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석을 존경하는 ‘고딩이야기’

2004.09.23 19:21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가 대학 강의실에 들어온다. 교수님인가? 그러나 아무렇지도 않은 듯 책상에 앉아 책을 펼친다. 어리둥절해진 학생들. 이윽고 어린 티가 역력한 한 남자가 강단에 선다. 이어 화면 중앙에 뜨는 광고카피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강의석을 존경하는 ‘고딩이야기’

이계덕군은 서울 국악예술고등학교 음악연극학과에 재학 중인 고3수험생이다. 수학능력시험을 앞두고 있으니 ‘공부하기’에 여념 없을 터. 그런데 이군은 여느 수험생처럼 학원이나 독서실로 향하지 않는다. 대신에 청소년 정책 관련 토론회를 찾는다. 선거 가능한 나이를 만 18세로 하향조정하라며 1인 시위와 단식투쟁을 하고, 미군장갑차 여중생 추모집회 촛불지킴이로 1년 동안 활동한 그의 이력을 떠올려 보면 특별한 일도 아니다.

이군과 함께 찾은 성북 청소년수련관.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하고 싶었던 말이 많았던 모양인지 잠시도 입을 놀리지 않는다. 서울에 있는 웬만한 청소년수련관은 모두 꿰고 있다는 이군은 “대부분의 청소년 수련관이 교통이 불편한 곳에 있어 청소년들이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형편”라며 “시설물이나 프로그램도 청소년보다는 주부, 유아 위주로 맞춰 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그가 청소년 문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때부터. 중2때 서울시에서 주최하는 ‘뉴스 챔피언 대회’라는 청소년대회에 참가했고, 이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학교 축제나 청소년 대상 이벤트를 기획하기도 했다. 연극을 전공하는 것도 연극이 종합예술이니만큼 연출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화술을 통해 말하는 법 등 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상식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란다.

“4.19혁명과 5.18 광주민중항쟁의 주역이 청소년이었잖아요. 최근 들어 청소년들이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는 것도 같은 맥락이에요. 과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정보가 인터넷을 통해 공유되고 또 의견교류까지 이뤄지니 사회문제에 눈 뜨는 건 당연한 일이죠. 현재 20대의 투표율이나 정치참여율이 굉장히 낮은 건 청소년보호법이 생기면서 사회와 단절시켰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이군은 인터넷 활동에 열심이다. 여러 인터넷신문의 시민기자로 활동하며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기사화한다. 얼마 전 학내 종교의 자유를 주장하며 단식을 강행하던 강의석(대광고3) 군이 종적을 감췄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알린 것도 그였다.

그가 강의석군에게 쏟는 애정은 친구 이상이었다.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아무런 망설임 없이 강의석군을 꼽을 정도다. “세종대왕이나 이순신장군은 느낌이 안 오는 책 속의 인물에 불과하지만, 의석이는 같은 고등학생으로서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는지, 또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오랜 시간 단식을 하는지 존경스럽기만 하다”고 말했다. 마침 인터뷰 당일 경남 고성에서 발견된 강의석 군의 이야기를 늘어놓던 이 군은 “만나면 한 대 때려주고 싶다”며 그동안의 가슴앓이를 살짝 내비쳤다.

이군은 청소년 관련 정책의 근본적인 문제점으로 청소년을 미숙한 존재로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현재 청소년에 대한 정책이 여러 군데로 분산돼 있어 한계가 있다”며 “청소년 업무의 여성부 이관 문제만 해도 청소년을 하나의 정책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부처의 힘을 키우려고만 한다”고 꼬집었다.

장래희망이 궁금했다. 수많은 청소년 활동가들이 그렇듯 이 군도 장차 정치인이 되기 위해 기반을 닦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에서였다. 그런데 결과는 의외였다. “꿈이요?” 한참을 고민하더니 “하고 싶은 대로 살아도 행복한 나라에 살고 싶은 것”이라고 말했다. 참으로 쉽고도 어려운 명제다. 그러면서 덧붙인 말이 “그런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는 중이예요.” 그가 유난히 또박또박하고 힘찼다.

그렇다면 왜 하필 청소년 정책에 관심을 가졌을까. 역시 대답은 간단했다. 현재 자신이 청소년이기 때문이란다. 미군 장갑차 여중생의 추모집회를 1년 동안 참석했던 것도 같은 또래의 일이었기 때문이라고. 故 김선일 씨의 추모집회에 참석했던 것도 ‘살고 싶다’ 고 외치던 그의 울부짖음이 가슴으로 전해졌기 때문이다.

강의석을 존경하는 ‘고딩이야기’

현재 이 군은 성공회대학교 신문방송학과 NGO전형에 지원한 상태다. 또 지난 18일 있었던 ‘청소년 정치참여 포럼’에서 “소속 정당 국회의원들을 다 모아 청소년들과 대화하고 청소년들에게 질문하는 시간을 만들겠다”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청소년은 ‘미래의 주역’이 아니라 ‘오늘 사회의 구성원’이라고 당당히 말하는 이계덕 군. 자신은 소위 말하는 운동권이 아니며 평범한 고등학생이란다. (물론 민중가요 ‘솔아 솔아 푸른 솔아’가 그의 휴대폰 컬러링이고 ‘노래방 18번’도 민중가요가 대부분이라지만.) 이 군처럼 자신이 옳다고 믿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청소년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오늘’은 물론 우리의 ‘미래’도 밝은 게 아닐까.

〈이성희기자 mong2@kh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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