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여성이 낳습니다. 여성만 낳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저출생 담론에는 여성이 없습니다. 남성, 특히 권력을 가진 남성들끼리 주거니받거니 합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9일 가칭 ‘저출생대응기획부’(저출생부)를 신설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박찬대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도 즉각 찬성했습니다. 고무된 윤 대통령은 13일 대통령실에 ‘저출생수석실’ 신설을 지시했습니다.
윤 대통령은 2022년 대선 두 달 전 페이스북에 ‘여성가족부 폐지’ 일곱 글자를 올린 이후, 여가부 폐지에 집착해왔습니다. 지난 2월 김현숙 전 장관의 사표를 수리한 뒤 장관직을 비워뒀습니다. 국민의힘이 4·10 총선에서 승리해 정부조직법을 개정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을 겁니다. 결과는 달랐습니다. 민심을 받아들인다면, 이제라도 여가부 장관을 임명하는 게 순리입니다.
윤 대통령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저출생부’를 들고 나왔습니다. 많은 여성들이 ‘여성가족부는 어떻게 되는 거냐’고 묻습니다. 주권자가 묻기 전에, 민주당이 먼저 대통령실에 물었어야 합니다. 용산에서 들리는 이야기를 종합하면, 폐지 입장에 변화가 없다고 합니다. 저출생부를 신설하며 여가부 폐지도 밀어붙이려는 기류입니다.
저출생 문제는 공동체의 미래를 좌우할 핵심 이슈입니다. 컨트롤타워는 필요합니다. 하지만 저출생 대책을 위해 여가부를 없앤다는 건 타당하지 않습니다.
연애를 해야 결혼을 합니다. 한국 사회 분위기상 결혼을 해야 출산을 합니다. 한국의 젊은 여성은 연애 자체가 두렵습니다. 연인 사이에 발생하는 ‘교제 살인’이 매달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난 6일 서울 강남에서 최모씨(25)가 “헤어지자” 했다는 이유로 여자친구를 계획 살인했습니다. 지난 4월 경남 거제에서도, 3월 경기 화성에서도 교제 살인이 발생했습니다.
한국여성의전화 자료를 보면 지난해 ‘친밀한 관계의 남성 파트너’에 의해 살해된 여성은 최소 138명에 이릅니다. 2.7일당 한 명이 죽음을 당한다는 말입니다. 교제폭력은 가정폭력처벌법·스토킹처벌법 대상이 아니어서 접근금지·분리조치가 불가능합니다. 반의사불벌죄라 피해자가 원치 않으면 처벌할 수도 없습니다. 거제 사건에서 피해 여성이 11차례나 남성을 신고했지만 ‘처벌 불원’으로 마무리된 이유입니다. 관련 법률 제·개정안은 국회에서 몇 년째 잠자고 있습니다.
어찌어찌 연애에 성공해 결혼한다 해도 그 이후가 더 문제입니다. 여성도 일을 통해 성장하고 꿈을 이뤄갑니다. 한국의 일터는 그러나 여성에게 가혹합니다. 성별 임금격차가 31.2%(2022년 기준)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큽니다. 아이를 낳으면 더 싸늘해집니다. 고용노동부의 ‘일·가정 양립 실태 조사’(2022년)에 따르면 5인 이상 사업체에서 ‘육아휴직을 누구나 쓸 수 있다’는 비율은 절반(52.5%)에 불과합니다.
한국의 연간 노동시간은 OECD 회원국 중 다섯 번째로 깁니다. 그럼에도 윤석열 정부는 ‘주 69시간’까지 노동시간을 늘리겠다고 해 비판받았습니다. 사정이 이러니, 임금이 상대적으로 적고 가사·돌봄노동을 더 많이 요구받는 여성이 직장을 떠나는 사례가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가부는 성평등문화 확산, 여성 인력 개발·활용, 성희롱·성폭력·가정폭력·스토킹·교제폭력 방지 및 피해자 지원 업무 등을 맡고 있습니다.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여성정책 총괄·조정 및 정책의 성별영향 분석·평가입니다.
여가부가 사라지면, 법무부·보건복지부·노동부 등 타 부처 정책에 성인지적 관점(gender perspective)을 반영토록 요구할 주체도 사라집니다. 스토킹은 범죄가 아니라 조금 지나친 구애행위이며, 불법촬영 영상물은 ‘리벤지 포르노’로 정당화되던 그 시절로 퇴행할 수 있습니다. 노동시장의 성차별을 방지·처벌하는 정책·조치도 힘을 잃을 가능성이 큽니다.
법무연수원의 <2023 범죄백서>에 주목할 대목이 있습니다. 성폭력 범죄는 2013년 2만9090건에서 2021년 3만2898건으로 완만한 증가세를 보였습니다. 2022년 갑자기 4만건을 넘어서며 최고치(4만1433건)를 기록합니다.
윤 대통령이 여가부 폐지를 선언한 날이 2022년 1월 7일입니다. 꼭 한 달 후엔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는 발언을 합니다. ‘여가부 폐지’는 이후 대선 공약으로 채택되며 한국 사회의 백래시(반동)를 자극하는 신호탄이 됩니다. 성폭력 발생 최고기록과 여가부 폐지 공약이 무관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스웨덴·독일 등 합계출산율 반등을 이뤄낸 나라들의 공통적 해법은 ‘성평등’이었습니다. 성평등 없이 출산율 제고가 불가능하다는 건 국제적으로 입증된 ‘사실’입니다. 여성들은 성폭력을 비롯한 각종 폭력으로부터, 고용·임금차별 등 각종 차별로부터 자유롭고 안전해지지 않는 한 아이를 낳지 않을 겁니다. 저출생 대책을 위해 여가부를 없앤다면 정확히 거꾸로 가는 길이 됩니다. 여성은 출산의 주체이지 도구가 아닙니다.
박 원내대표의 저출생부 관련 발언에서 보듯 민주당의 무감각은 놀라울 지경입니다. 뒤늦게 “여가부를 폐지하고 저출생부를 만들겠다면 검토가 필요하다”(진성준 정책위의장) “(저출생부 신설이) 다른 조직 개편 계기로 활용된다면 국민이 받아들이겠느냐”(박성준 원내수석부대표)며 수습에 나섰지만, 어물쩍 넘어갈 일이 아닙니다. 여가부 폐지·축소를 전제로 한 저출생부 신설은 논의 자체가 불가능함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나아가 여가부의 조직·기능을 확대해 가칭 ‘성평등사회부’로 강화하고, 저출생 대책도 여기서 주도하도록 하는 방식의 역제안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민주당은 김대중·노무현 정신의 계승자를 자임하지 않습니까. 여성부는 김대중 정부 때 생겨났고, 오늘날의 여가부는 노무현 정부에서 탄생했습니다.
4·10 총선 방송3사 출구조사 결과, 20대 이하 여성의 51%가 민주당 비례위성정당인 더불어민주연합을 지지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20대 이하 남성의 더불어민주연합 지지율은 절반가량(26.6%)에 불과했습니다. 2022년 대선 출구조사에서도 20대 이하 여성의 이재명 후보 지지율이 58%에 달했습니다. 여성청년들이 그만큼 윤석열 정권의 ‘여성 지우기’에 공포를 느끼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민주당은 당 강령 11조에서 “실질적 성평등 사회를 구현”하고 “정책 전 영역에 성인지적 관점을 통합 반영하는 제도를 구축”한다고 천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강령을 실천함으로써, 여성 주권자에게 진 빚을 갚기 바랍니다. 거대 야당의 힘은 이런 데 쓰라고 준 것입니다. 곧 퇴원하는 이재명 대표의 선택을 주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