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주, 안녕! 42.195㎞

2009.10.21 17:33 입력 대전 | 김창영기자

41번째 완주로 은퇴무대 전국체전 우승

“마라토너가 은퇴 레이스를 단축 마라톤으로 한다는 것이 말이 되나. 죽어도 42.195㎞를 달리다가 죽어야지….”

‘국민 마라토너’ 이봉주(39·삼성전자)와 동고동락한 오인환 감독(51)은 지난 3월 서울국제마라톤을 끝으로 태극마크를 반납한 뒤 이렇게 말했다. 이봉주가 하프마라톤에서 은퇴식을 한다는 언론보도가 잇따른 데 대한 마라토너의 자존심을 강조한 말이었다.

아름다운 피날레 이봉주가 21일 대전 한밭종합운동장에서 열린 전국체전 남자일반부 마라톤에서 1위로 결승선을 들어오며 두 팔을 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 대전 | 연합뉴스

41번째 풀코스 도전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선수와 감독은 그후 8개월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쉼없이 달렸다. 세월의 무게가 힘겨운 이봉주였지만 희망을 안고 달린 20년에 명예로운 마침표를 찍어 후배들에게 경종을 울리고 싶어서였다.

2시간15분25초 ‘정상에서 내려오다’

21일 오전 8시 대전 한밭종합운동경기장. “고향을 위해 마지막 레이스를 전국체전에서 펼치고 싶다”던 그가 출발선에 서자 어머니 공옥희씨를 비롯한 가족과 육상팬, 보도진이 몰려들었다.

대한체육회와 충남도 관계자들은 “41번째 완주 공로패를 만들어 놓았는데”라며 혹여 이봉주가 레이스를 중도에 포기할까 우려섞인 시선으로 지켜봤다.

하지만 그런 걱정은 기우였다. 총성이 울리자 힘차게 출발한 이봉주는 5㎞ 지점에서 선두를 탈환한 뒤 한 번도 1위를 내주지 않았다.

20㎞ 지점을 통과하면서부터는 속도를 더 냈고 반환점을 돌면서 유영진(30·충북)과의 2파전도 싱겁게 끝났다. 출근길에 ‘봉달이’의 마지막 레이스를 지켜보는 시민들도 격려와 아쉬움, 환호가 교차하는 박수를 보냈다.

한밭운동장으로 들어온 이봉주의 표정에 힘든 기색은 없었다. ‘아직도 몇 년은 더 뛸 수 있다’는 표정이었다. 2시간15분25초로 결승 테이프를 끊은 이봉주는 2위 유영진(2시간17분32초)을 여유있게 따돌렸다.

4연속 올림픽 출전, 41번 완주 대기록

팬들은 충남도청에서 열린 은퇴식에서 “우리는 당신을 영원히 기억합니다”라는 플래카드로 영웅을 맞이했다.

이봉주는 “팬들의 사랑이 있었기에 여기까지 왔다”면서 말을 잇지 못하고 끝내 눈물을 쏟아냈다.

라이벌이자 친구인 황영조(국민체육진흥공단 감독)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월계관을 쓴 뒤 은퇴하자 이봉주는 한국마라톤의 처음이자 끝이었다. 짝발에 평발이라는 신체적인 결함을 극복하고 오뚝이처럼 앞만 보고 달리며 지구를 네 바퀴나 돌았다.

93년 호놀룰루 국제마라톤(2시간13분16초)에서 1위를 차지한 이봉주는 96년 애틀랜타 올림픽(2시간12분39초)에서 은메달을 따면서 본격적인 레이스를 시작했다. 98년 로테르담 마라톤(2시간7분44초)에서는 한국신기록을 작성하며 2위에 올랐다. 2000년 도쿄 마라톤(2시간7분20초)의 기록은 9년째 한국 최고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세월은 그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2001년 보스턴 마라톤과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이 정점이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14위에 그치며 하향세를 그렸고, 2007년 서울국제마라톤에서 극적인 역전우승(2시간8분4초)을 한 게 마지막 우승컵이었다.

이봉주는 세계에서 유일한 4연속 올림픽 출전, 아시안게임 2연패, 41번의 완주라는 대기록을 작성하고 20년 마라톤 인생의 막을 내렸다.

마라톤 강국 포스트 이봉주가 없다

이봉주의 은퇴를 지켜본 육상팬들은 “이제 어쩌지”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포스트 이봉주를 가늠할 베를린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서도 한국마라톤은 끝내 희망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영준(28·경찰대)은 중도 포기했고, 이명승(삼성전자)의 기록은 2시간21분54초(46위)에 불과했다.

이봉주는 “후배들을 위해 뛰었다”며 “이것저것 눈치보는 경향이 너무 많다. 과감한 레이스도 없고, 열심히 하려는 자세로 바꾸어야 한다”는 쓴소리를 했다.

■ 이봉주 프로필 △생년월일=1970년 10월10일(음력) △신장=168㎝ △체중=57㎏ △혈액형=A형 △출생지=충남 천안 △별명=봉달이 △개인최고기록 마라톤 2시간7분20초, 하프마라톤 1시간1분4초, 10000m 29분44초11, 5000m 14분12초27

■ 주요수상 경력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은메달

△1996년 후쿠오카 마라톤 우승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 금메달

△2000년 도쿄 국제마라톤 2위(한국기록 2시간7분20초)

△2001년 제105회 보스턴 마라톤 우승

△2001년 자황컵 체육대상 최우수선수상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마라톤 우승(대회 2연패)

△2007년 서울국제마라톤 우승

■ 주요대회 출전일지 및 기록

△1990·10 전국체육대회 2위(2시간19분15초·풀코스 첫 완주) △1993·12 호놀룰루 국제마라톤 1위(2시간13분16초) △1994·4 보스턴 마라톤 11위(2시간9분57초) △1996·8 애틀랜타 올림픽 2위(2시간12분39초) △1996·12 후쿠오카 국제마라톤 1위(2시간10분48초) △1998·4 로테르담 마라톤 2위(2시간7분44초·한국신기록) △1998·12 방콕 아시안게임 1위(2시간12분32초·풀코스 20번째) △2000·2 도쿄 국제마라톤 2위(2시간7분20초·한국신기록) △2000·10 시드니 올림픽 24위(2시간17분57초) △2001·4 보스턴 마라톤 1위(2시간9분43초)

△2002·10 부산 아시안게임 1위(2시간14분4초) △2003·4 런던 마라톤 7위(2시간8분10초) △2003·8 파리세계육상선수권대회 11위(2시간10분38초·풀코스 30번째) △2004·8 아테네 올림픽 14위(2시간15분33초) △2005·9 베를린 마라톤 11위(2시간12분19초) △2007·3 서울국제마라톤 1위(2시간8분4초) △2007·10 시카고 마라톤 7위(2시간17분29초) △2008·8 베이징올림픽 28위(2시간17분56초) △2009·3 서울국제마라톤 14위(2시간16분46초·풀코스 40번째) △2009·10 전국체육대회 1위(2시간15분25초·풀코스 41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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