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외워서 흉내낸다고 될 리가 없다 자기 안의 리듬을 살아내는그 자유로운 몸짓이

2018.12.19 21:16 입력 2018.12.19 21:47 수정
정여울 작가·문학평론가

아모르 파티, 라틴 아메리카

브라질의 민속춤 공연 라파인쇼에서 열정적인 춤을 추는 댄서의 모습. ⓒ이승원

브라질의 민속춤 공연 라파인쇼에서 열정적인 춤을 추는 댄서의 모습. ⓒ이승원

마치 춤의 유전자가 있는 것처럼 숨 쉬듯 자연스러운 그들의 춤에서
융이 말하는 ‘무의식의 의식화’, 내면의 희열을 찾는 ‘개성화’를 느꼈다

룸바, 살사, 파소도블레, 자이브, 차차차의 공통점은? 이 모두가 라틴 아메리카에서 유래된 춤들의 이름이라는 점이다. 라틴 아메리카 여행에서 놓쳐서는 안될 것은 바로 일상 곳곳에서 부담 없는 가격으로 관람할 수 있는 라틴 댄스의 향연이다. 아르헨티나의 탱고 디너쇼, 브라질의 라파인쇼, 쿠바의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 등 유명한 퍼포먼스들뿐 아니라 평범한 레스토랑이나 소박한 공연장에서도 훌륭한 춤공연을 볼 수 있다. 수많은 라틴 아메리카 사람들의 몸에는 마치 ‘춤의 유전자’가 선천적으로 입력돼 있는 것 같다. 쿠바 사람들과 브라질 사람들은 그냥 걸어 다닐 때도 왠지 신바람이 절로 나고, 어쩐지 리드미컬한 몸짓으로 걷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나의 라틴 아메리카 기행에서 ‘가장 신기하면서도, 가장 따라하기 어려운 것’은 바로 라틴 아메리카 사람들의 춤에 대한 본능적인 감각이었다. 그들은 아무 데서나 음악만 나오면 하늘하늘 온몸을 유연하게 움직였고, 음악이 나오지 않을 때조차도 그냥 자기 내부에서 흥이 넘치면 누구의 눈치 볼 것 없이 몸을 흔들었다. 그들의 몸짓은 너무 자연스러워서 오히려 주눅이 들었다. ‘칼군무’나 ‘볼룸 댄스’ 같은 획일적인 춤이 아니기에 오히려 쉽게 배울 수도, 외워서 출 수도 없는 춤, 그저 영혼이 시키는 대로 몸을 움직임으로써 자기 자신을 저절로 표현하는 춤의 아름다움이 가슴을 울렸다.

칼 구스타프 융의 분석심리학에서는 무의식의 의식화, 즉 ‘잠재된 무의식’을 ‘뚜렷한 의식’의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일을 ‘개성화’라고 한다. 사회화는 ‘유행이나 규칙에 적응하며 다른 사람과 비슷해지는 것’이기에 별도의 특별한 노력이 필요하지는 않은 반면, 개성화는 ‘진정한 나 자신이 되는 의식적인 노력’이기 때문에 본인의 적극적인 노력과 끊임없는 도전이 필요하다.

예컨대 음악적 재능이 있으면서도 평생 음악의 끼를 발휘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 그는 수십년간 오직 음악과 상관없는 일에만 죽도록 몰두하다가, 어느 날 우연히 친구와 함께 공연을 관람하러 가게 된다. 그곳에서 피아니스트의 너무도 매혹적이고 아름다운 연주를 듣게 되고, 그는 ‘자기 안의 음악을 향한 열정’을 발견한다. 단지 아름다운 음악을 듣는 것을 넘어 ‘음악을 직접 연주하고 싶어 하는 자신’을 발견한 그는 주말만이라도 피아노학원에 다니게 된다. 피아노 연주에서 평생 느껴보지 못한 엄청난 희열을 느끼는 것이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열심히 돈을 버는 이유가 이제 주말 동안의 열정적인 피아노 연주를 위한 준비 과정이 되고, 피아노를 연주하지 않는 자신은 전혀 상상할 수 없게 되어버린다.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은 이를 ‘블리스(Bliss)’, 즉 내면의 희열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자기만의 블리스를 찾은 사람은 누구나 ‘개성화’의 눈부신 여정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피아니스트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 갑자기 변신하라는 것이 아니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순간 인생의 모든 압박감을 잊을 수 있다면, 지금 이 순간에 완전히 몰입해 모든 걱정을 잊어버리고 찬란한 희열을 느낄 수 있다면, 그는 지금 당장 피아니스트가 되지 않아도 이미 ‘개성화’하고 있는 것이다.

탱고의 아름다움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댄서들. ⓒ이승원

탱고의 아름다움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댄서들. ⓒ이승원

나는 라틴 아메리카 사람들이 언제 어디서나 마치 숨 쉬듯 자연스럽게 춤을 추는 모습에서 바로 이 아름다운 ‘개성화’를 느꼈다. 그들은 더 멋지게 추려고 안간힘 쓰지 않는다. 그냥 자기 안의 리듬을 살려낸다. 그들의 춤은 새벽녘 첫 이슬을 맞은 꽃봉오리가 흐드러지게 피어오르는 것 같고, 고치에서 막 나온 나비가 한 번도 나는 법을 배운 적 없는 상황에서도 본능적으로 그야말로 자연스럽게 날갯짓을 하는 것 같다. 라틴 아메리카 사람들은 이미 정해진 획일적인 안무를 암기해 춤을 추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 깊숙한 곳에서 천진난만하게 우러나오는 리듬과 몸짓을 ‘춤’이라는 형태로 표현하고 있었다. 나는 왜 저토록 꾸밈없이 해맑은 몸짓으로 춤을 출 수 없을까. 나는 왜 춤을 추기는커녕 혼자 노래를 부를 때조차도 음정과 박자에 신경을 쓸까. 춤을 출 때뿐만 아니라 수영을 할 때도, 노래를 부를 때도 그들은 주저함이 없어 보인다. 숨 쉬듯 자연스럽게 춤을 추는 마음가짐, 물을 두려워하지 않고 아무 데서나 물만 보이면 훌러덩 벗고 풍덩 뛰어들어 신나게 헤엄치는 자유로움이야말로 내가 결코 쉽게 모방할 수 없는 라틴 아메리카 사람들의 ‘신명’이자 ‘블리스’였다.

마르티니크 섬의 시인 에메 세제르는 ‘귀국파일’이라는 시에서 춤의 아름다움, 흑인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표현한다. “나에게 춤을/ 나의 서투른 흑인 춤을/ 나에게 춤을/ 숨막히게 맹렬한 춤/ 탈옥의 춤/ 춤은 흑인이 되는 것이 좋고 멋지고 옳다고 말한다.” 에메 세제르는 숨막히게 맹렬한 춤이야말로 바로 ‘탈옥’의 춤이며, 당시 핍박받던 흑인의 삶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과정이 바로 춤임을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춤은 모든 속박을 벗어버리는 자유의 몸짓이며, 내가 흑인이 되든 백인이 되든 전혀 상관없어지는 세계, 핍박받는 존재로 푸대접을 받을지라도 ‘내가 그저 꾸밈없이 나인 것’이야말로 그 자체로 좋고 멋지고 옳음을 증명하는 일이 아닐까.

브라질 ‘라파인쇼’의 과감한 색채, 그림 ‘아바포루’에서 보이는 자유
욕심 없이 삶을 사랑하는 그들에겐 디오니소스의 축복이 넘쳐흐른다

춤과 함께 또 하나 놀라운 것은 라틴 아메리카 사람들의 과감한 색채 감각이다. 그들은 눈이 시리도록 선명한 원색을 의상이나 메이크업에 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예컨대 브라질을 대표하는 민속춤 공연으로 유명한 ‘라파인쇼’에서 댄서들은 한 사람당 거의 열 벌에 가까운 의상을 갈아입으며 엄청나게 다채로운 춤을 보여줬는데, 그들의 의상은 하나같이 초록색, 노란색, 빨간색, 파란색 등 강렬하고 과감한 색깔이었다. 미묘한 파스텔톤의 색감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런 ‘쨍한 빛깔들’이 그들에게 더없이 잘 어울린다는 것이다. 정교하게 색채의 뉘앙스를 계산해 만든 의상이나 메이크업이 아닌, 자칫하면 촌스러워질 수 있는 강렬한 색채들의 자유로운 조합이 그들에게는 더없이 잘 어울렸다. 라틴 아메리카 사람들은 명도나 채도를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과감하게 마치 아이들이 물감으로 놀이를 하듯 유희적으로 색채를 흩뿌려 놓는다. 그들의 메이크업과 의상에서 색채는 정교한 계산이나 유행에 따른 변화가 아니라 말 그대로 ‘놀이’이자 ‘춤’처럼 느껴진다.

브라질의 화가 타르실라 두 아마라우의 ‘아바포루’(1928년).

브라질의 화가 타르실라 두 아마라우의 ‘아바포루’(1928년).

이런 라틴 아메리카의 과감한 색채 감각과 꾸밈없는 형태를 향한 충동이 잘 나타난 작품 중의 하나가 바로 브라질의 화가 타르실라 두 아마라우의 ‘아바포루’다.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아모르 파티(Amor fati)’, 즉 삶에 대한 사랑, 운명에 대한 사랑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떠오른다. 아바포루는 ‘먹는 사람’이란 뜻인데, 이 그림 속에서 인간은 오직 태양과 선인장만 먹고도 살 수 있는 것처럼 그려져 있다. 손과 발이 아주 커다랗고, 머리는 작아진 상태. 너무 많은 것들을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오직 대지에 뿌리박은 발과 하늘 향해 두 팔 벌릴 수 있는 자유만으로 이미 충분히 행복해 보이는 사람의 모습. 어쩌면 ‘삶을 사랑하는 인간’이란 바로 이런 원초적 형태를 하고 있지 않을까. 삶의 이런저런 조건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욕망의 가짓수를 끊임없이 늘리면서 스스로 ‘가지지 못한 것들’만을 탐내는 삶이 아니라,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 눈·코·입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 그저 튼튼한 다리와 토실토실한 팔만으로도 우리는 이 아름다운 세상의 빛을 능히 담아낼 수 있다는 것.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한없이 마음이 편안해진다. 행복해질 수 있는 비결을 이미 알면서도, 너무 많은 욕심 때문에 너무 비대해진 에고, 혹은 합리성에 대한 집착 때문에 나를 행복하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는 또 다른 자아가 보인다. 그 머리 좋은 자아(Ego)는 결코 나를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 오직 햇빛과 땅과 선인장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자기(Self), 즉 살아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자기 안의 고유한 신성(神聖)을 느끼는 과정이야말로 우리가 진정한 ‘개성화’로 나아가는 눈부신 여정일 것이다.

라틴 아메리카 사람들은 ‘흔들림’이 별로 없다. 삶이 더 나아질 것이라는 과도한 기대를 하지 않는다. 그것을 나쁘게 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지나친 욕심에 휘둘리며 매번 흔들리는 삶보다는 낫지 않을까. 아모르 파티는 삶이 이보다 더 나아지지 않더라도 있는 그대로의 오늘을 사랑하는 마음의 철학이다. ‘아바포루’의 주인공은 흙의 친구이자 태양의 친구처럼 보인다. 동양에서 말하는 ‘천지인’의 라틴 아메리카적 형상인 것 같기도 하다. 오직 열대의 태양과 한 그루의 커다란 선인장이 있을 뿐인데 세상에 있어야 할 모든 것이 다 있는 듯하다. 이 그림은 나의 ‘셀프’를 향해 이렇게 속삭인다. 아무 것도 필요 없다. 빛, 물, 땅. 오직 이 세 가지만이 우리 삶의 가장 필수적인 요소이며 이것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다고 속삭인다.

디오니소스의 축복이 필요한 시간이 있다. 바쁜 일상도 축복이고, 늘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축복이지만, 가끔은 일상의 수레바퀴를 멈추어야 할 때가 있다. 디오니소스는 진탕 먹고 노는 신이라기보다는 바쁜 일상의 수레바퀴를 잠시 멈추는 휴식의 기쁨, 스트레스로 가득한 인간의 마음을 휴식으로 무장해제시킴으로써 마음을 이완시켜주는 신이다. 라틴 아메리카에는 디오니소스의 축복이 왠지 더 많이 내려앉은 것 같다. 라틴 아메리카 사람들은 쉴 줄 알고, 놀 줄 알고, 욕심을 내려놓을 줄 안다. 그들의 ‘쉴 줄 아는 영혼, 디오니소스의 축복을 받은 영혼’을 배우고 싶다.

[정여울의 라틴아메리카 기행](19)외워서 흉내낸다고 될 리가 없다 자기 안의 리듬을 살아내는그 자유로운 몸짓이

탱고는 네 개의 다리와 하나의 심장으로 추는 춤이라는 말이 있다. 네 개의 다리가 하나의 심장처럼 움직일 때까지 뛰고 찍고 구르고 흔들었을 그들의 구슬땀을 생각한다. 몸치인 나도 배울 수 있는 영혼의 춤은 무엇일까. 루소는 <사회 계약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어딜 가나 구속당한다고.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나 어디에서나 쇠사슬에 묶여 있다.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주인이라고 믿는 자가 그들보다 더 노예로 산다. 이런 변화가 어떻게 일어났을까?” ‘사회화’가 이 세상의 규칙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이라면 ‘개성화’는 그로 인해 불가피하게 사슬에 묶인 자신의 본래 모습을, 묶이지 않고 짓밟히지 않은 영혼을 되찾는 일이기도 하다. 탱고를 추며 네 개의 다리와 하나의 심장을 경험하는 댄서들처럼, 나도 그렇게 타인과 부드러운 조화를 이루면서도 동시에 온전히 날카로운 나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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