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씨 사망

2005.02.02 17:18

1987년 8월22일 오후 1시. 3,000여명의 노동자와 1,500여명의 전투경찰이 대치해 있는 거제도 옥포관광호텔 앞 4거리엔 일촉즉발의 긴장이 흘렀다. 간밤의 치열했던 싸움을 증명이라도 하듯 거리에는 돌과 병조각이 어지럽게 나뒹굴었고, 메케한 최루탄 가스가 코를 자극했다. 멀리 옥포만의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감청색 작업복과 국방색 군복의 묘한 대비가 위기감을 고조시키는 가운데 호텔 안에서는 대우조선 노사 대표가 단체교섭을 벌이고 있었다. 회사측의 무성의와 지연작전에 지친 노조 대표는 최초의 요구안에서 몇 걸음 물러나 ‘기본급 2만원 인상, 현장수당 2만원 인상, 가족수당 1만원 신설’ 안을 제시하며 한껏 몸을 낮췄다. 그러나 협상은 또 다시 결렬됐다.

[實錄민주화운동] 88.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씨 사망

호텔 앞 4거리는 일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최루탄 연기가 숨도 쉴 수 없을 만큼 뿌옇게 시야를 가렸다. 바로 그때, 감청색 작업복 상의에 청바지를 입은 한 노동자가 가슴을 움켜쥐며 쓰러졌다. 날아온 최루탄에 오른쪽 가슴을 정통으로 맞은 것이다. 동료들이 황급히 그를 들쳐업고 대우병원으로 달려갔지만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길바닥에 신발 한짝만 남겨두고 스물두 해의 짧은 생을 마친 이 젊은 노동자는 대우조선 대조립부 외업반의 이석규였다. 전북 남원에서 나고 자란 그는 중학교를 졸업한 82년 초 ‘기술을 배워서 성공하겠다’는 생각으로 광주직업훈련원에 들어갔다. 방위산업체인 대우조선은 훈련원 1년 과정을 수료한 그가 처음 선택한 직장이었다. 이석규는 크게 두드러질 것 없는 평범한 용접공이었다. 다소 내성적인 그는 간혹 동료들에게 “인간답게 살고 싶다”고 토로하기도 했으나, ‘부지런하자! 낭비하지 말자! 임무에 충실하라! 배우는 자세로 임하라!’는 평소의 신조대로 ‘지옥의 노동’이라 불리는 조선소 일을 착실하게 견뎌냈다.

대우조선 노동자들에게 85년부터 87년까지의 3년은 악몽의 시기였다. 임금은 거의 동결에 가까웠고, 급기야 87년에는 3만명 중 1만6천명 감원이라는 직격탄까지 맞았다. 기아 임금으로 벼랑에 내몰린 노동자들의 불만이 높아지는 가운데 87년 초, 군 입대를 앞둔 노동자들이 작성한 유인물 수천장이 현장과 기숙사 등지에 뿌려지면서 긴 투쟁의 서막이 올랐다. 회사는 부서이동, 파견근무, 해고 등으로 맞섰지만 불붙기 시작한 노동조합 결성 투쟁을 막을 수는 없었다. 방위산업체에서 5년 근무하면 군 근무가 면제되기 때문에 한눈 팔지 않으려 이를 악물었던 노동자들이 마침내 노동자 대투쟁 시기를 맞이해 그동안 억눌렀던 분노와 혈기를 터뜨렸다. 이석규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이석규의 사망 소식을 전해들은 노동자들은 “돈도 필요 없다, 이석규를 살려내라!”며 대우병원 영안실로 모여들었다. 동료들은 시신이 안치된 영안실 문을 용접으로 봉하고, 24시간 삼엄한 경계를 폈다.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변호사 노무현·이상수 등 각계 인사들이 속속 도착하면서 장례준비위원회가 발족됐다. 유족들에게서 장례에 관한 일체의 사항을 위임받은 장례준비위는 노조 집행부와의 연석회의에서 “장례를 ‘전국 민주노동자장’으로 하고, 장지는 망월동 묘역으로 하되 묘지를 구할 수 없을 때에는 모란공원으로 한다”고 합의했다.

그런데 8월24일, 친척 행세를 하던 특전사 소속 육군 소령 이청수가 유족대표가 되면서 상황이 묘하게 틀어지기 시작했다. 유족들과 회사측이 돌연 장지를 남원의 선산으로, 장례를 가족장으로 치르자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이에 맞서 장례위원회는 장례식을 ‘민주국민장’으로 치르기로 최종 결정을 내리고, 장례절차에 앞서 정부의 공식 사과와 피해보상 등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못박았다. 장례절차를 두고 유족·회사측과 장례위원회의 의견대립이 해소될 기미를 보이지 않자 24일 밤 노조 집행부는 회의를 소집해 살인경찰 즉각 구속과 내무부장관 등 관련자 즉시 파면, 당국의 공식 사과 및 최루탄 사용 중지, 피해자 보상, 회사측의 휴업조치 철회, 노조탄압 중지 등을 장례식의 선결조건으로 내세우며, 이것이 수락될 때까지 장례를 무기한 연기하기로 결정했다.

8월25일, 대우조선 노동자들은 정부와 회사측 입장만을 일방적으로 보도하는 기자들의 취재를 금지하는 한편 ‘고 이석규 민주노동열사 순국 경과보고 제2차 국민대회’를 개최해 투쟁의지를 다졌다. 이날 밤 장례위원회는 “노조의 요구 가운데 ‘임금인상 3개항’을 먼저 타결하고 장례절차를 협의하며, 장지는 광주 망월동으로 한다”는 2개항을 제시하고, 위로금은 그룹 회장 김우중의 재량에 맡기자는 전격적인 타협책을 제안했다. 그러나 26일 정부는 치안력과 행정력을 총동원해 외부 불순세력의 침투에 대해 발본색원하겠다는 강경방침을 고위 당정회의에서 결정했다. 국무총리 김정렬은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쟁의 진압과정에서 근로자 1명이 목숨을 잃은 것은 대단히 가슴 아프고 유감스럽지만, 외부세력이 개입하여 전통적인 장례절차를 무시하고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것은 영령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며 이념공세의 포문을 열었다.

26일부터 27일 새벽까지 진행된 교섭에서 노조와 회사는 양자가 제시한 중간선에서 임금인상액을 타결하는 등 모두 17개항에 합의했다. 이를 전해들은 조합원들은 “20일간의 투쟁을 기본급 5,000원 인상으로 바꿀 수 없다” “이석규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해명과 사과 한마디 없다”고 강력하게 반발하며 집행부를 성토했다. 그러나 노조 집행부는 재야인사들과 조합원들의 의견을 무시한 채 장례 준비를 서둘렀고 회장 김우중, 노조위원장 양동생, 유족의 3자면담에서 장지마저 남원으로 결정해버렸다. 흥분한 노동자들은 노조 사무실로 몰려가 거세게 항의하는 한편 뜯었던 영안실을 다시 봉해버렸다. 결국 노조 집행부는 장례식 당일인 28일 새벽 1시쯤 장지를 광주 망월동으로 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자 노조측의 결정에 불만을 품은 유족들은 장례식에 참석하지도 않고 남원으로 떠나버렸고, 경찰과 회사측은 사전에 계획된 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8월28일, 간간이 보슬비가 뿌려지는 날이었다. 오전 10시쯤, 영안실 문에 굳게 용접됐던 쇠막대가 지게차에 의해 뜯어졌다. 꽃상여를 앞세우고 대우조선 종합운동장까지 가는 동안 동료들은 내내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고, 노동자와 지역주민 등 2만여명의 애도 속에 드디어 영결식이 거행됐다. 부천서 성고문 사건의 권인숙이 ‘그대! 강철같이 살아나시라’고 조시를 낭독하자 대우조선 노동자들은 울음을 터뜨리며 “군부독재 타도하자!”는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오후 3시쯤, 회사버스 26대와 관광버스 2대 등에 분승한 1,500여명의 노동자들은 영구차를 앞세우고 망월동 묘지로 향했다.

영구행렬이 고성3거리에 도착했을 때였다. 갑자기 15t 덤프트럭이 튀어나와 도로를 막았다. 그와 동시에 주변 야산에 잠복해 있던 2,500여명의 전경과 백골단이 몰려나왔다. 이들은 노동자들을 무차별 구타하며 장례집행위원 등 재야인사들을 연행했다. 그리고 탈취한 시신을 싣고 유유히 남원으로 달려갔다. 장례 당일 저녁 6시를 기해 전국에서 개최될 예정이던 ‘고 이석규 민주노동열사 추모대회’도 5만여 경찰병력에 의해 원천봉쇄됐다. 정부는 추모제와 관련해 총 64명을 구속했으며, 이소선 등 10여명을 수배 조치했다. 노동자 대투쟁의 거센 물결이 전국을 강타하는 와중에서 변변한 반격의 실마리를 잡지 못하고 있던 정부는 이 사건을 기점으로 대대적인 탄압국면으로 전환했다.

대우조선 노동자들의 투쟁은 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위대함과 더불어 그 한계까지도 있는 그대로 드러냈다. 대투쟁 시기, 노동자들은 쌓이고 쌓인 분노를 터뜨리며 폭발적인 투쟁력을 보여주었으나 집단적 의사결정이나 조직적인 투쟁 경험이 없었던 까닭에 투쟁방향을 둘러싼 내부의 이견이나 여론조작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대우조선의 경우에도 생존권적 요구로 시작된 투쟁이 이석규의 죽음으로 질적인 변화를 맞이했으나 신생 노조의 취약한 지도력, 노조 지도부와 조합원의 괴리, 지원세력이나 장례문제를 둘러싼 여론조작 등에 올바로 대처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다가 정부의 강력한 탄압을 맞으며 동력을 소진하고 말았다.

- 기획·집필에 참여한 사람 -

유시춘(소설가) 이우재(자유기고가) 김남일(소설가) 정재돈(농민운동가) 한상봉(자유기고가) 김명인(문학평론가) 최민희(민언련 사무총장) 박노승(경향신문 논설위원) 문성현(" 미디어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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