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전교조 출범

2005.03.16 16:32

[실록 민주화운동] 94. 전교조 출범

1960년 4·19 혁명과 더불어 전국의 교사들이 교원노조 운동을 전개했다. 5월 결성대회 이후 전국의 지부가 왕성하게 조직돼 61년 초에는 조합원 4만명으로 노조 가입률이 50%를 넘어설 만큼 열띤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5·16 쿠데타로 자주적인 교사운동단체는 다른 사회운동단체와 마찬가지로 초토화되고 간부들은 대부분 용공 혐의로 투옥당한다. 민주화의 토대가 허약한 사회구조 속에서는 교육운동 또한 독자적으로 존립하기가 힘들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확인시켜 주는 것이었다. 이후 군사정부는 학원 내에 반공·군사교육 체제를 구축하면서 초등학교에서 대학까지, 나아가 사회교육 전반에 걸쳐 국가통제를 더욱 강화했다. 80년 5공 정권은 이러한 교육 위기상황에서 근본적인 대책을 제시하기는커녕 비민주성을 그대로 답습하면서 통치기반을 다지기 위한 단기 처방에만 골몰했다. 빈약한 교육 재정, 열악한 교사 처우 등으로 학교는 권위와 불합리, 부패가 만연하는 반교육적 상태에 내몰렸다.

하지만 이곳 동토의 교육현장에서도 새로운 희망은 이미 싹트고 있었다. 5공 정권의 폭압통치 아래에서 야학과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신진 그룹들이 대거 교단으로 이동하면서 학교 교육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치기 위한 실천적인 모습을 갖춰나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학교별·지역별·교과별 소모임이 전국적으로 활발히 이루어졌다. 서울·부산·광주·춘천의 교사들이 오랜 준비끝에 86년 5월10일 마침내 ‘교육민주화선언’을 발표했다. 그들은 교육의 정치적 중립, 교사의 교육권 보장, 교육행정의 자율화, 자주적 교원단체 결성 및 활동의 자유 보장, 보충 자율학습 폐지 등을 요구했다. 전국의 교사들이 이 선언을 잇따라 지지하고 나서자 문교부는 선언 주동자들을 파면하는 등 강경 대응에 나섰으나 이는 오히려 교사와 학부모들의 거센 반발만 불러왔다.

민주적 개헌을 요구하는 국민의 열기를 무시한 전두환의 4·13 호헌조치로 인해 일선 학교가 국민 여론과는 달리 집권세력의 호위병으로 전락하는 것을 목도한 교사들은 ‘정치민주화 없이는 교육민주화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체득한다. 곧이은 6월 민주항쟁에 참여하고, 7~9월 노동자 대투쟁을 지켜보면서 교사들은 보다 공개적이고 합법적인 전국적 교사단체 건설에 대한 제안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6월항쟁 이전까지 주로 선진적 소수를 중심으로 움직이던 교사운동은 항쟁 이후에는 각 학교 단위로 교사들의 대중조직인 평교사협의회를 결성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YMCA 교육자협의회 전국조직을 주축으로 교사들은 방학 중에 열띤 토론을 거쳐 87년 9월27일 ‘민주교육추진 전국교사협의회’(전교협)를 창립하기에 이른다. 이들은 창립선언문을 통해 민족·민주·인간화 교육의 이념을 선포하고 교사들의 자주적 단결을 주창했다.

전교협은 전국 15개 시·도와 130여개 시·군·구, 600여개의 학교에서 3만여명의 평교사 회원 조직으로 발전해 나갔다. 이들은 교육관계법의 독소 조항 개정운동을 주요 사업으로 내걸고 4만여 교사의 서명을 받은 교육법 개정안을 국회에 청원했다. 또한 사학의 해묵은 족벌 비리에 공동 대처하기 위해 사학 연대조직을 다졌다. 더불어 ‘교과연합모임’ 소속 4,000여명의 회원들이 교과서 내용을 분석·비판하는 연구사업을 벌여 ‘통일을 여는 국어교육’ ‘민족민주교육을 위한 개편 교과서 지침서’를 출간하는 등 자주적인 교과서 개편 활동을 벌여나갔다.

88년 11월20일 여의도 광장에서 ‘참교육 실천을 위한 전국 교사대회’가 열렸다. 전국 14개 시·도에서 상경한 1만여 참가 교사들은 전교협이 이미 교사들의 자주적 단체로서 위상을 확고히 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임의단체에 불과한 전교협은 교육악법 개정투쟁을 힘있게 벌이거나 개별 학교 차원에서 부당하게 겪는 교권침해 등에 대처하는 데 한계를 드러냈다. 교육민주화를 열망하는 일부 교사들을 뛰어넘어 교사 전체의 권익을 옹호하는 권익 실현단체로서 질적인 전환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민주화운동 세력의 괄목할 진출에 긴장한 노태우 정권이 때마침 대선 공약이었던 중간평가를 유보하고, 문익환의 방북을 빌미삼아 일대 공안정국을 조성하는 상황에서, 전교협은 이에 적극 대응해야 할 책무를 마주하고 있던 즈음이었다. 전교협은 거듭된 토론 끝에 법적으로 보장된 교섭권을 행사하고, 교사들의 광범위한 자발적 참여를 끌어내기 위해서는 전국 단일노조의 형태를 갖는 것이 절대적으로 유리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마침내 89년 5월28일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이 연세대에서 결성식을 가졌다. 연세대에 모인 전국 1,500여명의 교사들은 ‘전교조 깃발 아래 참교육 쟁취하자’는 구호 아래 출범의 함성을 울릴 수 있었다. 이들은 한달여 만에 130개 지회, 600여개 분회, 2만 회원을 확보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교사들의 자주적인 대중조직으로 우뚝 서게 됐다. 4·19와 함께 조직된 교원노조가 5·16 쿠데타로 해체된 이후 28년 만의 일이었다.

그러나 이후 전교조 합법화까지 이르는 기나긴 고행이 이들 앞에 놓여 있었다. 무엇보다 먼저 구속과 대량 해직 등 정부의 물리적 탄압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참교육’ 이름 아래 뭉친 체제 도전세력의 의식화 교육을 궤멸시켜야 한다는 조작된 여론을 만들면서 강경 봉쇄로 일관하는 정부에 맞서 전교조를 지지하는 학부모 모임, 고등학생 대표자협의회 등이 새롭게 탄생했다.

정부가 전교조를 단순히 교사들의 문제가 아닌, 6공의 법질서 체계를 뒤흔들려는 민주화운동의 진앙지로 본 것은 철도·체신노조의 단체행동권 요구, 공무원들의 노조 결성 움직임에 결코 밀려날 수 없다는 인식과 궤를 같이한 것이었다.

정부가 불온시한 전교조의 참교육이란 무엇인가. 이 말을 최초로 사용한 이는 78년 ‘우리의 교육지표’를 선언한 연세대 해직교수 성내운 등이다. ‘국민교육헌장’의 비민주성을 일제의 교육칙어에 비유한 성내운은 “물질보다 사람을 존중하고, 진실을 가르치고 배우는 교육을 위하여 학원이 민주화되고 인간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86년 6월 ‘충청 교육민주화선언’ 교사들이 “민족의 미래를 결정짓는 교육의 중요성을 절감해온 우리 교사들은 참담한 교육현실 속에서 침묵을 반성하고 교육자적 양심에 따라 참교육에로의 지향”을 선언했다. 이로부터 참교육은 교사운동의 이념과 방향으로 자리잡게 된다. 비민주적 학교 조직, 국가의 교육 독점, 궁핍한 교육 재정과 학습조건, 권위적 관료행정 등을 개선하고 이를 위해 교사와 학생, 학부모가 교육 주체로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 핵심 내용이다.

‘진정한 인간화 교육, 나라의 참된 해방을 위한 교육, 이 땅의 아픔을 함께 하는 민주적인 민족교육’을 성취하기 위한 전교조는 ‘민주시민으로 성장해야 할 학생들에게 교원 스스로 민주주의의 실천의 본을 보일 수 있는 최선의 교실’이 되고자 했다. 그래서 전교조 소속 1,500여 교사는 전교조 탈퇴 대신 강제해직이라는 수난의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또 너희들 곁을 떠나는구나/ 비바람 속에서도 다시 피던 봉숭아 잎이 안개비에 젖고/ 뒤뜰에 열 지어선 해바라기들도 모두 고개를 꺾었구나/ 세월의 한 구비가 이렇게 파도칠 때마다/ 다 못나눈 정만 흥건히 담아둔 채 어린 너희들의 가슴에 잔물지는 아픔을 심는구나/ 우리 꼭 다시 만나자/ 이 짧은 세상에 영원히 같이 사는 사람은 없지만/ 너희들이 자라고 내가 늙어서라도 고맙게 자란 너희들 손을 기쁨으로 잡으며/ 이 땅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함께 일하는 사람으로/ 하나 되어 다시 만나자.” (도종환, ‘지금 비록 너희곁을 떠나지만’)

교단에서 쫓겨난 교사 시인 도종환의 시처럼 ‘다시 만날 때’까지 전교조는 오랜 시간과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 기획·집필에 참여한 사람 -

유시춘(소설가) 이우재(자유기고가) 김남일(소설가) 정재돈(농민운동가) 한상봉(자유기고가) 김명인(문학평론가) 최민희(민언련 사무총장) 박노승(경향신문 논설위원) 문성현(" 산업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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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미디어부(02-3701-1156~8)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02-3709-7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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