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온달과 평강공주

2005.01.12 17:29

우리 역사 속에 등장한 설화들은 그 나름대로 시대적 의미를 담고 있다. 특히 온달설화는 당시의 시대상황을 잘 반영한 내용으로 엮어져 있다. 더욱이 정사인 ‘삼국사기’에 온달 이야기가 담겨 있어서 단순한 설화로 보지 않는 학자들도 있다. 사실 ‘삼국사기’에는 신비스러운 내용을 거의 기록하지 않았다. 역사는 사실에 토대를 두고 괴력난신(怪力亂神)의 이야기를 기록치 않는 유교적 엄숙주의의 기술 방법 때문이었다. 그러니 온달 이야기도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경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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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달은 평양 변두리의 산골에서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가난하게 살고 있는 청년이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겉 모습은 구부정하고 우스꽝스러웠지만 마음속은 환하게 밝았다”고 했고, “집이 매우 가난하여 늘 음식을 구걸해다가 어머니를 봉양했다”고 했으며 “찢어진 적삼과 해진 신발로 저자를 왕래하니 그때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바보 온달이라 했다”고 하였다.

-고구려 쇠퇴기…갈등 봉합 영웅 필요-

이 이야기를 쓴 사관은 온달을 결코 바보라고 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묵묵히 자기 일만을 하고 눈 먼 어머니를 극진하게 봉양하는 효자임을 이야기 속에 풍기고 있다. 그런데도 ‘바보’라는 세상 사람들의 말에 현혹되어 진짜 바보인 것처럼 느끼고 있었다. 진정 아이큐가 낮은 바보는 결코 명장이 될 수도 없었고 뛰어난 솜씨로 말달리기와 활쏘기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무튼 평강공주는 어릴 적에 울보여서 부왕인 평강왕(평원왕의 오기)이 늘 ‘바보’ 온달에게 시집보내겠다는 농담을 했다. 공주가 16살이 되어 귀족인 상부 고씨에게 시집보내려 하자 “임금은 허언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고 온달과 혼인하게 해달라고 떼를 썼다. 부왕은 그를 궁중에서 쫓아냈다.

그녀는 산골에 사는 온달을 찾아가서 금팔찌를 팔아 마소를 사는 등 넉넉하게 살림살이를 꾸리고 말부리기와 활쏘기를 연습시켰다. 고구려에서는 3월3일 평양 교외에 있는 낙랑의 언덕에서 사냥대회를 열었는데 온달이 참여해 1등을 했다. 임금이 그의 이름이 온달임을 알고 놀랐다. 요동벌에서 전쟁이 벌어졌다. 이 전쟁에 임금이 친정했다. 온달이 앞장서서 큰 전공을 세웠다. 임금은 그를 칭찬하고 대형의 벼슬을 내리고 정식으로 예식을 갖추어 혼례를 올리게 했다. 곧 정식 사위로 맞이했다는 말이다. 그 뒤 그는 임금의 극진한 총애를 입었다고 한다. 온달은 평민으로서 최고의 신분상승을 이룩한 것이다.

고구려는 여느 고대국가와 마찬가지로 귀족사회였다. 그러니 귀족이 아니면 높은 벼슬자리에 오를 수 없었다. 고구려 귀족사회의 형성은 조금 독특했다. 초기에는 5부 체제로 하여 왕권이 심하게 제약을 받았다. 계루부는 왕위 계승권을 가졌으나 나머지 4부는 왕을 추대하기도 왕을 내쫓기도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으며 각기 군사를 보유하고 별도로 조세를 거두기도 했다.

왕실의 왕권강화 노력은 쉴 새 없이 전개되었다. 5세기에 활동을 벌인 광개토태왕과 장수왕은 5부 체제를 무너뜨리고 강력한 왕권을 회복한 군주였다. 그런 뒤에도 새로운 귀족사회가 형성되었다. 다시 귀족들끼리 권력쟁탈전을 격렬하게 벌였다. 장수왕은 이들 귀족을 추군(추群·추잡한 무리) 또는 세군(細群·잔챙이)이라 부르면서 모조리 죽여버렸다. 장수왕은 이들 귀족이, 대제국을 건설하는 대사업에 방해가 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런 속에서도 귀족들은 새로 고개를 내밀었다. 6세기 무렵에는 귀족사회가 다시 개편되었다. 곧 평양 천도 후에 옛 도성에 사는 국내성파와 새 도성에 사는 평양파로 갈라진 것이다. 두 파는 권력을 잡기 위해 서로 심한 갈등을 빚었다.

이럴 적에 평민들은 조세를 무는 따위의 국가의무를 지니면서도 높은 벼슬을 얻을 수 없었다. 또 왕실은 귀족들과 혼인을 했고 귀족들은 독점적 특권을 누리기 위해 자기네들끼리 혼인을 하여 끈끈한 혈연관계를 맺었다. 평민들이 등장할 틈새가 없었다. 이런 배경에서 온달 이야기가 등장한 것이 아니겠는가? 결국 연개소문은 다른 귀족과 대결한 탓으로 국력을 소모시켜 고구려를 멸망의 길로 내몰았다.

-묵묵하고 성실한 효자가 ‘바보’로 와전-

또 평원왕은 장수왕이 죽은 지 70여년 뒤에 왕위를 계승했다. 평원왕 당시 고구려는 국력이 쇠퇴해지기 시작해 한강 주변과 죽령 남쪽의 영역을 잃었다. 요동지방도 중국에서 일어난 후주(後周)가 지경을 침범하고 있었다. 고토 회복의 의지는 불탔으나 귀족들의 갈등과 평민들의 불만으로 일체감이 형성되지 않았다. 귀족을 누르고 평민을 등장시켜야 하는 정략이 요구되었다. 그 방법의 하나가 바로 온달의 등장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증거가 바로 아무리 화가 난다고 공주를 산속으로 쫓아낼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진중하고 성실하며 평민이요 무인(武人)인 온달을 사위감으로 미리 찍고 그 공로를 인정해 대형(大兄)이라는 높은 관직을 내리면서 몇 가지 방법을 동원해 사위로 공식적으로 공포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로부터 온달은 “총애와 영예가 더욱 높아지고 위세와 권위가 날로 융성했다”(삼국사기)고 기록했다. 귀족들은 그 치밀한 구조에 맞설 수 없었을 것이다.

-삼국사기에 수록…실존인물 일수도-

평원왕의 뒤를 이은 영양왕도 국력의 쇠퇴를 두고 고민에 빠졌다. 지배세력의 한 사람으로 활동하였던 온달은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자청해서 남쪽의 고토를 회복하겠다고 나섰다. 온달이 이 임무를 맡은 것은 귀족 출신 장수의 소외를 의미한다. 그는 죽령을 넘어 충주 단양 일대를 석권하기도 하고 한강 중류의 아차산에서도 정복활동을 벌였다. 그는 전장의 일선에서 죽었다.

그가 죽자 그를 영웅으로 만드는 작업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리해 평강공주를 다시 배역으로 등장시킨 것이 아니겠는가? 평강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고서야 관이 움직였다고 하니 말이다. 고구려 왕실의 이런 정략은 더욱 평민 또는 민중을 더욱 감동시켰다. 그런 탓으로 민중들은 온달설화를 만들어내고 널리 퍼뜨렸던 것이다.

온달은 을지문덕과 연개소문과 함께 고구려 3대 장수로 꼽을 수 있다. 그러나 그만이 평민출신이었고 왕의 사위였다. 그래서인지 민중의 입에서는 그의 이름이 가장 많이 오르내렸다. 오늘날에도 예전 귀족이나 다름없는 기득권 세력이 한번 거머쥔 이권을 놓지 않으려 발버둥치면서 사회의 갈등요인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런 조건에서 신판 온달들도 등장하는 것 같다.

〈이이화/ 역사학자〉

-온달은 평민 출세의 표상…유적도 많고 전설도 많아-

온달과 관련있는 전설은 주로 한강 주변과 충주 주변에 널리 퍼져 있다. 곧 단양의 온달산성 주변과 한강가 아차산 주변으로, 온달이 활동한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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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달산성과 가까운 곳에 월악산이 있다. 새재와 이웃한 월악산은 군사요충지여서 산성을 쌓아두었다.

산 아래에는 기암괴석들이 널려 있다. 그 가운데 큰 돌 위에 얹혀 있는 ‘온달 공깃돌’도 있다. 크기가 어른의 한 아름쯤 된다. 온달이 이곳에 와서 머물 때 심심풀이로 이 돌을 들고 공기 받기를 했다는 것이다. 힘센 장정이라도 들 수 없는 무거운 돌을 마음대로 가지고 놀았다는 뜻이 담겨 있다.

아차산에는 온달샘이라는 약수터가 있다. 온달샘은 온달이 이 산에서 진을 치고 있을 때 마셨다는 우물이다. 온달샘 바로 옆에 석탑이 세워져 있다. 사람들은 온달샘을 기리려고 탑을 세웠다고 말한다. 이 탑은 그 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또 보루성 아래에는 온달이 주먹을 쥐고 결의를 다지는 형상을 한 ‘주먹바위’가 있다. ‘주먹 바위’ 옆에 평강공주가 통곡한 곳으로 알려진 ‘통곡바위’도 있다. 온달의 관이 움직이지 않았다 한다. 마침내 평강공주가 와서 시체를 부여안고 통곡을 하자 그때서야 관이 움직였다고 한다. 그 이후 평강공주가 통곡하는 모습을 한 바위가 생겨났다고 전한다.

민중들이 이런 전설을 만들어낸 의미는 어디에 있었을까? 아련하게 전해오는 온달 설화를 두고 사람들은 평민출신 장군의 영웅적 활동과 함께 숭배하는 관념으로 젖어들었던 것이 아닐까? 그리고 ‘신데렐라’가 아니라 평민출신으로 임금의 사위가 되어 출세한 인물의 표상으로 삼았을 것이다.

오늘날 서울 광진구와 구리시에서는 ‘고구려’ ‘온달’ ‘평강공주’의 이름을 단 상호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과 함께 나타난 현상이다. 그런 탓으로 온달과 평강공주의 설화는 더욱 붐을 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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