른다. 기기에선 “노(no)! 노!! 노!!!” 하며 점점 커지는 음성이 나왔다. 그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웃었다. 이야기가 더 깊게 들어가는 것에 대한 재치 있는 거부감의 표현이었다.

박용만 회장은 “아버지는 무서워서 편안한 대화는 안 됐지만 나에게는 늘 엄한 그 모습이 그리운 존재”라고 말했다. 박 회장의 아버지 박두병 두산그룹 초대회장은 그가 열여덟 살 때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박용만 회장은 “아버지는 무서워서 편안한 대화는 안 됐지만 나에게는 늘 엄한 그 모습이 그리운 존재”라고 말했다. 박 회장의 아버지 박두병 두산그룹 초대회장은 그가 열여덟 살 때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몸 여기저기 고장, 혹사의 대가
하지만, 아쉬움도 후회도 없어
나에겐 ‘그늘까지도 인생이니까’

아버지는 그가 열여덟 살 때 폐암으로 돌아가셨다. 처음 가본 큰어머니와 형들이 사는 집에서 그는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봤다. 장례식이 끝난 후 큰형(박용곤 전 두산그룹 회장·작고)이 그에게 말했다. “너는 내 동생이다.” 그는 “큰형의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정확히 모두 이해하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그날부터 정말 ‘형제’로 지내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는 대학(서울대 경영학과) 졸업 후 외환은행에 2년 다녔고 미국에서 경영학 석사과정(MBA)을 밟은 뒤 두산건설에 입사했다.

- 재능이 많으니 다른 직업을 선택할 수도 있었을 텐데요.

“사진기자가 되고 싶었지만 고교 시절 아버지께 말씀드렸다가 크게 혼쭐이 난 후부턴 특별하게 하고 싶은 게 없었어요. 미국 유학이 끝날 무렵 건축에 관심이 생겨 하버드대 건축과를 찾아갔더니, 제가 예술적인 사람임을 표현할 수 있는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오라고 해요. 그래서 준비하는데, 셋째 형(박용성 전 두산그룹 회장)이 찾아와 회사 일을 거들라고 해 입사하게 된 거예요.”

- 책을 보면 “애매한 처지의 오너 일가로서 불편함”이라거나 “당당하지도 않았고 특권이 주어져보았자 편안하지도 쉽지도 않았다”는 문장들이 눈에 띄어요. 불편한 시선에서 벗어난 것은 언제쯤이었습니까.

“능력으로 저를 증명하고 난 다음에요. 시기적으로는 그룹 기획조정실장이 되기 직전쯤부터였을 거예요. 그때부터 사람들이 저를 인정했으니까요.”

그는 1998년 9월 두산그룹 기획조정실에서 경영총괄을 맡았고, 2012년 그룹 회장까지 올랐다가 2016년 3월 물러났다. 그 시기에 두산그룹은 7배 성장했다. 박 회장은 소비재 중심의 두산그룹을 중공업 중심 기업으로 재편하고 글로벌기업으로 만들었다는 평을 듣는다.

- 기업을 경영하면서 여러 위기를 맞았을 텐데요.

“1990년대 말 외환위기 때와 2008년 리먼 사태(글로벌 금융위기) 때 굉장히 힘들었어요. 개인적으론 2015년 구조조정 과정에서 두산인프라코어 신입사원 희망퇴직으로 오해받을 때 정말 지옥 같았죠.”

- 오해였군요.

“대리 이하는 절대 건드리지 말라는 게 저의 철칙이에요. 어느 날 경영진이 회사 직급별 인적 구성 그래프를 보여주며 위는 거의 없고 맨 아래 직급만 이렇게 넓게 분포된 상태로는 일을 할 수 없다고 해요. 그래도 갓 입사한 친구들은 건드리지 말라 해놓고 퇴근했는데, 일이 터진 거예요. 다음날 아침 불같이 화내며 취소하라 했지만 소용없었어요. 어쨌든 회장인 제게 포괄적 책임이 있는 거예요.”

그는 1999년 말부터 2000년 초에 걸쳐 허리수술을 세 번 했다. 걷기운동을 꾸준히 하면서 허리통증은 많이 나아졌지만 지금도 방바닥에는 앉지 못한다. 2011년쯤엔 일과성 허혈성 발작(TIA)도 일어났다. 눈도 한쪽은 악성 황반변성으로 기능을 거의 못한 지 오래다. 그는 “몸이 여기저기 고장났는데 기업을 하면서 혹사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저는 뭘 하든 제 한계까지 가야만 직성이 풀리는데 그게 원인인 것 같아요. 혹사는 습관이어서 일할 때 혹사하는 사람은 취미할 때도 혹사해요.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하는데 아직도 잘 안되네요(웃음).”

-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재임 때도 젊은 창업자들을 위해 고군분투했죠.

“법과 제도에 막혀 사업에 어려움을 겪는 젊은 창업자들을 데리고 국회를 수없이 쫓아다녔어요. 많게는 하루 7㎞씩 걸으며 여야 의원들에게 입법을 호소했죠. 의원회관 복도를 걸으며 젊은이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100번쯤 한 것 같아요. 과거에 만든 법과 제도로 젊은이들의 도전을 가로막는 건 어른들 탓이니까요. 다행히 ‘P2P금융업법’ ‘데이터 3법’ 등이 통과됐어요. 그것과 별개로 규제를 우회하는 샌드박스도 200일 만에 80개 아이템이 통과됐고요.”

박용만 회장은 지난 6년간 국제적 구호 봉사단체인 ‘몰타기사단’ 한국지부를 이끌며 매주 아마추어 요리사로서 봉사에 매진해왔다. 그는 “누군가에겐 안락한 체제가 누군가에겐 불편하다면 체제의 문제인데 이상적 체제가 갖춰질 때까지는 조금 더 안락한 사람들이 나누고 돕는 공동체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나로선 그게 선택이 아니라 의무임도 깨달았다”고 덧붙였다.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박용만 회장은 지난 6년간 국제적 구호 봉사단체인 ‘몰타기사단’ 한국지부를 이끌며 매주 아마추어 요리사로서 봉사에 매진해왔다. 그는 “누군가에겐 안락한 체제가 누군가에겐 불편하다면 체제의 문제인데 이상적 체제가 갖춰질 때까지는 조금 더 안락한 사람들이 나누고 돕는 공동체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나로선 그게 선택이 아니라 의무임도 깨달았다”고 덧붙였다.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서울역 앞 알코올중독자 도우며
교만함 자각, 나눔의 의무 깨달아
6년 넘게 급식소 등 4곳서 봉사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그는 국제적 구호봉사단체 ‘몰타기사단’ 한국 회장을 맡아 6년 넘게 노인급식소와 빵공장, 양로원 등 4곳에서 봉사활동을 해왔다. 매주 월·목요일 오전시간은 아마추어 요리사로 봉사에 나선다. 2014년 8월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나가라. 나가서 그들을 도우라”는 메시지를 접한 게 계기였다고 한다. 그는 17년째 마리아수녀회의 알로이시오 소년의집 아이들도 후원하고 있다.

- 직접 몸으로 뛰는 나눔활동을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담장 너머로 먹을 것을 던지는 행위가 되어선 안 되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서울역 앞에서 알코올중독자들을 위한 도시락을 만들면서 제가 몰랐던 세계를 접했죠. 누군가를 돕는 행위가 굉장한 행복감을 준다는 것도 알게 됐어요. 그리고 어떤 깨달음을 얻으면서 점점 활동 범위를 넓히게 됐어요.”

- 깨달음이라면….

“그분들을 만난 초기에 그런 생각을 했어요. 알코올중독자가 된 이들의 현재는 자신의 선택에 의한 결과이니, 선택의 기회조차 못 가진 아이들을 돕는 게 공평하겠다고요. 그런데 그분들과 대화하면서 제 판단이 얼마나 교만한 것인지 자각했어요. 그분들께는 당시 술 외엔 다른 선택지가 거의 없었을 거란 현실을 알게 됐거든요. 또 나로선 이 일이 선택이 아니라 의무라는 것도 깨달았죠.”

- 어르신들을 위한 빵공장을 열고, 최근엔 밥집도 오픈했다고요.

“종로 급식소가 문 닫는 주말엔 어르신들이 어떻게 식사를 해결하실까 생각하다가 빵을 만들어드리면 좋겠다 싶어 시작했어요. 또 6개월 전 문을 연 밥집에선 어려운 어르신들을 파악해 저와 저희 봉사자들이 주 2회 밥을 지어 배달해드리고 있어요.”

- 나눔을 실천함으로써 얻은 것은 무엇인가요.

“의무를 어느 정도 이행하고 있다는 안도감? 적어도 하지 않음으로써 느끼는 죄책감은 덜었죠. 누군가에겐 안락한 체제가 누군가에겐 불편하다면 체제의 문제인데 그에 대한 합치점을 찾아가는 데는 시간이 걸려요. 그렇다면 그렇게 이상적인 체제가 갖춰질 때까지는 조금 더 안락한 사람들이 나누고 돕는 공동체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 봉사현장에서 주로 맡는 일이 칼질이던데, 동영상을 보니 오이 써는 속도가 범상치 않던데요.

“오래 하다보니 칼질엔 도가 텄어요. 양파 50~60개쯤은 20~30분이면 규격 맞춰 깔끔하게 썰어낼 수 있죠(웃음).”

- 집에서도 요리를 자주 합니까. 혼자만 사용하는 전용 냉장고와 칼도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하하하… 맞아요. 제 전용이 있어요. 저는 주로 양식, 아내는 한식 담당이거든요. 제가 요리에 처음 관심을 가진 것은 1986년 일본에서 6개월간 일본어 공부하며 자취할 때였어요. 그러다 6년 전부터 주방 봉사를 하면서 칼, 불, 기름 등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지고 크게 재미를 느꼈죠. 집에서도 제가 밥하는 날이 많아요.”

그는 찐고구마 하나도 그냥 먹지 않는다. 리코타치즈, 생수, 생크림 등을 활용해 전혀 새로운 맛과 비주얼로 창조한다.

- 사진은 언제부터 관심을 가졌나요.

“고1 소풍 때 사진 콘테스트에서 입상하면서예요. 얼마 후 아버지가 일본 출장에서 돌아오시면서 35㎜ 일안 리플렉스 카메라를 사다주셨어요. 사진기자의 꿈은 아버지의 반대로 일찌감치 포기했지만 수십년간 시간 날 때마다 무작정 거리로 나서 사진을 찍어왔어요.”

- 사진기자들도 인정하는 실력인데 사진전을 열 생각은 없습니까.

“누가 봐도 박용만의 사진이라고 할 만한 결과물들이 더 쌓이면 그런 날도 오겠죠(웃음).”

박용만 회장은 유머러스했다. 그의 산문집도 읽다보면 ‘풋!’ 하고 웃음을 터뜨리는 대목이 심심찮게 나온다. 2018년 10월 그가 문재인 대통령과 함께 바티칸으로 가 프란치스코 교황을 알현하기 전 매일 밤 했다는 기도 내용 등이 그렇다. 그는 교황께 짧은 시간 드릴 말씀을 한국에서 스페인어로 녹음해 달달 외우면서 밤마다 이렇게 기도했다. “교황님께서 제 말을 다 들으실 수 있도록 실수 없이 하게 도와주세요. 그리고 교황님께서 절대 스페인어로 반문을 하지 않게 해주세요.” 그는 이번 산문집의 인세를 그와 봉사자들이 운영하는 밥집의 반찬 구입비로 쓰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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