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이태영과 가족법 개정운동

2005.03.30 16:54

2005 년 3월2일 국회 본회의의 의결로, 남녀차별의 상징이었던 호주제가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여성운동계가 반세기에 걸쳐 펼쳐온 가족법 개정 투쟁이 대미(大尾)를 장식하면서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오랜 역사를 통해 유지·강화된, 그리고 효율적인 식민통치를 위해 일제에 의해 법률로 더욱 고착된 대표적인 가부장제가 21세기 정보사회에 이르러서야 폐기된 것이다. 호주제가 폐지됨에 따라 이제 여성들은 ‘시집을 가는’ 것이 아니라 ‘결혼을 하게’ 됐으며, 대물림을 위해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강박의무로부터도 벗어났다. 한국은 적어도 법률상으로는 양성평등 사회로 전환한 셈이다.

[실록 민주화운동] 96. 이태영과 가족법 개정운동

여성에 대한 각종 억압과 차별은 이 땅 한반도에 수천년 동안 내려온 관습이었다. 해방과 함께 민주공화국으로 새로 태어났다는 대한민국의 법률에도 이런 관습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태영은 가정법률상담소를 터전삼아 법률상의 남녀 불평등을 철폐하는 일에 앞장섰다. 상담소와 가족법 개정운동은 그가 존재할 수 있는 기반이었다.

1914년 평안북도 운산, 기차를 타려면 사흘 산길을 걸어야 했던 산골 오지에서 이태영은 태어났다. 36년 이화여전을 졸업한 뒤 교사 생활을 하던 중 평양의 한 교회에서 일생의 반려자이자 동지인 정일형을 만나 결혼한다. 일제시대 독립운동을 하던 남편의 옥바라지와 홀로 된 시어머니 부양 등으로 간난신고의 세월을 보낸 이태영은, 부인의 남다른 재능을 안타깝게 여긴 정일형의 권유로 해방 이듬해인 46년 만학의 나이인 32세에 여성으로는 최초로 서울대 법대에 입학한다. 그는 그때 이미 네 아이의 엄마였다.

이태영은 6년 뒤인 52년 역시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했다. 그러나 대통령 이승만은 그가 야당 인사의 아내라는 이유로 판사 임용을 거부했다. 법원과 검찰에서 함께 실무 수습을 하던 동기생들은 모두 판사나 검사로 임용됐으나, 그만 유독 그 대상에서 빠진 채 한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가 되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이 땅의 가난한 이웃들을 돌보라는 하늘의 배려였을까. 이 일을 계기로 이태영은 불우한 여성들과 소외받은 이웃들을 위한 본격적인 삶을 시작하게 된다. 그가 평생을 두고 추진해 온 가족법 개정운동을 시작하는 것도 이때부터다.

“그런 남편의 아름다운 아내였다/ 그런 남편을 넘어서는 예지의 아내였다/…// 서대문 독립문시장에서 포목전을 차려/ 평양까지 오가며 옥바라지했다/ 그러다가 해방 이래/ 늦은 법학 전공으로 가장 먼저/ 여자 법학박사가 되었다// 학대받는 여성/ 소외의 여성/ 불우한 여성을 돕기 위하여/ 법대학장 따위 버리고 나서/ 일생의 후반 다 바쳤다// 이 나라의 수많은 여성이/ 그를 따랐다/ 아니 이 나라 수많은 남성까지도 그를 따랐다/ 너무 아름다워/ 위엄 가득하지만/ 언제나 몽당치마 아래 단정한 두 발이었다 낡은 구두.”(고은, ‘만인보’ 중 ‘이태영’)

한국 여성운동계가 맞닥뜨린 가족법 개정운동은 신난의 역사 그 자체였다. 서구에서 여성에게 처음 참정권이 주어진 것이 겨우 1910년이고 보면, 사실 광복과 함께 신생공화국 대한민국 헌법이 양성의 평등이념을 채택한 것은 어쩌면 경이로운 일이었다. ‘혼인은 남녀 동권을 기본으로 하며 혼인의 순결과 가족의 건강은 국가의 특별한 보호를 받는다.’(제정 헌법 20조)

그러나 이는 단지 법전 속에 잠들어 있는 미사여구에 불과했다. 한국 여성들은 연령과 계층의 구분없이 사회적 지위가 형편없이 열악했다. 우선 법적 지위가 이를 입증했다. 차별적인 친권 행사, 아내와 딸에게 불리한 재산 상속제도, 불평등한 친족 범위, 시대착오적인 호주제도 등 민법 중 가족법의 여러 조항은 남녀 동권을 규정한 헌법가치를 정면으로 위배했다. 사회적 노동에 참여하는 여성 노동자에 대한 차별대우, 차별임금도 당연시됐다.

여성 대중이 현실에서 당하고 있는 억압과 고통에 가장 먼저 각성한 이들은 일부 여성 지식인들이었다. 이들은 이태영의 주도로 1957년 설립된 가정법률상담소를 중심으로 가족법 개정운동에 나섰다. 처음에는 입법부의 시혜를 바라는 청원서와 호소문, 진정서를 제출하는 형태로 진행됐다.

당시 여성문제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처참할 정도였다. 사법사상 가장 두루 존경을 받았다는 대법원장 김병로가 가족법 개정안을 들고 찾아간 이태영 등 여성 대표들에게 내뱉었다는 다음과 같은 말은 당시 한국 지식인 남성들의 의식수준을 대변한다. “천오백만 여성들이 불평 한 마디 없이 다 잘 살고 있는데, 법률줄이나 배웠다고 건방지게 법을 고치라고 나서다니!” 여성 대표들은 눈물을 쏟으며 물러나올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국민 계몽을 위한 강연, 해설 책자 발간, 토론회, 지도자 양성, 가두 캠페인, 대중강좌 개설 등 꾸준한 운동의 결과 50년대 이후 70년대까지 가족법은 세차례(58년, 62년, 77년)에 걸쳐 개정됐다. 80년대 들어 가족법 개정운동은 질적인 비약을 이루었다. 우선 참여단체가 80여개로 늘어나면서 운동의 주체가 확고해졌다. 운동의 방법 또한 시혜를 청원하는 호소의 차원을 넘어 조직의 단결된 힘을 바탕으로 하는 사회운동으로 발전·강화됐다. 가정법률상담소도 회관 입구에 상시적인 서명운동 체제를 갖추었다.

[실록 민주화운동] 96. 이태영과 가족법 개정운동

84년 정치적으로는 엄혹한 탄압국면이 지속됐지만, 모든 여성단체들이 여성의 평등한 법적 지위를 쟁취하기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이들은 ‘가족법개정여성연합회’를 결성, 전국에서 일제히 가두서명을 벌였다. 그러나 당시 11대 국회는 서명의원 20명을 확보하지 못해 가족법 개정안조차 제출할 수 없었다. 여성들의 정치적 기반은 그토록 취약했다.

가족법 개정운동이 사회운동, 인권운동으로서 질적인 변화와 동력을 갖기 시작한 것은 ‘한국여성단체연합’(여연) 산하 30여개 회원 단체들이 동반세력을 구축하면서부터이다. 이들은 대부분 여성운동의 틀 안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운동 전체의 발전과 함께 호흡하며 민주화운동 일선에서 정치적 역량을 배양한 집단들이었다. 여성운동에서도 한국 민주화운동의 늦은 결실을 보고 있었던 셈이다.

87년 6·29 선언 이후 이루어진 9차 개헌(10월29일)에서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에 의하여 차별받지 아니한다(제11조)’는 조항이 신설됐다. 88년 여소야대인 13대 국회에는 박영숙 등 여성 의원들의 주도로 153명의 의원이 서명한 가족법 개정안이 제출된다. 이 법안은 89년 12월 정기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된다. 호주의 권리의무 대폭 축소, 친족 범위 조정, 이혼여성의 재산분할 청구권 신설 등이 이때 이루어졌다. 이로써 호주제를 제외한 대부분의 불평등 조항은 해소됐다. 그러나 가족법에 남아 있는 마지막 차별제도인 호주제가 폐지되기까지는 이때로부터도 15년 이상의 길고도 긴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기획·집필에 참여한 사람유시춘(소설가) 이우재(자유기고가) 김남일(소설가) 정재돈(농민운동가) 한상봉(자유기고가) 김명인(문학평론가) 최민희(민언련 사무총장) 박노승(경향신문 논설위원) 문성현(" 산업부 기자)

- 독자제보를 기다립니다 -

경향신문 미디어부(02-3701-1156~8)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02-3709-7614)

- 기획·집필에 참여한 사람 -

유시춘(소설가) 이우재(자유기고가) 김남일(소설가) 정재돈(농민운동가) 한상봉(자유기고가) 김명인(문학평론가) 최민희(민언련 사무총장) 박노승(경향신문 논설위원) 문성현(" 산업부 기자)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