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전사 시인’ 김남주

2005.02.16 17:13

[실록 민주화운동] 90. ‘전사 시인’ 김남주

김남주(1946~94). 그 스스로는 시인이기에 앞서 전사이기를 원했다. ‘자기 땅에서 유배당한 자’(프란츠 파농의 책 제목, 김남주 역)로서 혁명은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남조선민족해방전선에 가담했고, 재벌 회장 집의 높은 담장을 뛰어넘었고, 체포돼 15년 징역형을 받았고, 끝내는 혁명의 길에서 사망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그를 더도 덜도 아니고 꼭 이 땅에 이런 시인 하나쯤 있어야겠다는 바로 그 시인으로서 기억한다.

김남주는 전라남도 해남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십년 이십년 남의 집 부자집 머슴살이였다/ 나이 서른에 애꾸눈 각시 하나 얻었으되/ 그것은 보리 서말에 얹혀 떠맡긴 주인집 딸이었다”(시 ‘아버지’)

김남주는 공부를 잘했다. 그는 해남중학교를 나와 그해 유일하게 광주의 명문 광주일고에 들어간 학생이었다. 아버지는 그런 아들이 “어서 어서 커서/ 면서기 군서기가 되어주기를 바랬다/ 손에 흙 안 묻히고 뺑돌이 의자에 앉아/ 펜대만 까닥까닥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주기를 바랬다/ 그는 금판사가 되면 돈을 갈퀴질한다고 늘 부러워했다/ 금판사가 아니라 검판사라고 내가 고쳐 말해주면/ 끝내 고집을 꺾지 않고 금판사가 되면 골방에 금싸라기가 그득그득 쌓인다고 했다”(‘아버지’)

김남주는 아버지의 그런 기대를 저버린 불효자였다. 고등학교 재학 시절 그는 입시 위주의 교육에 반발, 스스로 학교를 그만둔다. 그는 검정고시를 거쳐 몇년 후인 69년 전남대 영문과에 들어갔다. 당시 정국은 박정희가 3선 개헌을 통해 장기집권을 획책하고 있어 매우 어수선했다. 동생 김덕종의 기억에 따르면 한번은 형이 눈덩이가 시커멓게 된 채로 집으로 내려온 적이 있었다. 알고 보니 교련 반대시위에 참가했다가 최루탄에 맞아서 그렇게 된 것이었다. 그때 이미 그의 길은 정해진 것이었다.

그는 아버지가 기대했던 것과는 정반대 길로 거침없이 달려갔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 글자 모른 사람들은 술이라도 몰래 해묵고 살 것디냐. 못 배운 집 나락은 어디 일등 수매해가더냐. 삼등 아니면 등외다”(산문 ‘나는 왜 남민전에 참가했는가’)라고 늘 신세 타령을 하던 아버지의, 그리고 아버지와 같은 민중의 삶 속으로 한 걸음 깊숙이 들어가는 길이었다.

72년 가을 그는 복학생 이강과 더불어 동학혁명 전적지를 탐방했다. 그리고 얼마 후 둘은 유신 반대 지하신문 ‘함성’을 제작·배포했다. 결국 그들은 반공법상 반국가단체 구성 예비음모 혐의로 끌려가 혹독한 고문 수사를 받았다.

“총구가 나의 머리숲을 헤치는 순간/ 나의 양심은 혀가 되었다/ 허공에서 헐떡거렸다 똥개가 되라면/ 기꺼이 똥개가 되어 당신의/ 똥구멍이라도 싹싹 핥아 주겠노라/ 혓바닥을 내밀었다/ 나의 싸움은 허리가 되었다 당신의/ 배꼽에서 구부러졌다 노예가 되라면/ 기꺼이 노예가 되겠노라 당신의/ 발밑에서 무릎을 꿇었다 나의/ 양심 나의 싸움은 미궁(迷宮)이 되어/ 심연으로 떨어졌다 삽살개가 되라면/ 기꺼이 삽살개가 되어 당신의/ 손이 되어 발가락이 되어 혀가 되어/ 삽살개 삼천만 마리의 충성으로/ 쓰다듬어 주고 비벼 주고 핥아 주겠노라/ 더 이상 나의 육신을 학대 말라고/ 하찮은 것이지만 육신은 나의/ 유일(唯一)의 확실성(確實性)이라고 나는/ 혓바닥을 내밀었다 나는/ 손발을 비볐다 나는”(시 ‘진혼가’)

김남주는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8개월 만에 석방됐다. 74년 김남주는 계간 창작과비평에 시 ‘진혼가’ 등 7편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그의 시를 뽑은 문학평론가 염무웅은 김남주의 시가 “칠흑 같은 어둡고 깊은 밤중의 잠 속에 빠져 있는 혼수 상태의 문단에 칼을 들이대는 섬뜩함으로 다가온다”고 평했다.

그러나 결코 문단에 안주하지 않았다. 그의 문학은 곧 싸움이었다. 75년에 김남주는 전남대 앞에 ‘카프카’라는 사회과학 전문서점을 냈다. 그곳은 광주 운동권의 총 집결지이자 문화 사랑방이었다. 77년에는 고향에서 해남농민회를 결성했고, 광주에서 황석영·최권행과 함께 민중문화연구소를 열기도 했다. 그후 상경해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에 가입, 전위대 ‘전사’로 활동한다. 79년 구속돼 이후 길고 긴 투옥생활을 시작한다. 감옥에서 그는 무수한 책을 읽고 생각하고 또 썼다.

“나는 지배계급의 억압과 착취에 시달리며 비인간적인 삶을 강요당하고 있는 근로대중들의 생활과 투쟁을 그린 문학작품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읽어봤다. 이런 작품을 쓴 사람들 중에서 특히 내가 동지적인 애정을 가지고 관심을 기울였던 시인들은 하이네, 브레히트, 아라공, 마야코프스키, 네루다 등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들이 나에게 준 위대한 교훈은 인류에게 유익하고 감동적인 작품을 쓰기 위해서는 작가 자신이 진실된 삶을 살아야 하고, 자기 시대의 중대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착취와 억압에 저항하는 불굴의 전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내가 전사라고 한 것은 꼭 무기를 들고 거리에 나서거나 산에 들어간다는 뜻만은 아니다.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의 형태에 관계없이 전사인 것이다.”(산문 ‘나는 이렇게 쓴다’)

감옥에 있는 동안, 그는 어느새 하나의 전설이 돼 있었다. 그가 감옥에서 우유곽에 못으로 긁어 쓴 시가 한편 두편 밖으로 흘러나왔고, 대학생들은 그의 시를 의식화 교재에 삽입해서 읽었으며, 노래패는 그의 시를 노래로 만들어냈다. 안치환이 부른 ‘노래’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자유’는 특히 유명하다.

“만인을 위해 내가 노력할 때/ 나는 자유이다/ 땀 흘려 힘껏 일하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싸울 때 나는 자유이다/ 피 흘려 함께 싸우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몸부림칠 때 나는 자유이다/ 피와 땀을 눈물을 나워 흘리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사람들은 맨날/ 밖으로는 자유여, 형제여, 동포여! 외쳐대면서도/ 안으로는 제 잇속만 차리고들 있으니/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무엇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제 자신을 속이고서”(시 ‘자유’)

88년 12월21일, 그는 9년 3개월여 만에 옥문을 나설 수 있었다. 그후 그는 여기저기 초청을 받아 다니면서 시를 읊고 강연을 했다. 그의 시 낭송은 성내운의 그것과 더불어 당대 최고라는 평을 받기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었다. 젊은 문인들은 소문으로만 듣던 그를 대개 처음 보는 셈이었다. 그러나 한번이라도 그를 만나본 뒤에는 마치 10년은 가깝게 지낸 것처럼 생각했다.

“내가 김남주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1992~93년 무렵이다. 서울 인사동의 어느 술집에서였다.… 후배들이 술 마시고 떠들던 모습을 한량없는 그윽한 눈길로 바라보던 기억. 한없이 푸근한 눈빛의 기억. 그 눈빛은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전사의 눈빛이 아니라 바로 햇빛 바른 고향집 마루에서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 동생들을 바라보는 큰오라비의 눈빛이었다.”(소설가 공선옥, ‘내가 만난 김남주’, 2000년)

그런 자리에서는 으레 노래를 청하게 마련이었는데, 김남주는 마지못한 듯 일어나서 18번을 불렀다. 남인수의 ‘고향의 그림자’. “찾아갈 곳은 못 되더라 내 고향 버리고 떠난 고향이길래 수박등 흐려진 선창가 전봇대에 기대서서 울 적에….”

지그시 눈을 감고 구슬피 노래를 부르던 시인. 그가 “오월 어느 날이었다/ 19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 광주 1980년 5월 어느 날 밤이었다”로 시작되는 ‘학살’을 썼고, “미군이 없으면/ 삼팔선이 터지나요/ 삼팔선이 터지면/ 대창에 찔린 깨구락지처럼/ 든든하던 부자들 배도 터지나요”(‘다 쓴 시’)를 썼으며, “나는 이제 쓰리라/ 인간의 눈이 닿는 모든 사물 위에/ 조국은 하나다라고”(‘조국은 하나다’)를 쓴 바로 그 시인이었다.

그리고 그는 죽었다. 죽어서 광주 망월동 묘역에 묻혔다.

세월이 살같이 흘러 21세기 어느 날, 미국이 벌인 지난 세기의 가장 야만적인 전쟁을 견뎌낸 베트남의 해방전사 출신 한 시인이 그를 찾았다. 그는 절을 하고 나서 한편의 시를 바쳤다.

“사람들이 당신은 돌산처럼 강하다 했다/ 나는 믿지 않는다/ 돌산도 석회처럼 구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당신은 강철이라 했다/ 나는 믿지 않는다/ 강철도 갈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당신을 정신이라고 이상(理想)이라고 말할 때/ 그것을, 나는 믿는다./ 정신은 불이 붙어도 타지 않고/ 단단한 도끼날 앞에서도 휘어지지 않는다.”(반레, ‘시인 김남주를 생각하며’)

김남주는 이미 국경을 뛰어넘어 자유를 사랑하고 역사의 진보를 믿는 이들의 영원한 벗이 되어 있는 것이다.

◇ 기획·집필에 참여한 사람-

유시춘(소설가) 이우재(자유기고가) 김남일(소설가) 정재돈(농민운동가) 한상봉(자유기고가) 김명인(문학평론가) 최민희(민언련 사무총장) 박노승(경향신문 논설위원) 문성현(" 미디어부 기자)

◇ 독자제보를 기다립니다-

경향신문 미디어부(02-3701-1156~8)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02-3709-7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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