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완다 수도 키갈리에 도착한 지난 1월21일 오후. 하늘은 맑았고 쨍한 햇볕이 내리쬈지만 마른 바람이 불어 땀을 식혀줬다. 한국의 늦봄 같았다. 이글거리는 태양만 생각했던 아프리카 ‘초짜’는 그저 머쓱한, 상쾌한 날씨였다.
한국에서 인터넷으로 발급받은 입국 비자를 보여주고 5분만에 수속을 마치고 나온 공항 밖에서 플뢰르(36)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차를 타고 숙소로 가는 길은 상상했던 아프리카를 또 한 번 빗겨갔다. 정돈되고 깨끗한 길, 복잡해도 질서 있는 도로. 곳곳에 붙은 ‘도시는 깨끗하게’(keep city clean)라는 문구 그대로였다.
숙소에 도착해 짐을 부린 내게 플뢰르가 저녁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르완다에 처음왔으니 ‘냐마초마’(Nyamachoma)를 맛봐야 한단다. 삶은 염소 요리다. 해가 저물어 밖은 깜깜한데 밤길을 돌아다녀도 될까. 내색은 못 했지만 불안함을 한켠에 두고 그를 따라 길을 나섰다.
■키갈리의 밤은 어둡지 않았다
키갈리의 밤은 어둡지 않다. 큰 도로는 물론 작은 골목길에도 가로등이 줄줄이 켜있다. 주택가, 상가, 사무실 건물 앞에도 환하게 불이 밝혀 있다. 차도 많이 다닌다. 오토바이 뒷자리에 손님을 태우고 달리는 모토(moto) 택시도 꽤 보인다. “요새는 목요일 밤이 제일 붐벼요. 젊은 사람들은 금요일에 많이 나오지만, 30~40대는 목요일에 술을 마시더라고요.” 정신없이 창밖을 구경하는 내게 플뢰르가 설명을 해줬다. 차는 요즘 뜨는 동네라는 카시이루의 한 식당의 야외 테이블 앞에서 멈춰섰다. 달빛 아래 테이블마다 술과 음식을 먹으며 둘러앉아 이야기하는 이들이 보인다. 광화문이나 강남이나 키갈리나 퇴근 후 모습은 똑같은가 보다.
우선 목이나 축여볼까. 점원이 “르완다 여성들이 가장 좋아하는 맥주를 추천해주겠다”며 ‘스콜’(Skol) 브랜드의 몰츠를 내왔다. ‘왠열. 한국 맥주랑 비교도 안 되게 정말 맛있잖아!’ 속으로 감탄하며 다시 한 모금 넘기는데 플뢰르가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내는게 보였다. 그에게는 다섯살, 세살 아들이 있다. 늦은 시간 엄마를 빼앗긴 아이들은 누구와 있느냐고 물었더니 가사 도우미와 있단다. “아빠는 애들을 돌보지 않나요?” 내가 묻자 “남편들이 애를 보는 일도 있어요?” 하며 웃는다. 육아 문제로 엄마들 속터지게 하는 것도 서울이나 키갈리나 똑같았다.
곧 플뢰르의 친구 이자벨(36)과 그레이스(38)가 왔다. 세 ‘절친’이 “페이스북 밖에서는 오랜만”이라며 서로 안부를 묻는 사이, 푹 삶아진 냐마초마에 감자를 곁들인 저녁이 준비됐다. “많이 늦었는데 괜찮을까”라고 했더니 뭘 걱정하는지 알겠다는 듯 플뢰르가 답했다. “키갈리는 여자 혼자 새벽 3시에 차를 타든, 택시를 부르든, 걷든 다 안전해요. 아까 모토택시 봤죠? 아무리 멀어도 5000프랑(약 7000원)이면 어디든 가요. 그러니 회사에서 야근도 시키죠(웃음).”
아이들과 놀았던 이야기, 남편의 뒷담화, 엊그제 산 귀걸이, 새로 생긴 동네 음식점. 세 친구의 밀린 수다는 한국 30대 여성들의 이야기와 너무도 닮았다. 멀고 먼 지구 반대편 르완다까지 찾아온 이유도 깜빡 잊어버릴만큼 나와 같은 일상이다.
1994년 4월 7일, 살육의 광기가 르완다 전역을 뒤덮었다. 한 동네에서 막역하게 살아왔던 사람들이 별안간 투치족과 후투족으로 나뉘었다. 농사지을 때 쓰는 마체테(날이 넓은 칼)는 이웃의 목숨을 끊는 데에 쓰였다. 출신 부족이 다르면 죽였다. 제노사이드. 100일간 전체 인구의 3분의 1인 10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가족이나 친구를 잃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 해 나는 드라마 <마지막 승부>에 빠져 있었다. 농구대잔치를 보겠다며 경기장 앞에서 밤을 지샜다. 노숙을 하고도 ‘오빠!’를 외치며 즐거워했다. 그 철없던 시절은 아직도 선명하다. 이들에게도 1994년은 어제 일처럼 또렷하게 남아 있는 아픈 과거, 여전히 진행 중인 상처일 터다. 이들에게 제노사이드를 물어도 될까.
“오래된 일이 아니잖아요. 거의 모두가 가족과 친구, 이웃을 잃었어요. 잊을 수 없죠. 하지만 말하지 못할 이야기는 아니예요. 언제나, 자주 얘기해죠. 그 후에 사회가 참 많이 바뀌기도 했고요.” 이자벨이 말했다. 하지만 플뢰르네 가사도우미는 제노사이드 얘기를 꺼내는 것도 싫어한다고 했다. 몸에 남은 상처는 더 이상 아프지 않지만 말하면 떠오르고, 떠오르면 다시 마음 속은 지옥이다. “투치족과 후투족이 결혼하는 것도 아직 터부에요. 부모가 반대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직접적인 가해자가 아니더라도, 막지 않았던 이들조차 용서할 수 없는 것이죠.”
■여성 의원 64%, 성평등 세계 6위
다음날 키갈리 시내 제노사이드 메모리얼을 찾았다. 1990년 학살을 선동하기 위해 반(反) 투치 세력이 캉구라(Kangura·깨어나라) 신문에 실었던 ‘후투 십계명’이 적혀있었다. 이 선전에는 4년 뒤 살인의 광란 속에서 벌어질 여성들의 참혹한 희생이 예고돼 있다. “투치족 여성은 어디에 있든 투치 집단에 소속돼 있음을 후투족 남성들은 기억해야 한다. 투치 여성과 결혼했거나 투치 여성을 첩으로 둔 후투 남성, 투치 여성을 비서로 두거나 후견하는 후투 남성은 반역자로 간주한다.” 증오의 대상이 된 여성들에 대한 무차별적 강간은 마체테와 똑같은 무기였다. 에이즈에 감염된 남성들이 ‘작전’에 투입됐고 여성 25만명이 희생됐다. 살아남은 이들도 온 몸과 마음에 깊은 상처가 남았다.
차마 추모관에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기다리던 플뢰르의 손에 책 한 권이 들려 있었다. <내일 우리 가족이 죽게 될 거라는 걸 제발 전해주세요>. 미국 언론인 필립 구레비치가 제노사이드 직후의 참상을 담은 이 책은 “르완다 전역에서 살인, 살인, 살인, 살인, 살인, 살인이 이어졌다”고 묘사한다. 후투 십계명에 따라 살인을 저지른 후투 남성들조차 당시를 “인간 지옥”이라 회상한다.
거리를 지나면서 마체테를 든 이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제노사이드의 영상이 떠올라 섬뜩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나라는 ‘신도 밤에는 르완다에서 쉬어간다’는 속담처럼 조용하고 차분했다. 그 아픈 기억과 산산히 조각난 공동체를 극복하기 위해 애써온 22년은 모두가 도망치고 싶어하던 나라를 살 만한 곳으로 만드는 시간이기도 했다. 무참히 짓밟힌 여성들의 희생이 두번 다시 반복돼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 이들에겐 뿌리깊이 박혀 있었다.
그래서 르완다는 2003년 국회의원과 장관, 각 부처·기관 등 공무원의 30%를 여성에게 의무 할당하는 헌법을 제정했다. 새 법에 따라 여성도 재산을 가질 수 있었고, 부모의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게 됐다. 이혼한 여성도 부부재산의 절반에 대한 권리를 가졌다. 르완다는 하원의원 80명 중 51명, 64%가 여성이다. 최고의 성평등을 이뤘다는 유럽을 제치고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비율이다. 장관과 차관도 10명 중 3명이 여성이다. 사법부 구성원 역시 10명 중 4명이 여성이다. 여성들의 지옥이었던 이 나라는 이제 성평등 수준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로 손 꼽힌다. 지난해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세계 성평등지수’에서 르완다는 아이슬란드, 노르웨이, 핀란드, 스웨덴, 아일랜드에 이어 6위를 차지했다. 한국은 145개국 중 115위였다.
키갈리를 찾은 것도 이 ‘여성의 행복’을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성폭행은 ‘전쟁범죄’로 처벌
이 같은 변화는 처절한 노력 덕분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르완다에서 성폭행은 전쟁범죄와 마찬가지로 취급된다. 르완다국제전범재판소(ICTR)는 1998년 성폭행을 전쟁범죄이자 반인도범죄로 선언했다. 여성들이 사회의 평등한 구성원으로 행복한 삶을 꿈꿀 수 없는 한 제노사이드를 넘어설 수 없다는 절박함이 있었을 것이다. 대량학살로 많은 남성들이 사망한 탓에, 65세 이상 남성 인구는 여성의 70%밖에 되지 않는다. 나라를 재건하면서 성별로 인재를 차별할 여유가 없었다.
정부의 강력한 의지는 귀국행렬로 이어졌다. 이웃한 우간다와 부룬디, 케냐, 콩고, 가나로 건너간 사람들이 돌아왔다. 플뢰르와 이자벨, 그레이스도 나라를 탈출했던 부모님을 따라 외국에서 살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학에서 만난 친구들이다. 엄마가 된 그들은 키갈리에 정착했다. “지금 아프리카에서 아이를 가장 안전하게 키울 수 있는 곳이 여기예요. 좋은 사립학교도 있고 외국인들도 많아요. 말라리아 걱정도 없죠.” 플뢰르의 말이다.
이자벨은 르완다 출신 어머니와 부룬디 출신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부룬디에서 보냈다. “내가 어릴 때는 거기가 훨씬 평화로웠으니까요. 지금은 정반대이지만요.” 그는 대학 졸업 후 남편을 따라 고국으로 돌아왔다. 화장품 가게를 운영하면서 4살 딸을 키우는 싱글맘 그레이스는 “예전같았으면 나는 르완다에서 살지 못했을 것 같다”고 했다.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를 키운다니 난리가 났죠. 르완다는 보수적인 가부장제 사회였거든요. 하지만 변했어요. 혼자 아이를 키우는 것이 두렵지 않아요. 친구들도 있고요. 딸이 잘 자라고 있어 행복하죠.”
르완다에서 비자, 허가증 같은 정부 증명서의 수수료를 관공서에서 현금으로 받는 경우는 없다. 은행에서 정부 계좌로 입금해 처리하게 돼있다. 부패를 막기 위한 장치다. 교육·기술 수준에 따라 최저임금이 정해져 있고, 여성은 남성과 동일한 임금을 받는다. 서쪽 국경을 접한 콩고민주공화국(DRC)에서는 공립학교 교사가 월 80달러를 받는데 르완다에서는 최소 200달러를 받는다. 사립학교 교사 임금은 월 500달러까지 올라간다. 고등학교 화학교사 오메르(50)는 “DRC에서는 누군가에게 돈을 찔러줘야 교사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뒷돈을 달라기는커녕 부임할 때 숙소까지 내줘서 매우 놀랐다. 그러니 다들 르완다에서 일하고 싶어하는 것 아니겠느냐”고 했다.
“법규가 생겼다는 것은 남녀가 같이 일하는 게 일상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여성이 돈을 버는 것을 사회가 독려한다는 것이기도 하죠. 예전엔 자동차를 사려면 남편의 동의가 필요했고, 사업도 남편이 보증을 서야만 할 수 있었어요. 내가 번 돈도 남편 이름으로 저축해야 했고요. 불과 20년 전 일입니다. 그러나 제노사이드 이후 이곳 여성의 삶은 완전히 변했습니다.”
이자벨은 르완다 첫 여성 건설 적산사다. 건설 공사비가 적정한지 평가하는 일을 한다. “르완다는 전국 어디나 공사 중입니다. 건설 붐이거든요. 전에는 이런 일에 도전하는 여성이 없었지만 일이 많아지니 지금은 성별을 따지지 않아요. 나는 능력을 증명하려고 더 열심히 했어요. 노력해서 인정받는 것만큼 행복한 게 있나요.”
아이들을 위해 살고 싶어하는 곳이 됐다고는 해도 여전히 르완다는 구매력 기준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연간 1800달러에 불과한 빈국이다. 1200만 인구 중 40% 가까이가 빈곤선 이하에서 살아간다. 그러나 2014년, 2015년 경제성장률은 각각 6.9%, 6.5%로 높았다. 정부는 정보통신(IT) 투자에 나라의 운명을 걸고 있다. 보급된 휴대전화 대수만 7700만대다. 하루 1기가(Gb)의 데이터를 쓸 수 있는 일주일 짜리 유심칩이 6500프랑(약 9000원)에 팔린다. 그러나 무엇보다 큰 변화는 사회의 약자, 내전의 희생자였던 여성들이 목소리를 내게 됐다는 데에 있다.
■건설현장에도 ‘일하는 여성들’
새벽 5시 어렴풋 해가 뜰 무렵부터 하루가 시작되는 르완다에서는 어디서든 일하는 여성들과 마주친다. 형광색 조끼를 입고 도로를 청소하는 사람들. 어젯밤 비에 쓸려 내려간 산길을 정비하고 보도를 새로 까는 이들. 건물을 짓는 건설 현장 작업자들. 건물마다 출입문을 지키는 보안요원들. 기름을 넣고 차를 정비하는 주유소 직원들. 적지 않은 숫자가 여성이다. 시장에서도 과일과 생선, 계란, 봉제 가게까지 점포마다 손님들을 맞는 주인은 전통의상 키텐게(kitenge)를 입은 아낙들이다.
여성들이 사회의 주체가 된다는 것은 더 많은 여자아이들이 학교에서 공부하며, 직업을 갖고 돈을 벌 수 있는 환경이 됐다는 의미다. 과학이나 엔지니어링, 정보통신을 공부하는 여학생들이 많아지고 이들이 좋은 직장에 들어갈 기회가 생긴 것이 제노사이드 이전과 비교할 때 가장 큰 변화다. 화학을 가르치는 오메르는 “17년간 맡았던 학생들 중 화학 1등은 전부 여학생이었다”고 했다. “성적은 남학생들이 못 따라가더라고. 우리 둘째딸도 아주 똑똑해요. 의사가 되고 싶다는데 성적이 아들들보다 낫죠.” 사립학교에서는 여학생들이 과학, 기술을 배울 수 있도록 더 장려한다고 했다.
키갈리 서쪽의 루치로 주는 르완다에서 가장 가난하고 보수적인 곳으로 제노사이드 희생자도 많았다. 이곳에서 만난 세 아이의 엄마 아가테(44)는 큰 딸도 쌍둥이 두 아들과 함께 고등학교까지 보냈다. 1994년 부모와 남편을 잃은 엄마는 매년 4월 7일이 되면 아이들을 데리고 도망쳐야 했던 기억으로 돌아간다. 이날은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아이들 밥만 간신히 차려놓고 집을 나와 동네의 제노사이드 추모관에 하루종일 앉아서 그저 침묵으로 기억의 고통을 견뎌낸다. 아직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시골 마을에서 세 아이의 등교준비로 하루를 시작하는 엄마에게 지금은 행복한지 물었다.
“아이들이 집을 나서서 학교까지 걸어다녀도 걱정하지 않아요. 안전하니까요. 그렇게 오갈 수 있는 게 너무 고맙고 행복하죠. 미래를 생각할 수 있는,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나는 알아요. 제노사이드가 있었던 그 때, 앞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생각조차 할 수 없었거든요.”
엄마는 딸 클로딘(22)에게 자신은 그리지 못한 미래를 꿈꾸라고 항상 이야기해준다고 했다. 그러려면 배워야 한다. 공부해서 기술을 익혀야 한다. 성인여성 문자해독률은 아직도 70%에 못 미치지만 자라나는 아이들은 다르다. 르완다에서는 중학교까지 의무교육이다. 공립 고등학교는 의무적으로 절반을 여학생으로 뽑는다. 클로딘은 화학을 제일 재미있어 하고, 농구도 잘 한다고 했다. “남동생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집 뒤 호박밭에서 엄마를 도와 같이 일하는데 그 때가 제일 행복한 시간이에요. 지금은 직업학교에서 봉제기술을 배워요. 이걸로 돈도 벌고 동네 아이들 옷도 지어주고 싶어요.”
아가테는 딸이 부자가 되면 더 행복할 것 같다며 웃었다. “아들도 딸도 모두 나라와 지역에 힘을 보태는 사람이 되는 게 소원이에요.” 악몽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아가테는 3년 전 제노사이드 트라우마 치료를 받기 전까지 옆집 사람들을, 아이들까지도 경계했다. “치료를 받고 나서야 다른 집 아이들이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내 아이처럼 돌봐줄 이웃이라고 느낀 것은 처음이었어요.”
■‘여성성’의 개념이 바뀌다
도시뿐 아니라 이 시골 마을까지 안전한 곳이 되기까지는 르완다 정부의 강력한 통제가 있었다. 주(intara)에서 지구(uturere), 시, 읍, 마을, 구역(imirenge), 셀(cell·utugari), 빌리지(imidugudu)까지 세분화된 행정구역으로 중앙의 힘이 뻗어있다. 새벽마다 도로를 쓸고닦고, 고장난 시설을 고치며 키갈리의 밤길을 환하게 밝힌 골목과 건물의 불빛들도 정부의 일괄적인 지시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매주 넷째주 토요일의 동네 청소에는 전국민이 참여한다. 중앙의 의원들뿐 아니라 각 지역 단위의 대표도 선거로 뽑는다. 셀과 빌리지 대표 역시 여성들이 남성들만큼 선출된다.
“나도 남자지만 여성들을 뽑을 때가 많죠. 장애인과 약자를 위한 공약을 많이 내놓으니까요. 말하는 방식도 딱딱하지 않고 설명도 더 잘하기 때문에 후보가 가진 생각이 더 잘 전달되고요.” 월드비전 직원 루메네라(33)의 말은 르완다에서 30% 쿼터의 2배 이상 여성의원이 당선되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자신들이 갖지 못한 여성성을 장점으로 보고 여성 후보를 택하는 남성 유권자들이 그만큼 많다는 것이다. 서로의 다름을 ‘김치녀’와 ‘한남충’으로 이름 붙여 혐오하는 한국이 떠올랐다.
“여성의원, 여성장관, 여성대표가 많아지면서 분명히 사회가 달라지고 있어요.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여전히 중요한 자리에는 남성들이 앉아 있거든요. 일하는 여성은 많지만 상사는 대부분 남성입니다. 민간 기업에서는 여성 비율이 아직 낮아요. 특히 고위직은 말할 것도 없지요.” 플뢰르가 푸념했다. 그러나 세계 굴지의 대기업이 여럿 있는 한국에서도 그것은 요원한 소망일 뿐이다.
공무원 시험은 물론 기업 채용에서도 최종 후보로 남녀 한 사람씩 남았다면 르완다에서는 여성에게 우선권을 준다. 루치로 카롱기 지구의 여성대표 클레어는 이 같은 법과 규칙이 사회의 ‘여성상’ 자체를 바꾸고 있다고 했다. “시골에서는 남편이 부인을 때리는 일이 아직 일어나죠. 여전히 여성들의 권리를 인정하기 싫은 겁니다. 부인이 밖에 나가는 것이나 돈을 버는 걸 허락하지 않는 경우도 있어요. 일을 해도 돈을 남편이 다 가져가기도 하죠.”
그는 지역 내 가정을 방문해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여성들을 돕는다. 공공 일자리 30%는 의무적으로 여성들이 하게 돼 있어, 남편들을 설득해서라도 그 비율을 맞춰야한다. 그래서 카롱기 인구 33만명의 절반이 넘는 여성(15만6000명) 중 3분의 1인 5만명이 건설·공사현장에서 남성과 같이 일하고 동등한 임금을 받는다. 클레어는 여성 쿼터가 ‘나도 할 수 있다’는 믿음을 준다고 했다. “자신감을 갖는 거예요. 정부, 이웃들이 내가 나가서 일하고 스스로를 지키는 것을 지지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지역과 마을이, 지역 정부와 중앙정부가 나를 지원해주고 있다는 사실이 여성들에게 자신감을 줍니다. 그렇게 삶의 주체가 되는 것이 행복의 시작입니다.” 과거를 넘어서야 했던 이 나라, 내일도 내 아이가 살아있을 수 있는 안전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 여성 그리고 엄마들의 새로운 정체성이 된 듯했다.
■미래를 꿈꿀 수 있어 행복하다
카롱기 중심에서 차로 30분쯤 더 들어간 마을에서 옥수수를 따고 있는 스페치오세(58)를 만났다. 그는 1994년 남편과 두 아이를 눈 앞에서 잃었다. 둘째는 겨우 돌배기였다. 이웃집으로 도망쳤다가 집주인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에이즈에 걸린 데다 원치 않는 임신까지 했다. “가족들은 아이를 지우라고 했어요. 하지만 나에게 온 아이잖아요.” 그는 고향을 떠나 제노사이드 피해자들을 위해 정부가 지어준 집에서 딸을 키웠다. 가해자들을 심판하는 마을재판 ‘가차차’에서 그의 남편과 아이들을 죽인 자들은 종신형을 받았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에이즈 치료제를 먹고 딸을 위한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는 그에게 올해 스무살이 된 딸은 세상의 전부이자 행복이다. “딸은 아무 문제 없이 평범하게 살아요. 나같은 일도 겪지 않았고, 에이즈 보균자도 아니죠. 의사가 되고 싶대요. 빨리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좋은 가정도 꾸렸으면 좋겠어요.”
그는 늦었지만 고등학교 입시에 합격한 딸을 자랑하며 환하게 웃었다. 대학도 보내고 시집도 보내려면 뒷바라지 할 것도 많다. 옥수수와 콩을 키우고, 공들여 기르는 소에서 짜낸 우유를 내다 팔아 곗돈을 붓고 있다. 딸의 삶을 위한 종잣돈이다. 옛날 이야기를 물어 미안하다는 내개 스페치오세는 “먼 길 찾아와 줘 고맙다”며 자신이 키우는 소를 보고 가라고 했다. “이빨이 얼마나 큰지 몰라. 그걸 보고 있으면 행복해지거든.”
폴 카가메 대통령은 내전을 끝낸 영웅이었으나 이제는 헌법의 연임 제한규정을 없애고 장기집권자로 변해가고 있다. 르완다 사람들의 현재는 무너진 국가와 공동체를 일으켜 ‘잘 살아보자’던 한국의 과거와 많이 닮았다. 시골마을들까지 뻗어 있는 정부의 통제, 변변한 자원도 없지만 교육을 발판으로 발전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도 그랬다. 하지만 우리가 잃어버린 중요한 무언가가 이곳엔 아직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여전히 가난하고 갈 길이 멀지만 이곳의 여성들, 엄마들은 자신과 자식들이 꿈꾸는 사회에 대한 자부심이 너무나 컸다. 그들의 눈에서는 행복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