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을 쏘다

뉴욕영화계 이단아 스파이크 리 감독의 ‘그녀는 날 싫어해’

2006.11.02 09:22

[별을 쏘다]뉴욕영화계 이단아 스파이크 리 감독의 ‘그녀는 날 싫어해’

여전히 기발하지만 결국엔 어수선하다. 뉴욕 영화계의 이단아 스파이크 리 감독이 2004년 만든 ‘그녀는 날 싫어해’(She Hate Me)는 대기업의 모럴해저드에서 출발해 흑인과 동성애자들의 첨단 풍속도를 거쳐 가족의 의미를 재구성하기에 이르기까지 감독이 평소 질러댔던 목소리를 종합해 내놓고 있다. 하지만 화음을 이루지 못하면 좋은 목소리도 빛을 잃는 법이다. 그가 올해 내놓은 ‘인사이드 맨’의 집중력이 어디서 나온 것일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그녀는…’의 이야기는 정신없이 갈팡질팡한다.

설정은 꽤 흥미롭다. 영화가 시작되면 조지 워싱턴과 에이브러햄 링컨 등 미국 역사 속의 얼굴들로 장식된 달러 지폐가 성조기처럼 휘날리는가 싶더니, 있지도 않은 3달러 지폐에 부시와 엔론 로고가 선명한 화면으로 오프닝 타이틀이 꾸며진다. ‘부시 행정부와 엔론 사태가 뉴요커들에게 미치는 영향’이라는 부제라도 달렸을 것 같은 이 영화의 정치적인 출발은 인종과 계급과 성정치학의 문제를 골고루 건드리며 나아간다.

존 헨리 암스트롱은 하버드에서 MBA를 밟고 30살에 대기업 부사장이 된 엘리트 흑인. 머리 좋고 몸 좋은 그는 굴지의 기업들이 스카우트하려고 난리인,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어떤 모델이다. 암스트롱의 회사는 에이즈 백신을 개발해 시장을 선점하려는 거대 바이오 산업체 ‘프로지아’. 상징적이게도, 신약을 내놓겠다고 미리 발표한 회사는 그 인지도를 통한 주가 상승을 노리고 백신 개발을 성급히 진행한다. 서민들이 프로지아 주식 매입에 몰려든 사이 내부거래와 기업 오너의 횡령따위가 진행된 것은 물론이다.

암스트롱은 절친했던 회사 연구원의 자살로 회사의 비리를 알게 되고 내부고발자로 나서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해고와 개인자산 동결조치뿐.

너무나 직접적으로 엔론 사태를 화면에 옮겨온 영화는 여기서부터 재미나는 돌파구를 찾는다. ‘사회적 개인’으로서 절벽에 내몰린 암스트롱 앞에, 동성애자임이 발각돼 파혼에 이르렀던 옛 약혼녀 파티마가 자신의 애인(물론 여자)과 함께 나타난다. 이유는 암스트롱의 정자가 필요하다는 것. 사랑하는 이와 함께 아이를 키우며 가정을 꾸리고 싶지만 여자끼리는 아이를 가질 수 없었다. 파티마는 정자의 대가로 1만달러를 제의하고 은행에서 1달러도 인출할 수 없던 암스트롱은 제안을 받아들인다.

스파이크 리의 과장된 유머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파티마는 우수한 정자를 원하는 레즈비언들을 위해 암스트롱을 소개시키고, 이들의 ‘임신파티’는 ‘정자사업’으로 발전한다. 영화도 점점 우스꽝스러운 상황극으로 치닫는다. 점차 고급 호스트가 돼가는 암스트롱의 표정이 가관이다. 그는 18명의 레즈비언을 임신시킨다.

극의 설정만을 정리해놓고 보면 꽤나 재미 있을 것 같다. 스파이크 리 특유의 황당한 화법은 여전하다 못해 과장·확장돼서 이를 즐기는 관객의 기대를 제법 충족시킬 수 있을 듯하다. 하지만 이 영화에 대한 미국 언론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뉴욕타임스는 “감독의 정치적 악감정이 난폭함을 넘어 무질서한 혼돈으로 나아간다”고 혹평했고, 롤링 스톤은 별점 4개 만점에 1개를 주면서 “스파이크 리의 이야기는 날아다니지 않으면 돌처럼 가라앉고 만다”는 평을 내놨다. 풍부한 상상력에서 비롯된 흥미로운 발상이, 지나치게 다양한 주제를 한꺼번에 말하려 한 욕심 탓에 제 갈길을 잃은 탓이다.

직접적인 상징으로 가득한 에피소드들이지만 정교하게 배치하지 않으면 관객은 어지럽고 부담스럽다. 나아가 주입받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러다보니 ‘그녀는…’은 흑인중심적인 균형 잃은 장면들로 많은 시간이 채워지는 치명적 결함을 안게 됐다. 한 중국계 레즈비언이 주인공과 관계를 갖다 “닭발을 먹어야 아들을 갖는다”고 고집하는 장면이나 그녀가 출산에 이르러서 ‘기를 모으라’는 산파의 충고를 무시하고 평소의 자기 신념을 배반하는 것으로 묘사하는 대목은 동양인에 대한 무지한 편견을 드러내기도 한다. 결국 이번 영화는 롤링 스톤의 지적대로 스파이크 리 작품들의 심한 기복을 증명하는 한편이 됐다. 스파이크 리의 작품을 못본 관객에게는 초기작 ‘똑바로 살아라’(1989) ‘모 베터 블루스’(1990) ‘정글 피버’(1991)나 ‘25시’(2002), 최근작 ‘인사이드맨’(2006)을 권한다.

영화 속에선 주인공의 각기 다른 표정을 가진 정자들이 여성들의 난자를 향해 헤엄치는 장면이 애니메이션으로 처리돼 나오는데, 이처럼 서로 다른 얼굴의 이야기들이 한 목표로 향하다 선택된 주제가 ‘착상’에 성공할 수 있었다면 좋았겠으나 서로 경쟁만 하다가 결승점에는 아무도 도달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다. 새로운 형태의 가족이 구성되는 영화의 결말이 ‘선택된 주제’라면 감독은 너무 편한 선택을 했다.

〈송형국기자 hank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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