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통일의 꽃’ 임수경

2005.03.02 17:15

[실록 민주화운동] 92.  ‘통일의 꽃’ 임수경

이 축전은 2차대전 직후 항구적 세계 평화를 도모한다는 취지에서 영국 런던에서 열린 ‘국제청년학생회의’로부터 시작된 행사다. 체코·동독·루마니아 등 동구권 사회주의 나라와 핀란드·오스트리아 등 중립국들이 축전을 이미 개최했으며 85년 모스크바 축전에 이르러서는 157개국 2만여명이 참석한 국제적 행사로 성장했다. 제13차 축전은 7월1일부터 8일까지 평양에서 개최될 예정이었다.

문익환의 방북을 용공으로 매도하면서 관제언론을 통한 대대적인 공안몰이에 나선 정부의 기세 앞에 전대협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그러나 통일운동으로 일대 방향을 전환한 전대협으로서는 운동의 동력을 지속적으로 끌어내려면 정부의 탄압을 뚫고 평양축전 참가를 결행해야 할 입장이었다.

전대협 의장 임종석(현 열린우리당 의원)은 남쪽의 ‘평균적 대학생’을 물색한 끝에 전대협 산하 평양축전준비위원회에서 활동중인 한국외국어대 불어과 4학년 임수경을 찾아냈다. 그녀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학생운동과 관련해 구속된 전력이 없는데다 여권을 가지고 있어 언제라도 출국하는데 문제가 없었다.

6월21일, 임수경은 가족들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집을 나섰다. 도쿄·베를린·베이징 등으로 비행기를 바꿔타며 지구를 한바퀴 돌아 열흘만인 6월30일 평양에 도착했다. 지친 임수경을 맞이한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북한 동포들의 뜨거운 환영이었다. 공항에서 호텔로 가는 연도에 수십만 인파가 모여들어 그녀를 열렬히 환영했다. 차는 인파에 막혀 자주 멈췄다. 임수경은 그녀의 손을 잡아보려는 사람들에게 떼밀리기 일쑤였다. 악수 세례에 임수경의 손은 퉁퉁 부어올랐다.

평화와 친선, 반제 연대성을 내세운 평양축전은 북한이 서울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염두에 둔 듯 세계 각국에서 2만여명을 초청해 치른 해방 후 최대 규모의 국제행사였다. 재미 한국교포 200여명도 참가해 성조기를 휘날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 축전이 진행되는 내내 최대 주인공은 단연 임수경이었다. 그녀는 축전 장소뿐만 아니라 어디서든 자유롭고 당당한 행보로 자신이 평양에 온 이유를 말했다.

“핵무기 없는 조국에서 살고 싶다. 외국 군대 없는 나라에서 살고 싶다.”

맑고 해사한 얼굴에 거침없는 언동으로 ‘하나된 조국’을 외치는 남한의 여학생. 북한 주민들은 임수경에 매료됐다. 가는 곳곳마다 그녀의 얼굴을 보기 위해, 손을 한번 잡아보기 위해 몰려드는 인파에 승용차가 찌그러들고 경계선이 자주 무너졌다. 악수 세례로 인해 붕대를 동여맨 손은 계속 부어올랐다. 축전 폐막일, 임수경은 남측 전대협 대표 자격으로 북한 학생위원회 위원장과 함께 ‘남북청년학생 공동선언문’을 채택한다. ‘하나의 조국, 하나의 민족이 타의에 의해 겪어온 45년의 분열은 민족 비극의 45년이었다’로 시작되는 선언문 낭독이 끝나자 외국인 참가자들은 일제히 ‘Korea is one’을 외쳤다. 그 함성은 무더웠던 여름 그날을 더욱 뜨겁게 달구었다.

축전이 폐막된 이후에도 북한에 머물던 임수경은 6·25 참전국 16개국을 포함해 5대륙 30여개국에서 온 평화운동가 300여명과 함께 20일부터 1주일간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국제평화대행진’에 오른다. 백두산에서 판문점에 이르는 행진에 참여하기 위해 백두산 삼지연공항에 도착했을 때에는 수많은 주민들이 몰려나와 울부짖으며 ‘조국 통일’을 외쳤다. 호주 상원의원 조 발렌타인의 연대사, 룩셈부르크 녹색당 대표 샬러의 연설에 이어 임수경의 출정선언에 이르자 백두산 천지가 짙은 구름과 세찬 바람을 헤치면서 웅장하고 신비한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출정식 끝 순서인 ‘우리의 소원은 통일’ 합창이 끝난 뒤 대형 플래카드에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크게 쓴 후 참가자 전원의 서명을 받았다. 이 플래카드는 이후 대행진 여정의 선봉이 됐다.

평양공항에서 개선문을 지나 평양 군중대회장으로 가는 연도는 평양 시민들이 벌이는 눈물과 함성의 바다였다. 대회장 안은 화려한 카드섹션이 펼쳐지는 가운데 좌석을 메운 10만 군중이 ‘조국 통일’을 우렁차게 외쳤다.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평양시 외곽을 돌다가 행진대는 사리원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으나 환송 인파에 막혀 자주 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안전원의 설명에 따르면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이산가족이 많아 주민들의 열광도 더 높아진다는 것이었다.

25일 개성에 도착했지만, 혹시 환영 인파로 인해 안전사고가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제기되면서 행진 계획을 일시 중단한 채 이틀간 그곳에 머물렀다. 27일 아침, 개성의 선죽교를 지나 시가지를 도보행진할 때 임수경은 건물 꼭대기와 남대문 위까지 주민들이 새까맣게 올라붙어 손을 흔들고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았다. 판문점 전방 1㎞부터는 어느덧 시위성 행진으로 변했다. “Korea is one.” “조국은 하나다.” 구호 소리가 드높아지면서 행진대의 사기는 충천했다.

그날 오후 1시. 통일각 앞마당에 도착한 행진대는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한 국제평화대회’를 열었다. 6·25 참전 16개국 대표들이 공동성명서를 채택한 데 이어 마지막 순서로 임수경의 고별 연설이 있을 차례였다. 이 때였다. 남쪽의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을 대표해 임수경과 함께 판문점을 통해 남쪽으로 귀환하기 위해 신부 문규현이 도착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문규현은 75년 사제 서품을 받은 뒤 미국으로 건너가 활동한 미 영주권 소지자였다. 그는 두달 전에 이미 북한을 방문해 평양 장충성당에서 통일염원 미사를 봉헌했으며 당시 필리핀 소재 아시아주교협의회 사무총장으로 부임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어려움에 처한 사람과 더불어 있어야 한다는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사목적 결정에 따라 문규현은 임수경을 ‘보호’해 무사 귀환시키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는 베이징에서 화물기를 타고 평양을 거쳐 판문점으로 달려왔다.

임수경은 어둠 속에서 한줄기 빛을 발견한 듯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는 분단독재의 상징이자 한민족 고통의 진원지인 판문점, 그 군사분계점을 가로질러 기어코 서울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더욱 굳혔다. 그러나 그 귀환은 정전협정 당사자인 북한·중국과 유엔의 허가를 얻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유엔측이 이를 허용할 리 만무했다. 그녀는 참석자 100여명과 함께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임수경이 8월15일 판문점 통과 강행을 선언하자 이 문제를 두고 군사정전위가 소집됐으나 역시 불허 결정이 내려졌다. 그러나 그녀는 한발도 물러서지 않았다.

마침내 광복절인 15일 오후 2시20분. 태극기를 몸에 두른 임수경과 문규현은 손을 꼭 붙잡은 채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평양으로 가는 길은 열흘이 걸렸지만 돌아오는 길은 너무 짧았다. 단 몇 초만에 두 사람은 반세기 분단의 장벽을 통과했다.

그들은 분단 이후 판문점을 통해 북에서 남으로 넘어온 최초의 민간인으로 기록됐다.

분단선을 넘는 그 순간, 임수경과 문규현은 곧바로 체포된다. 이후 두 사람은 반국가단체의 지령 수수, 잠입 탈출, 찬양고무 혐의 등이 적용돼 수많은 민주화운동가들을 옭아맨 바로 그 국가보안법으로 각각 징역 5년형이 확정돼 복역하다가 92년 말 가석방으로 풀려난다.

여리디 여린 한 여학생이 분단의 장벽을 넘은 이후, 북한도 생활 곳곳에서 변화의 격랑을 맞았다. 축전 내내 임수경이 입고 다닌 티셔츠가 큰 인기를 끌면서 이른바 ‘임수경 패션’이 대유행했다. 북한 주민들은 북한 전역에 방영된 임수경의 집 내부를 지켜보면서 권력에 저항하는 인민의 집에 컴퓨터와 기름진 음식이 있는 데 경악했다. 그들은 임수경을 주저없이 ‘통일의 꽃’으로 불렀다. 분단의 얼음벽은 이미 그곳에서도 서서히 녹기 시작한 것이다.

-기획·집필에 참여한 사람-

유시춘(소설가) 이우재(자유기고가) 김남일(소설가) 정재돈(농민운동가) 한상봉(자유기고가) 김명인(문학평론가) 최민희(민언련 사무총장) 박노승(경향신문 논설위원) 문성현(" 미디어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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