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당쟁과 탕평책

2005.02.23 17:14

조선 후기의 정치사는 당쟁이란 이름으로 서술해야 할 정도였다. 곧 당쟁은 정치의 중심과제가 되어 끊임없이 논쟁을 벌이고 때로는 살육을 불러왔던 것이다. 그 원인을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겠다. 첫째는 군자당(君子黨)과 소인당(小人黨)의 구분이었다. 정치집단으로서 군자는 군자끼리 모이고 소인은 소인끼리 모이므로 인간 자질에 따라 구분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네가 속한 집단을 군자, 상대 집단을 소인으로 몰아붙였다.

다음은 정치적 이권을 차지하기 위한 투쟁으로 보았다. 벼슬자리는 한정되어 있고 지망자가 많아 서로 차지하려고 피나는 투쟁을 벌인 탓으로 당쟁이 유발되고 집단을 이루어 지속된다는 것이다. 대체로 이 두 가지 원인에 따라 당쟁이 몇 백년 동안 전개되었고 고질이 되어 쉽사리 치유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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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슬길 오르면 자연스레 당파가담-

당쟁은 관료사회에서만 진행된 것이 아니었다. 예비 관료집단인 사림에게로 번져나갔다. 이런 현상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과정이 되었다. 이른바 선비들은 스승이나 선배의 당색(黨色)에 따라 자신의 색깔을 규정지었다. 우리 스승이 어느 당파이니 나도 그 당파에 속해야 하는 것이 의리를 지키는 것으로 여겼다. 그리하여 사림이 모이는 곳인 서원은 당쟁의 소굴이 되었다. 또 서원 출신의 선비들이 과거에 합격해 성균관에 들게 되면 다시 당색을 가른다. 성균관 유생들이 정작 벼슬을 받으면 자연스레 특정 당파에 가담하는 것이다.

이런 관료사회의 분위기는 또 문중으로 파고들었다. 위 고을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이씨와 아래 고을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김씨들은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져 평소에도 대화를 나누지도 않고, 심한 경우 길가에서 만나도 인사를 하지도 않았다. 이들은 서로 혼맥(婚脈)을 끊었으며 조상이 당쟁에 연루되어 피해라도 입었으면 원수 사이가 되었다. 때로는 한 문중이라도 당색을 달리했으며 한 형제가 갈라지는 경우도 있었다.

당쟁은 가정생활에도 파급되었다. 의복, 호칭, 제사의 격식과 절차를 당색에 따라 달리했다. 노론은 옷깃을 길게, 소론은 옷깃을 짧게 했으며 며느리가 시아버지를 부르는 호칭에 있어서도 노론은 영감이나 마님, 남인이나 소론은 아버님, 어머님으로 불렀다. 제수를 차리는 절차나 제문의 문구도 달리했다. 그러므로 길가에서도 그 걸음걸이나 차림이나 말소리만 들어도 당색을 구분할 수 있을 지경이었다.

흔히 당쟁은 조선시대의 파벌을 조성하고 분열을 가져와 국력을 끊임없이 소모했다고 보기도 하고 서로 감시하고 견제하여 붕당정치를 이룩했다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현실개혁을 도모한 많은 실학자들은 당쟁의 피해를 끊임없이 제기했다. 당쟁을 가장 강력하게 타파하려 한 군주는 영조였다. 영조는 당쟁으로 왕권이 약화되고 인재 등용의 방해를 받고 사회가 유리된다고 보았다. 당쟁이 정치를 지배하는 풍토에서는 임금은 한낱 조연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탕평정책을 폈다. 탕평은, 왕도는 넓은 바다의 물결처럼 골고루 스며들어 치우침이 없음을 나타낸 용어이다. 따라서 그 요체는 문벌이나 당파를 떠나 고른 인재등용에 있었다. 곧 적재적소에 인재를 배치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벼슬자리는 문벌의 독점을 막고 지역차별도 함께 해소되는 결과를 얻게 된다. 영조는 모든 기록에서 노론, 소론, 남인, 북인 따위 용어를 일절 쓰지 못하게 했다. 그리하여 그 성향에 따라 준론(峻論)·완론(緩論), 탁류(濁流)·청류(淸流) 따위의 용어가 쓰여졌다.

탕평정책이 추진되었을 때 가장 반대논쟁을 벌인 계열은 독점적 지위를 오래 누린 노론이었다. 그들은 군자(선)와 소인(악)을 확실하게 구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탕평정책은 색깔의 기본인 흑백과 맛의 기본인 함감(鹹甘·짠 맛과 단 맛)을 빼고 잡탕으로 만들었다고 떠들었다.

노론들은 이런 말을 조직적으로 퍼뜨려 탕평정책에 반기를 들었다. 기득권을 계속 누리려는 술수였다. 흔히 당파를 색깔로 비유하여 당색이라고도 불렀고, 색목(色目)이라고도 했다. 그야말로 색깔을 없애는 것이 탕평의 지름길이었던 것이다.

영조의 의지는 강렬했다. 영조는 그 실효를 거두려 1772년 탕평과라는 이름의 과거시험을 보여 11명의 급제자를 뽑았다. 그는 급제자의 답안지를 일일이 살펴보았다. 실직을 임용할 때에도 문벌보다 지역출신을 안배하려 했다. 또 탕평비를 곳곳에 세우고 탕평채라는 음식을 만들어 먹게 할 정도로 강력한 의지를 천명했다. 영조의 탕평정책은 불완전하나마 상당한 성과를 거뒀고, 마지막 과제를 정조에게 넘겨주었다.

-정조사후에 문벌정치 새로 등장-

정조는 임금이 된 뒤 조정에서 신하들이 쓰고 있는 복건 만듦새가 당색에 따라 다름을 보고 새삼 놀랐다. 그는 채제공 정약용 등 남인들을 불러 복건의 만듦새를 노론의 것과 같게 만들어 쓰게 했다. 이들 남인의 복건이 통일되면 다른 남인들도 따를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그 예상은 빗나갔다. 정조는 자신의 분부마저 거역하는 풍토를 보고 그 심각성을 알아차렸다.

그도 초기에는 당색과 문벌을 타파하고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려 규장각을 설치하고 초계문신(抄啓文臣, 문신의 자질향상)의 제도를 두어 친위세력을 키웠다. 정조는 그런 속에서도 남인을 정치의 전면에 내세웠다. 하지만 강력한 도전을 연달아 받은 끝에 말기에는 문벌을 인정하는 수준으로 조정했다. 탕평정책이 후퇴한 꼴이 되었다.

-‘기득권 세력 자기방어’ 당쟁 잔재-

정조가 죽은 뒤, 당색의 중심세력이었던 이른바 안동 김씨, 여흥 민씨 따위 문벌정치가 새로이 등장했다. 문벌정치는 붕당정치의 변종이었다. 문벌정치는 독점적 권력을 누리고 모든 이권을 거머쥐어 말기의 정치를 파행으로 이끌었다. 그 중간에 흥선대원군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문벌과 당색을 해소하려 여러 조치를 취했으나 새로운 세력으로 전주 이씨를 등장시킨 탓으로 결국 실패로 끝났다.

고종은 노론계열인 여흥 민씨들에게 업혀 지내면서 늘 “나는 노론이다”라고 뇌까렸다. 그는 노론을 무시하고는 정치를 펼칠 수도 없었고 신변을 보장받을 수도 없었던 것이다. 결국 정조가 죽은 지 100년 동안 당색은 다시 나라를 구렁텅이로 몰아넣었고 마지막 집권세력인 노론계열이 주도하여 나라를 일제에 팔아 넘겼다.

당쟁은 부정적 요소를 너무나 많이 안고 있었다. 그들은 행위의 ‘룰’과 정치적 윤리가 없어서 민주정치의 토대를 마련치 못하고 폐단만을 남겨주었다. 오늘날 그 이름은 일단 사라졌으나 그 잔재는 여전히 남아 있다고 하겠다. 비록 오늘날 대의제 정당정치의 구조 아래에서도 절차의 ‘룰’이 곧잘 무시되고 반대를 위한 반대를 일삼고 있는 모습을 본다. 기득권 세력의 완강한 자기방어는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런 것이 당쟁의 잔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시리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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