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이 대물림되는 몇 가지 방식

2014.11.02 20:44 입력 2014.11.02 20:55 수정
김형경 | 소설가

삼십대 후반의 그 후배 여성은 타인의 호의와 친절을 유도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돌아서서 생각하면 명백한 의존성임에도 막상 마주 앉으면 지지와 격려를 건네게 되곤 했다. 그녀는 여러 해를 두고 틈틈이 안부를 묻듯 나를 사용했다. 그녀의 삶이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하는 감정더미에 묻혀 정체되어 있음이 명백히 보이던 어느 날, 독하게 그녀를 직면시켰다. “왜 아직도 나를 찾아와 이런 것을 달라고 하느냐?” 당시 그녀는 내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날부터 자기 삶을 점검하며 마음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몇 달 후 독한 직면의 의미를 이해했다는 e메일을 보냈고, 또 몇 달 후 혼자서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지점을 만난 것 같다고 전화했다.

[김형경의 뜨거운 의자]감정이 대물림되는 몇 가지 방식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자기가 어떤 부모 환경에서 양육되었는지부터 알아나가는 중이라고 말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고향이 흥남이었다. 열네 살 때 남자 형제들만 흥남 철수의 길에 올랐다. 아버지는 평생토록 고향이나 전쟁에 대해 한마디 언급도 하시지 않았는데 딸이 묻자 처음으로 이야기를 꺼냈다. 전쟁, 14세, 피란, 낯선 환경에서의 생존 등 그녀는 처음으로 아버지의 삶을 세밀하게 떠올려보았다. 그런 이야기를 할 때 그녀에게서 건너오는 슬픔이 미미하게 느껴졌다. 나는 분위기를 조금 가볍게 하기 위해 ‘굳세어라 금순아’라는 대중가요를 언급했다. 그녀는 그 노래조차 들은 적이 없었다. 스마트폰으로 검색하더니 낮은 목소리로 노랫말을 읽었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 그녀에게서 건너오는 슬픔의 감정이 조금 강해진다 싶었는데 그녀가 문득 전화기 덮개를 덮었다.

“이건 나중에 혼자 있을 때 읽어야겠어요.”

그녀가 고개 드는 순간, 내면에서 느껴지는 슬픔을 회피하는 순간, 그 모든 것이 고스란히 내게로 건너왔다. 폭포수를 뒤집어쓰는 듯한 슬픔이 온몸을 감쌌다. 어지럼증이 지나가면서 거짓말처럼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눈 주변 근육이 마비된 듯 눈물이 제어되지 않았다. 눈물을 훔치며, 울음 섞인 목소리인 채로 나는 그녀에게 슬픔의 투사 현상에 대해 말해주었다.

“지금 내가 느끼는 이 슬픔은 방금 네가 회피한 것이다. 그리고 너의 내면에 간직되어 있으면서 흥남이라는 단어조차 제대로 읽지 못하게 만드는 그 슬픔은 너의 아버지가 외면해온 것이다.”

이야기하는 동안 나의 슬픔은 서서히 가라앉았고, 내게서 떠난 감정은 그녀에게 되돌아갔다. 회피했던 슬픔을 받아안은 후 그녀는 오래 눈물을 흘렸다. 그녀와 나를 울린 슬픔은 그녀의 것도, 나의 것도 아니었다. 그녀 아버지의 슬픔이 그녀에게 대물림된 것이고, 잠시 내게 전염되었던 것이다.

[김형경의 뜨거운 의자]감정이 대물림되는 몇 가지 방식

▲ “양육자가 스스로 처리하지 못한 채
자녀에게 쏟아내는 감정들을
자녀는 고스란히
자기의 일부로 만드는 것이다”

부모가 해결하지 못한 감정의 문제들이 고스란히 자녀에게 대물림된다는 사실은 이제 누구나 알고 있다. 대표적으로 우리가 이해하는 감정의 전달 방식은 ‘동일시’이다. 부모가 세상 그 자체인 시기에 아이들은 부모 행동을 고스란히 흡수하듯 배운다. 폭력을 경험한 아이는 돌아서서 자기보다 약한 자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잔소리를 듣고 자란 아이는 돌아서서 누군가에게 똑같은 잔소리를 쏟아낸다. 양육자가 스스로 처리하지 못한 채 자녀에게 쏟아내는 감정들을 자녀는 고스란히 자기의 일부로 만드는 것이다. ‘공격자와 동일시’라는 개념은 히틀러를 가능하게 한 당시 독일인들의 심리를 설명하는 용어로도 사용된다.

부모가 해결하지 못한 감정의 문제를 자녀에게 물려주는 또 한 가지 방법은 ‘투사’이다. 부모가 내면 깊숙이 억압해놓고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 감정들, 외부로 표현된 적도 없는 감정이 은밀하게 자녀에게 전달되는 방식이다. 전쟁 세대 부모들은 자주 자식을 나태하고 흐리멍텅하고 나약해 빠졌다며 못마땅해한다. 처음에는 그것이 삶의 환경 차이 때문이라 생각했다.

부모 세대는 절박한 생존 문제 앞에서 성실하고 강인하게 살아야 했고, 자녀 세대는 그렇게까지 살 필요가 없기에 차이가 있는 것이라 여겼다. 자기보다 좋은 환경에서 자라는 자녀들을 무의식적으로 시기하는 언어인 듯도 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그것은 부모의 그림자가 자녀에게 투사되는 방식이었다. 성실하고 강인하게 살면서 회피해온 반대편 감정들이 고스란히 자녀에게 전해져 자녀의 성격 일부가 되어 있었다. 못마땅해하는 그 순간까지도 부모들은 자기 내면의 부정적 감정들을 자식에게 떠넘기는 중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우월한 자리에 서서 자녀를 심판하고 평가하는 부모 역시 본인의 수치심과 죄의식을 자녀에게 떠넘기는 행위를 하는 것이다. 자녀가 마음에 흡족하지 않을 때마다 서로 “당신 닮아서 그렇다”고 말하는 부모는 어렵게 존재 증명을 해야 했던 자신의 불안감을 자녀에게 떠넘기는 셈이다. 표현되지 않는, 은밀한 부정적 감정을 물려받은 자녀는 탈출구를 찾기 어렵다. 그 자녀 역시 부모를 이상화하면서 자기를 비난하는 시선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부모가 해결하지 못한 심리적 문제가 자녀에게 대물림되는 또 다른 방식은 ‘투사적 동일시’이다. 부모가 자녀에게 아무런 행동도, 언질도, 표현도 하지 않아도 한 사람의 감정이 그냥, 고스란히 주변에 전해지는 현상이 있다. 앞서 언급한 이야기에서 내가 후배 여성의 슬픔을 고스란히 느꼈던 것처럼. 정신분석 현장에서 분석가가 경험하는 이런 현상을 학자들은 오래도록 언급하지 않았다.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멜라니 클라인, 윌프레드 비온 같은 학자가 그런 사례들을 언어화하고 ‘투사적 동일시’라는 용어를 붙인 것은 최근 일이다. 심리학자 아치발트 하트는 그런 현상을 ‘감정의 전염’이라고 명명했다. 세밀하게 느끼든, 둔감하게 넘어가든 우리는 늘 주변 사람들의 감정에 영향을 받는다. 사회적으로 불행한 일이 생기면 전염된 듯 불행감이 번지고, 슬픈 일이 생기면 다함께 슬퍼한다. 가족 내에서는 그런 작용이 한결 정치하게 일어난다.

부모 세대가 자녀 세대에게 심리적으로 나쁜 것들을 물려주었다는 사실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는 이들이 있다. 본인으로서는 최선을 다했고 자녀에게도 흡족한 환경을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것, 자기 마음이나 행동을 성찰하기 전에 불편함부터 표현하는 태도가 자녀를 힘들게 만들었음을 알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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