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연의 색다른 인터뷰

‘유서대필 조작사건’ 피해자 강기훈씨

2015년 대법원 재심 무죄 확정판결 후 서울을 떠나 홀로 시골생활을 계속하고 있는 강기훈씨가 지난 13일 전남 장흥의 아기단풍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는 길에서 하늘을 보고 있다.“간이식을 해야 살 수 있다”는 의사의 권고를 외면한 채 강진에서 닭 6마리를 키우고 사는 그는 해가 뜨면 장흥 읍내로 마실을 나가 동네사람들과 수다를 떠는 소박한 삶을 살고 있다. 요즘엔 사진과 스페인어도 익히고 있다고 했다. 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2015년 대법원 재심 무죄 확정판결 후 서울을 떠나 홀로 시골생활을 계속하고 있는 강기훈씨가 지난 13일 전남 장흥의 아기단풍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는 길에서 하늘을 보고 있다.“간이식을 해야 살 수 있다”는 의사의 권고를 외면한 채 강진에서 닭 6마리를 키우고 사는 그는 해가 뜨면 장흥 읍내로 마실을 나가 동네사람들과 수다를 떠는 소박한 삶을 살고 있다. 요즘엔 사진과 스페인어도 익히고 있다고 했다. 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땔나무해오고 냉이 캐고…, 밤하늘에 총총 떠 있는 별들도 보고요. 한번 놀러오세요.”

2015년 가을, 서울을 훌쩍 떠난 강기훈씨(54)와 간헐적으로 전화나 문자로 대화를 나눌 때면 그는 꼭 이렇게 말했다. 그때마다 놀러가겠다고 말만 하고 실행으로 옮기지는 못했다.

1991년 전국을 들썩이게 한 이른바 ‘유서대필 조작사건’의 피해자인 강씨를 처음 인터뷰한 것은 2012년 9월이었다. 진실화해위의 권고로 2009년 서울고법의 재심 개시 결정이 내려지고 검찰이 항고한 뒤 3년이 지나도록 대법원이 판단을 미루고 있던 때였다. 간암으로 생명이 위태롭던 그는 끝내 진실을 가리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할까봐 몹시 절박해 보였다.

그로부터 6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사이 많은 일이 벌어졌다. 2012년 10월 대법원의 재심 개시 결정, 2014년 서울고법의 무죄 선고에 이은 2015년 5월 대법원의 무죄 확정판결. 강씨는 정권을 규탄하며 분신 자살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씨의 유서를 대필하고 죽음을 방조했다는 억울한 누명을 24년이 지난 후에야 벗었다.

강진으로 거처 옮겨 닭 키우며 사진 찍고 스페인어 공부
6년 전 암 수술…의사는 간이식하라지만 암은 이제 친구

그는 전남 장흥군 유치면 국사봉 자락의 산골마을에서 내처 살다가 한달 전 강진으로 이사했다. 지난 13일 KTX를 타고 나주역에 내리자 그가 마중 나와 있었다. 몸은 더 말라 있었다. 62㎏이라고 했다. 그는 시종 “인터뷰는 하지 말고 6년 전 기사에 대한 빚을 갚는 것이니 단풍구경이나 하다 가라”고 했다. 지금 몇몇 극장에서는 강씨의 삶을 중심으로 1991년 ‘유서대필 조작사건’과 이후의 이야기를 그린 다큐멘터리영화 <1991, 봄>이 상영 중이다.

- 읍내에서 25㎞나 떨어져 있는 국사봉 자락 산골에서 새소리 들으며 산다더니, 강진으로는 왜 옮겼나요.

“아주 만족스러웠는데 주인이 집을 비워달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강진 시내로 이사했어요. 강진에서는 집주인이 두고 간 닭 6마리를 키우고 있어요. 제가 집을 구한다는 것을 알고 집주인이 살던 집을 비워주고 나갔거든요. 알고 보니 제가 전민련에서 활동할 때 집주인은 민통련(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활동을 한 인연이 있더라고요.”

- 왜 가족과도 떨어져서 혼자 시골에서 지내는 건가요.

“서울이 공기도 안 좋고 너무 답답해서 2015년 아내에게 잠깐 다녀오겠다고 한 게 이렇게 눌러앉게 된 거예요. 병원 진료만 아니면 안 올라가고 싶어요.”

- 병원(서울대병원)에는 얼마나 자주 가는데요.

“지난달에는 이런저런 검사받느라 세번이나 갔어요.”

- 간암은 보통 5년간 생존하면 완치라고 하던데, 2012년 수술 후 6년이 지났으니 좋아진 것 아닙니까.

“그사이 여러 번 (악성종양이) 재발했고 색전술도 여러 차례 했어요. 의사는 죽기 싫으면 간이식을 해야 한다고 해요. 저는 그럴 생각이 없어요. 그거 하면 면역억제제를 쓸 텐데 그러면 여행도, 산에도 못 가고, 도끼질도 못할 테니까요. 또 가족에게 간병의 고통을 안기기 싫어요. 그래서 병원 갈 때는 아예 발파용 귀마개를 해요(웃음). 제 병에 대해 소상히 알수록 안 좋을 것 같아서…. 암은 이제 친구예요.”

- 삶과 죽음에 초연해진 건가요.

“그렇지 않아요. 모든 감각이 소멸된다는 게 얼마나 두려운 일인데요.”

그는 농담처럼 병 이야기를 했다. 비쩍 여위어 양볼이 깊게 팬 탓인지 거무스름한 그의 얼굴에 짙은 음영이 졌다.

- 2015년 5월 대법원의 무죄 확정판결이 나던 날에는 왜 모습을 감췄습니까.

“들러리 서기 싫었어요.”

- 누구의 들러리요.

“모든 사람의….”

- 사법적으로 비로소 굴레를, 누명을 벗은 것인데 기쁘지 않았나요.

“굴레를 벗었다고요? 제가 과거에 그런 사건에 연루돼 이랬다는 프레임은 지금도 안 깨졌어요. 인터넷 연관검색어 보면 제 키워드가 뭔줄 아세요? 강기훈 사망, 강기훈 사건 검사, 강기훈 간암…. 한 사람의 인생을 몇가지 단어로 프레임을 짜서 그 틀에 맞춰 해석하고 안타까워하고 저는 그런 게 싫어요. 어떤 때는 되게 웃겨요. 사람의 삶이 그런 건가요?”

국가권력 가해자는 편히 사는데 피해자들은 일상이 고통
대수롭게 넘길 말도 피해자엔 칼날인 것을 사람들은 몰라

그의 목소리는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고 작았다. 세상과 사람에 대해서는 냉소적이었다. 어쩌면 26년 전이나 지금이나 세상은 그리고 사람들은 달라진 게 거의 없을지도 모른다. 무죄 확정판결 후에도 당시 수사검사나 판사 등 관련자 중 누구도 그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심지어 당시 수사라인에 말단 검사로 있었던 남기춘 변호사는 “당시의 잣대와 지금의 잣대가 달라서 나온 판결”이라고 말한 것으로 보도됐다. 한술 더 떠 조선일보는 사설에서 “법관의 주관적 판단이 달라지면서 원래와 정반대되는 판결이 나왔다. (중략) 궁극적 진실은 강씨 본인이 아는 것”이라고 했다.

- 무죄 판결 후 남 변호사 등 당시 사건 관계자와 일부 보수언론의 반응을 접하며 어떤 생각이 들었습니까.

“어느 순간 (기대를) 접었어요. 쟤들은 DNA가 다르구나 해요. 인류의 극소수만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 해요. 현저히 떨어지는 공감력 때문에 계속 인류는 같은 길을 가는 것 같아요. 얼마 전 고양 저유소 화재 때 인근에서 풍등을 날린 스리랑카인 노동자를 경찰이 긴급체포해 구속영장까지 발부하는 것을 보고 과거 제 모습의 일단과 오버랩됐어요. 많은 조사를 거쳐 화재 원인을 밝혀야 하는데 한 외국인 노동자에게 모든 걸 덮어씌워 해결하려 했으니까요. 91년도에도 그랬어요. 기왕이면 좀 더 드라마틱하고 재미있기를 바라면서….”

강기훈씨는 차 안에서 속내를 많이 털어놓았다. 백미러에 비친 그를 촬영했다. 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강기훈씨는 차 안에서 속내를 많이 털어놓았다. 백미러에 비친 그를 촬영했다. 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그는 1991년 당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며 명동성당에서 농성할 때의 이야기를 꺼냈다. 차라리 적이면 처음부터 배제할 테지만 동지라고 믿었던 이들의 외면은 더 깊고 쓰린 상처를 남긴 듯했다.

“스스로를 합리적이고 훌륭하다고 착각하는 소위 우리 쪽 사람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어요. ‘혹시, 했니?’ 하고 묻거나, 정치적 쟁점이 흩어지니 나가라거나, 검찰청에 어서 가라는 사람도 있었어요. 저에겐 엄청난 상처였고, 지금도 잊지 못해요. 발끝 하나로 간신히 버티고 서 있는 것과 같은 그 고립감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몰라요. 그래서 저는 사람이 싫어요.”

강씨는 2015년 11월 국가와 당시 수사검사 강신욱(전 대법관)·신상규(전 검사장)씨, 유서의 필적을 허위로 감정한 전 국과수 문서감정실장 김모씨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냈다. 1심은 “국가와 김씨가 강씨와 그의 가족에게 6억8600여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하지만 “소멸시효가 완성됐다”며 수사검사 2명의 배상 책임은 외면했다. 2심에선 ‘소멸시효가 완성됐다’는 김씨의 항소도 받아들여 그의 손해배상 책임도 인정하지 않았다. 다만 국가의 배상액을 9억3900만원으로 올렸다. 정부는 상고를 포기했다.

- 민사소송은 어떻게 됐나요. 대법원에 상고했나요.

“예. 하지만 달라질 게 있겠어요? 없을 거예요.”

- 그럼 왜 상고했습니까.

“재판부가 수사검사들과 허위로 필적 감정을 한 자 모두에게 면죄부를 줬잖아요. 제가 상고 안 하면 이를 인정하는 거잖아요. 책임의 주체로 추상적 국가만 있고, 그 추상적 국가를 대리해 일을 꾸민 구체적 인간들은 없는 거예요. 과거사 재판을 모두 그런 식으로 하고 있어요. 그러면 국가폭력은 계속될 수밖에 없어요. 91년에도 저를 수사한 검사가 ‘야, 네가 혹시 잘못돼도 난 검사거든. 처벌 안 받아’라고 했어요. 한데 진짜 처벌 안 받잖아요. 형사든 민사든 어떤 식으로든 벌받게 해야죠.”

- 강기훈씨가 바라는 것은 당시 수사검사들을 비롯한 관계자들의 진심 어린 사과겠지요.

“저들이 안 하는데 계속 요구하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제게는 그들을 용서하지 않을 권리가 있어요.”

- 박근혜 정부에서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낸 김기춘씨가 91년 당시 법무부 장관이었어요. 정의당 등은 유서대필 조작사건을 주도한 인물로 김 전 실장을 지목했는데요. 실제 누가 조작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박근혜 정부 때의 일로 푸른 수의를 입은 김 전 실장의 모습을 보며 어떤 생각이 듭니까.

“그걸로 부족하죠. 조작을 통해 죄 없는 사람에게 고통을 준 국가폭력 가해자들은 지금 벌벌 떠는 삶을 살아야 정상 아닌가요? 밤길도 두려워하고 창문도 꼭꼭 잠가놓고 겨우 살아야 맞죠. 그런데 대한민국은 그들에게 더 안전해요. 치켜세워주는 사람들도 많고요. 어쩌면 그렇게 가해자 편에 서는지. 사람들은 ‘그들도 어쩔 수 없이 그랬겠지’라는 말이 얼마나 폭력적인지도 모르고 아무렇지도 않게 해요. 그런 말들이 누군가에게는 철창의 감옥보다 더 큰 감옥이 된다는 것을, 피눈물을 쏟게 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해요.”

그를 다룬 다큐 ‘1991,봄’ 상영 중…“영화 안 봤고 안 볼 것”
지금도 사건 일어난 5월이면 더 아파 외국으로 나가 있어

화제를 그의 이야기가 중심인 영화 <1991, 봄>으로 돌렸다. 그는 “영화를 보지 않았고, 앞으로도 보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영화는 2016년 석달간의 소셜펀딩을 통해 1300여명이 후원한 4000여만원의 저예산으로 만들어졌다. 완성된 지 2년이 지나도록 상영관을 잡지 못하다가 얼마 전부터 서울과 지방의 일부 극장에서 상영 중이다. 화려하지 않으나 묵직한 울림과 긴 여운이 있다. 불과 한 달 사이 11명의 꽃 같은 생명을 잇따라 스러지게 한 1991년의 정치·사회적 상황이 날것 그대로 담겨 있다.

- 영화를 안 보는 이유가 과거의 시간을 반추하는 게 고통스러워서인가요.

“꼭 그런 것은 아니에요. 현재진행형인데, 뭐가 더 고통스럽겠어요. 사건이란 게 어느 한순간 벌어지고 그 결과로 감옥 가고 석방되고 하면서 끝나는 게 아니에요. 국가권력에 의한 인권 피해자들은 삶 전체가 바뀌는 것이기에 일상 자체가 다 고통이에요. 남들은 대수롭게 넘길 수 있는 말조차 그들에겐 칼날이 되죠. 그런데 그걸 사람들은 몰라요.”

- 강기훈씨의 기타 연주로 영화의 8개 챕터가 시작되고 이런저런 모습도 나오던데, 어떻게 촬영에는 응했나요.

“권경원 감독이 2011년에 유서대필사건에 대한 극영화를 찍겠다며 찾아왔어요. 사건에 대한 환기가 된다면 만들어보라고 했죠. 죽기 전에 연주회 한번 해보고 싶은 절박한 심정으로 2013년 기타 연습을 할 때 권 감독이 기록으로 남겨서 제게 주겠다며 카메라를 들고 온 적이 있었어요. 이후 밥집에서 지인들 모아놓고 연 연주회에도 오고요. 그런데 얼마 후 갑자기 다큐를 찍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만나지 말자고 했는데 권 감독이 뚝딱뚝딱 자꾸 뭘 찍더라고요.”

- 기타 연주실력이 수준급이던데요.

“고1 때 독학으로 배웠어요. 당시 음악이 천직이라 생각해 작곡을 전공하겠다며 피아노와 이론도 배웠는데 음대 진학은 고3 여름방학 때 포기했어요. 피아노를 1년만 더 치면 될 것 같았는데 아버지가 재수를 반대하셨거든요. 기타는 2012년 직장에서 각혈하고 쓰러진 후 퇴원했을 때 동생이 사줘서 다시 하게 됐어요. ‘이거 다시 하쇼’ 하더라고요(웃음).”

강기훈씨는 보급형DSLR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독학으로 사진을 익히고 있다. 13일에도 나무와 갈대는 물론 작은 사물들을 자신의 카메라에 담았다. 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강기훈씨는 보급형DSLR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독학으로 사진을 익히고 있다. 13일에도 나무와 갈대는 물론 작은 사물들을 자신의 카메라에 담았다. 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 요즘 사진촬영에도 재미 들이고 광주 가톨릭평생교육원에서 스페인어도 배운다면서요. 스페인어는 왜 배우는 거예요.

“남미를 여행하고 싶어서요. 팜파스(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중심으로 한 대초원지대)에서 석달 동안 아무것도 안 하고 일몰과 일출만 보고 싶어요. 또 스페인어를 잘해서 저보다 키 큰 스페인 여성과 5분 이상 일상적 수다를 떠는 것도 제 버킷리스트에 있어요.”

- 요즘 잠은 잘 자나요(그는 지독한 불면증을 앓아왔다).

“시골로 내려온 후 좀 나아졌어요. 서울에 있을 때는 1시간도 못 잤거든요. 자꾸 똑같은 악몽을 꾸다가 깨고, 다시 꾸게 될까봐 잠 못 드는 일이 반복됐어요. 수면제도 효과가 없고요. 지금도 아주 가끔 서울집에서 잘 때마다 반복되는 일이에요.”

- 2012년 인터뷰 때 “(사건이 일어난) 5월만 되면 몸과 마음이 다 아프다”고 했어요. 지금은 어떤가요.

“똑같아요. 그래서 그 즈음엔 한국을 떠나 있어요. 작년에도 올해도 독일에 갔어요. 한국말 안 들리고 매일 새로운 걸 보니까 조금 낫더라고요.”

여행 이야기를 하다가 일본 교토 이야기가 나왔고, 그의 아버지 이야기로 연결됐다. 그는 “아버지와 끝내 화해하지 못한 것이 너무도 후회된다”고 말했다. 당뇨를 앓던 아버지는 장기부전으로 2008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인생 멘토’였던 어머니는 2007년 담도암이 간으로 전이돼 투병생활을 하다가 2010년 사망했다.

“평생 아버지와 가장 긴 대화를 나눈 건 제가 감옥에 있을 때였어요. 일본어 공부하려고 아버지의 추천으로 읽게 된 모리 오가이의 단편집 때문이었는데, 교토의 다카세강을 오가는 배(다카세부네)에 대한 이야기 부분이 도통 해석이 안되는 거예요. 면회 온 아버지께 여쭈니 얼마나 좋아하는 작가였는지, 책을 달달 외우고 계시더라고요. 이전까지는 면회 때 ‘밥 잘 먹냐?’ ‘예.’ ‘잘 자고?’ ‘예.’ 하면 대화가 끝이었는데, 이날은 30분 면회시간 내내 책 얘기가 이어졌어요. 어느날 교토를 갔다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확 밀려들었고, 이후 자주 다카세강에 가고 있어요.”

그의 눈과 말에 뒤늦은 회한과 그리움이 배어나왔다. 그는 “매일 어머니와 아버지를 생각한다”고 했다.

이날 강씨는 직접 운전해서 순두부찌개가 맛있는 밥집과 울긋불긋한 아기단풍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는 길, 그리고 보림사와 그 뒤 비자나무숲, 또 커피향이 그윽한 시내의 작은 카페까지 여러 곳을 안내했다. 비자나무숲에는 그가 종종 누워 하늘을 본다는 벤치도 있었다. 그는 보급형 DSLR카메라를 몸의 일부처럼 끼고 다녔지만 자신이 피사체가 되는 것은 적극적으로 피했다. 오후 5시20분에 나주를 출발한 KTX가 천안아산역을 지날 즈음 문자 한 통이 날아왔다. “사진을 쓰시겠다면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게 롱테이크로 찍은 걸 사용해주세요.” 그는 언제쯤 팜파스에 가게 될까. 그가 일몰을 배경으로 키 큰 남미 여성과 스페인어로 수다를 떠는 모습을 상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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