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민주화운동]59. 대우자동차 파업

2004.06.13 18:41 입력

대우자동차 부평공장 기술연구소 3층을 점거하고 농성에 들어간 지 이틀째 밤인 1985년 4월21일 새벽 1시쯤. 홍영표는 피곤에 지친 몸을 잠시 쉴까 하고 있는데 예비군 중대장한테서 급한 전갈이 왔다. 사장실에서 누가 꼭 좀 보자고 한다면서 신변의 안전은 절대 보장할테니 자기하고 같이 가자는 것이었다. 사장실에 간 홍영표는 난데없는 광경에 깜짝 놀랐다. 사장 이하 전 임원이 모두 기립 도열해 있는 것이었다. 잠시 후 들어온 사람은 대우그룹 회장 김우중이었다. 국내 유수의 재벌 회장이 일개 노동자를 한밤중에 불러내 직접 보자고 한 것이다.

대우자동차 파업은 공식적으로는 4월16일 노조 집행부에 의해 결행됐다. 그런데 김우중이 노조 집행부가 아닌 홍영표를 불러 사태를 해결하고자 한 데는 까닭이 있었다.

1957년 전북 고창에서 태어난 홍영표는 77년 동국대에 입학했다. 유신 말기 숨막힐 듯한 분위기에서 학창생활을 보낸 그는 자연스럽게 몇몇 탈춤반 동료들과 함께 민주화운동에 가담해 남몰래 반정부 유인물을 뿌리곤 했다. 78년 그는 군에 입대했으나 동료들은 결국 학내 시위로 구속되고 말았다. 81년 2월 군에서 제대한 후 그는 동료들과 사회과학 세미나를 하며 민주화운동에 헌신할 것을 다짐했다. 광주민주화항쟁은 노동자·농민 등 민중이 중심이 되지 않은 학생들만의 시위로는 결코 군사독재를 물리칠 수 없다는 것을 자명하게 보여주었다. 이제 운동은 학교에서 할 것이 아니라 노동자·농민이 사는 공장이나 농촌에서 해야 할 일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체의 기득권을 버리고 직접 노동자·농민이 돼 그들 속에서 살아야만 했다.

82년 3월 학교에 등록하지 않고 그는 노동현장에 들어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노동자로 살기 위해서는 우선 체력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생각한 그는 건설현장에서 잡부로 일하며 노동자의 몸을 만들어갔다. 그리고 7월 대우자동차 직업훈련원에 입소해 6개월간의 교육기간을 마친 후 83년 3월 대우자동차 차체부에 용접공으로 정식 입사했다.

그런데 대우자동차 부평공장에는 홍영표 말고도 노동운동에 투신하기 위해 신분을 감추고 입사한 사람이 몇몇 더 있었다. 84년 8월 그 중 한 사람인 서울대 출신의 송경평이 자신의 신분이 노출된 것을 계기로 노동자들의 처우 개선과 노조 민주화투쟁에 적극 나서기 시작했다. 군필자들의 호봉 승급과 상여금 문제로 시작된 싸움은 어용노조 밑에서 체념에 빠져 있던 노동자들에게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 열기를 바탕으로 홍영표는 노조 민주화투쟁에 나섰다. 84년 12월18일 실시된 노조 대의원 선거에서 홍영표는 차체부 대의원에 당선됐다. 그리고 12월24일에는 뜻을 같이하는 동료 노조원들을 중심으로 ‘노동조합 정상화 추진위원회’를 결성해 집행부 불신임운동을 전개하고 나섰다.

그러자 집행부는 대의원대회를 무기 연기했다. 회사측도 인사명령 불복종과 업무지시 불이행이라는 명목으로 송경평과 또 한 명의 서울대 출신인 이용선을 해고했다. 이어 85년 1월25일 대의원대회에서 집행부 불신임안이 표결에 부쳐졌으나 찬성 17표, 반대 24표로 결국 부결되고 말았다. 이로써 84년 8월 송경평의 선도로 시작된 대우자동차 노조 민주화투쟁은 일단 어용노조측의 승리로 일단락된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노조 민주화투쟁이 실패로 끝나고 송경평·이용선마저 해고된 상황에서 홍영표는 4월 임금교섭을 목표로 철저한 준비에 들어갔다. 이미 홍영표 또한 학생운동 출신이라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에 더 이상 그늘 속에 있을 필요도 없었다. 홍영표는 우선 ‘근로자의 함성’이라는 소식지를 통해 노조원에 대한 교육 선전에 주력했다. 그리고 각종 자료들을 동원해 임금인상이 어느 수준에서 이루어져야 하는가에 대한 과학적인 근거를 제시했다. 홍영표 등이 제시한 임금인상안은 최저생계비 부족분과 생계비 상승률 보상, 생산성 향상분에 대한 공정 분배를 합해 최종적으로 27%였다. 이에 대해 집행부는 18.7%를 주장했다. 우여곡절 끝에 홍영표 등은 집행부가 결연한 자세로 임금교섭에 임할 것을 전제로 집행부안에 동의했다.

이로써 회사와의 임금교섭에 들어갔으나 회사는 임금교섭을 차일피일 미루고만 있었다. 이에 맞서 홍영표 등은 공청회·비상총회 등을 통해 노조원들의 투쟁의지를 고취시키는 한편 회사에 대한 압박을 강화했다. 노조 집행부는 회사와 열성 노조원 사이에서 눈치만 보고 있었다. 4월15일 1,000여명의 노조원들이 노조 사무실 앞에서 연좌 농성하는 가운데 2차 교섭이 있었으나 회사측은 임금 5.7% 인상과 제수당 5% 인상만을 고집할 뿐이었다. 이에 격분한 노조원들이 파업에 들어갈 것을 촉구하자 노조위원장 김영만도 결국 파업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4월16일 오전 8시를 기해 대우자동차는 전면 파업에 돌입하게 됐다.

19일이 되면서 파업 현장의 분위기가 심각해졌다. 다음날이 휴무 토요일인 관계로 20·21일 이틀을 쉬는 사이에 회사와 경찰이 적극적인 파괴공작에 나서지 않겠느냐는 우려가 제기됐기 때문이었다. 그런 가운데 이날 오후 5시 회사측이 20일부터 전사원에 대해 출근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린 사실이 알려지면서 350여명의 열성 노조원들이 기술연구소에 들어가 바리케이드를 쌓고 철야농성에 들어갔다. 이들은 경찰이 강제로 해산하려 할 경우 기술연구소에 있는 설계도면 등을 불태우겠다고 위협하면서 18.7% 임금인상을 회사측이 전면 수용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김우중이 홍영표를 보고자 한 것은 노조가 노동자들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노조와의 협상은 하나마나한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홍영표나 김우중이나 노사협상의 법률적 대표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이 대우자동차 노사 양쪽을 실질적으로 대표하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김우중은 자신의 회사가 대규모 노사분규의 회오리에 휩쓸리게 돼 불량사업장이라는 불명예를 뒤집어쓰게 된 것을 못견뎌했다. 그렇기 때문에 경찰 투입을 요청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김우중은 경총의 임금인상 가이드라인 5.2%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김우중과 홍영표는 몇 차례에 걸친 승강이 끝에 기본급 인상 8%에 수당 등을 더해 총 16.4%의 임금인상에 합의했다.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기본급 인상 18.7%에는 미치지 못했으나 내용상으로는 요구조건을 상당부분 관철한 것이었다.

이로써 대우자동차 파업은 해결됐다. 농성이 끝난 후 노조 집행부가 협상의 주체가 자신들이기 때문에 이 합의가 무효라고 주장하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으나 이미 차는 지나간 후였다.

합의안에는 파업에 대한 민·형사상의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조항도 있었으나 이는 김우중이 책임질 수 있는 사항이 아니었다. 김우중은 청와대의 강경 분위기를 읽고 홍영표를 자기 차 트렁크에 싣고 경찰 포위망을 빠져 나갔다. 김우중으로서는 나름대로 약속을 지킨 셈이다. 그러나 홍영표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이제부터는 대정부투쟁을 벌여야겠다고 생각하고 다시 대우자동차에 잠입했다. 그러나 점심시간에 프레스 공장 지하에서 잡힘으로써 홍영표의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다.

홍영표·송경평 등 총 8명이 구속된 대우자동차 파업사건은 우리나라 노동운동사에서 한 분기점을 이루는 사건이었다. 70년대 이후 노동운동의 주류는 여성이었고, 주로 섬유산업 등 경공업 분야에서 전개됐다. 그러나 대우자동차 파업의 주역은 건장한 남성이었고, 사업장 또한 대규모의 중공업분야였다. 이는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전개될 향후 노동운동의 미래상을 제시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대우자동차 파업이 갖는 가장 큰 의의는 목적의식을 갖고 노동현장에 침투한 학생운동권 출신 노동자들이 노동운동의 한 주역으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학생운동 출신들이 남의 입장이 아닌 동료의 입장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싸운 이 사건을 계기로 많은 학생운동 출신들이 노동현장으로 물밀듯 들어갔고, 노동자들도 이제 그들을 남이 아닌 동료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속에서 87년 7·8월의 노동자 대투쟁의 씨앗이 자라고 있었다. 당시 언론에서는 이들 학생운동 출신 노동자를 일컬어 위장취업자라고 했다.

-기획·집필에 참여한 사람-

유시춘(소설가) 이우재(자유기고가) 김남일(소설가) 황인성(인권운동가) 정재돈(농민운동가) 한상봉(자유기고가) 김명인(문학평론가) 최민희(민언련 사무총장) 박노승(경향신문 논설위원) 문성현 (" 미디어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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