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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비평을 하다 보면 K팝을 빼놓을 수 없다. 그리고 K팝 아이돌을 좋아하다 보면 특별히 내적 친밀감이 쌓이는 이들이 있다. 아이돌을 공연 예술 노동자로 존중하고 대우할 줄 아는 사람과, 팬덤의 마음을 이해하는 사람. 산전수전 공중전이 벌어지는 연예계에는 온갖 천태만상이 다 있지만 이런 캐릭터는 드물고도 귀하다. 어리고 거부권이 없는 가수나, 세간의 기준으로 ‘백날 따라다녀 봐야 걔가 너를 알아줄 리 없는’(알아주면 큰일 납니다) 사랑, 즉 ‘덕질’을 하는 팬은 쉽게 멸시의 대상이 된다. 그래도 되기 때문이다.

고(故) 박지선씨는 성실한 자료 조사와 누군가를 좋아해본 경험을 기반으로, 때로는 팬이 패배감을 느낄 정도로 ‘주접’을 잘 떨며, 침착하고 상냥하게 행사를 끌어가서 많은 팬덤의 마음을 훔쳤다. 아이돌만이 아니다. 배우(GV), 작가까지 아우르는 폭넓은 진행력과 ‘덕질’ 경력을 뽐냈으니. 닿을 수 없는 존재를 사랑해본 이들에게 박지선은, 좀 더 특별하고 애틋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멋쟁이 희극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던 고 박지선씨는 특별하고 애틋한 존재였다. 열등하다거나 무가치하다고 ‘여겨졌던’ 감정이나 존재를 대변했다. “하늘 아래 똑같은 공연은 없다”며 덕후 편을 들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을 어루만졌다. KBS <김생민의 영수증> 캡쳐화면

‘멋쟁이 희극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던 고 박지선씨는 특별하고 애틋한 존재였다. 열등하다거나 무가치하다고 ‘여겨졌던’ 감정이나 존재를 대변했다. “하늘 아래 똑같은 공연은 없다”며 덕후 편을 들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을 어루만졌다. KBS <김생민의 영수증> 캡쳐화면

11월2일, 자신을 스스로 ‘멋쟁이 희극인’이라고 소개하던 박지선이 세상을 떠났다. 갑작스러운 죽음 뒤에는 으레 그렇듯 수많은 억측과 호기심이 한여름 모기떼처럼 따라붙는다. 추모를 빙자하여 자신의 입에 맞는 서사를 쓰거나, 더는 말할 수 없는 자의 ‘이유’를 넘겨짚기도 한다. 매우 비윤리적이다. 클릭을 유도하는 콘텐츠는 단호하게 소비하지 않는 결단력, 타인의 존엄보다 중요한 나의 알권리 따위는 없음을 인지하는 주제 파악이 필요하다.

한편 젊고 재능있는 여성을 연거푸 잃은 사회는 할 일이 있다. 그 여성을 둘러싼 환경을 면밀히 살피고 분석하며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다. 드러난 문제가 당사자의 죽음과 어떤 연관이 있다고 판단하는 게 아니라, 아직 살아있는 한 명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서.

클릭을 유도하는 콘텐츠는
소비하지 않는 결단력과,
타인의 존엄보다 중요한
나의 알 권리 따위는 없음을
인지하는 주제 파악이 필요하다



궁지에 몰리면 무엇이든 동기가 된다. 가시밭길에서는 찔릴 만한 것을 하나라도 더 치워야지, 찔린 상처를 후벼 파며 철철 흐르는 피를 구경할 게 아니다. 한국은 이미 15년째 OECD 회원국 중 자살률 1위를 기록하고 있으며, 올해는 코로나19 사태로 상반기 여성 자살률이 7.1% 늘었다. 연령대로 분류하자면 2019년 기준 10대의 37.5%, 20대의 51.0%, 30대의 39.0%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현실이 그만큼 견디기 힘들다는 뜻이다.

이 글에서는 박지선을 둘러싼 환경을 돌아보고자 한다. 그 아수라장을 사뿐사뿐 통과하던 의연함과 다정함을 기억하고자 한다. 무례하고 폭력적인 말에도 흔들리지 않는 자존감을 칭찬하면서 정작 그런 말이 반복되는 것을 방조했던 야비함과 눈을 맞추고자 한다. 섣부른 추정보다 구체적인 독해로.

KBS <개그콘서트>의 코너 ‘조선 왕조 부록’ 에서 박지선은 우아한 말투를 구사하는 후궁을 연기했다. 사실 천민 출신의 싸움꾼에 술고래고, 경복궁 리모델링 때 머리로 못을 박았다며 과감하게 역사와 개그를 섞어 버린다. KBS <개그콘서트> 캡쳐화면

KBS <개그콘서트>의 코너 ‘조선 왕조 부록’ 에서 박지선은 우아한 말투를 구사하는 후궁을 연기했다. 사실 천민 출신의 싸움꾼에 술고래고, 경복궁 리모델링 때 머리로 못을 박았다며 과감하게 역사와 개그를 섞어 버린다. KBS <개그콘서트> 캡쳐화면

멋쟁이, 희극인. 박지선은 어떤 희극인이었을까? 웃음을 유발하는 희극성은 거칠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우월론, 불일치론, 기계화론이 그것이다. 우월론은 결함을 가진 대상에게 느끼는 우월함에서 웃음이 발생하는 것이고, 불일치론은 기대에서 어긋나는 결과나 낯선 것을 인식할 때 오는 인지 혼란이 웃음을 유발한다. 이 두 가지를 종합하여 베르그송은, 희극성은 대상에 내재한 동시에 받아들이는 사람의 태도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웃음을 집단적이고 사회적인 행위로 해석한 것이다. 베르그송의 기계화론은 생명을 지닌 것이나 인간다움이 기계적인 속성을 띨 때, 이 부조화가 웃음을 유발한다고 본다. 이 웃음은 열등한 것을 교정하거나 징계하지만(풍자나 조롱), 연구자에 따라 오히려 이 부조화를 긍정하고 포용한다고 반론하기도 한다.

우리는 바보 같은 행동을 보거나, 익숙한 것이 엉뚱한 방식으로 뒤집힐 때 웃는다. 섬세하게 관찰하여 재현한 디테일, 어이없는 과장, 생뚱맞은 조합, 때로는 무의미한 반복이 ‘웃음 버튼’을 누르기도 한다.

아이돌 행사의 MC로 활약하기 전 박지선은 <개그 콘서트>에서 이름을 알렸는데, 천연덕스러운 연기와 상식을 배반하는 전개가 주 무기였다. ‘조선 왕조 부록’에서 우아한 말투를 구사하는 후궁은 사실 천민 출신의 싸움꾼에 술고래고, 경복궁 리모델링 때 머리로 못을 박았다며 과감하게 역사와 개그를 섞어 버린다. ‘불편한 진실’에서 중년 여성의 행동 특성을 섬세하게 포착한 연기는 ‘로비스트’에서 ‘아줌마 로비스트’라는 독특한 캐릭터로 이어진다. 하지만 모두가 기억하듯, 박지선의 센스가 조명받기 시작한 것은 MC 활동을 하면서부터이다. 박지선은 언제나 ‘얼굴로 웃기는’ 계열로 취급받았다. 맡는 코너마다 외모 관련 소재가 들어갔고, ‘얼굴로 웃기기’가 정체성인 코너도 있었다.

KBS <개그콘서트>의 코너 ‘불편한 진실’ 에서 보여준 박지선의 연기는 ‘로비스트’ 에서 중년 여성의 행동 특성을 섬세하게 포착한 ‘아줌마 로비스트’라는 독특한 캐릭터로 이어졌다. KBS <개그콘서트> 캡쳐화면

KBS <개그콘서트>의 코너 ‘불편한 진실’ 에서 보여준 박지선의 연기는 ‘로비스트’ 에서 중년 여성의 행동 특성을 섬세하게 포착한 ‘아줌마 로비스트’라는 독특한 캐릭터로 이어졌다. KBS <개그콘서트> 캡쳐화면

개그계의 오랜 관행이다. 2012년 ‘희극 여배우들’이라는 코너는 “저는… 못생기지 않았습니다”라는 박지선의 선언으로 시작한다. 뒤에는 “희극 여배우들의 한 맺힌 절규 이제 말할 수 있다”라고 쓴 현수막이 걸려 있다. 올해 6월 방영한 KBS <다큐 인사이트-개그우먼>에서 오나미는 여자 코미디언이 들어오면 외모를 보고 “이번엔 너구나?”라는 말을 들었던 경험을 털어놓는다. 대대로 얼굴이나 뚱뚱한 몸으로 웃기는 담당을 정하고, 외모 비하를 하거나 주제 파악을 못하는 역을 맡기는 것이다. 한국여성민우회가 외모 비하 시각을 이유로 <개그 콘서트>를 그해 최악의 방송프로그램으로 선정한 것이 2002년인데, 2020년 프로그램 폐지 때까지 이 문제는 딱히 해결되지 않았다.

굳이 구별하자면 이런 부류의 개그는 웃음의 ‘우월감’에 기대는 선택이다. 비전형적이거나 일탈적으로 보이지 ‘않는’ 정상성의 범주에 속한 사람만이 웃을 수 있다는 점에서 권력관계를 보여준다.

누가 웃고, 누가 상처 받는가?

백번 양보해서 외모 비하가 희극 안에서는 가능하다 치자(물론 가능하면 안 된다). 대본이니까, 대사니까. 그러나 극 바깥에서도 외모를 조롱하고 놀리는 발언이 이어졌다. 멋쟁이 희극인의 멋을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박지선의 자존감이 강하다고 치켜세우면서, 마치 그 자존감이 보험이라도 되는 양, 함부로 말하는 사람은 제지하지 않았다. 당사자만 쿨하면 괜찮은 양 판을 깔고, 차별 발언을 하거나 허용하는 분위기는 묵인했다.

훨씬 더 다양한 스펙트럼의 코미디를 할 수 있는 여자 코미디언들은 편협하고 협소한 틀에 갇히고, 차별 발언은 재미를 핑계로 정당화된다. 이것은 결국 여성 예능인의 노동환경 문제이기도 하다.

‘멋쟁이 희극인’ 박지선씨는 때때로 특유의 호들갑(아래 사진)으로 웃음을 선사했다. 2018년 tvN <놀라운 토요일>에 출연한 박지선의 모습. tvn <놀라운 토요일> 캡쳐화면

‘멋쟁이 희극인’ 박지선씨는 때때로 특유의 호들갑(아래 사진)으로 웃음을 선사했다. 2018년 tvN <놀라운 토요일>에 출연한 박지선의 모습. tvn <놀라운 토요일> 캡쳐화면

박지선의 노력과 능력이 빛을 발한 것은 서두에 이야기했듯 다양한 행사에서 MC로 활약하고, ‘덕후’ 정체성을 드러내면서부터이다. 이 무렵부터 박지선의 개그는 열등한 것을 교정하거나 조롱하는 게 아니라 긍정하고 포용하는 결이 뚜렷해진다. 정확히는 열등하다거나 혹은 무가치하다고 ‘여겨졌던’ 감정이나 존재를. 똑같은 콘서트를 가는 팬의 사연에, “하늘 아래 똑같은 공연은 없다”라며 공감한 박지선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을 적극적으로 대변하고 어루만졌다. 어이없는 과장으로 ‘주접’을 떨며 웃음을 터뜨렸다. 대표적인 사례가 2018년 tvN <놀라운 토요일>에 출연했을 때이다. 박지선은 샤이니 키에게 “우리 키는 영재예요, 4개 국어를 해요. 일어 한 번 해봐!” “놀토는 영재 기범이를 담기에 그릇이 작다! 영재발굴단 가자!” 하고 호들갑을 떠는 모습으로 화제가 되었다. 2019년 AB6ix 쇼케이스에서는 가수를 “라이머(기획사 사장) 인생 최고의 개이득”이라고 소개하고, 영화 <스윙키즈>의 GV에서는 엑소의 활동이 빨리 끝났다고 팬들이 아쉬워하자 “SM 죽여버려”하고 속삭여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하기도 했다.

박지선을 거쳐 간 팬들은
그의 ‘긍정’이 준 재미와 교감을
저마다의 온도로 기억할 것이다



책도 덕질하듯 열렬하게 읽고, 빠져들고, 영업하는 박지선의 인터뷰를 읽으며 사랑하고 아끼고 예뻐하는 재능에 대해 생각했다. 뜨거운 몰입을 말하는 얼굴의 사랑스러움을 느꼈다. 비하하고 조롱하는 것보다 훨씬 품이 많이 드는 다정이 얼마나 재미있고 즐거운지 실감했다. 더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고 그에 걸맞은 대우와 존중을 받기를 바랐다. 이제는 불가능하지만.

고인의 명복을 빈다. 박지선을 거쳐간 팬들은 그 따뜻한 웃음과 교감의 순간을 저마다의 온도로 기억할 것이다. 나눠 받은 긍정의 힘으로, 또 다른 멋쟁이 희극인들을 지키고 싶다.


이진송 계간 홀로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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