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만 따져 질주하는 세상…종착지는 어디인가

2024.07.05 08:30 입력 2024.07.05 10:06 수정

청년주택 당첨의 행운도 잠시…‘봉수 파괴’가 불러운 아수라장

각자도생이란 생존 원칙 속 냉혹한 자본주의에 매몰된 사람들 이야기

청년·노인 빈곤 등 뾰족한 해법 없는 현실 ‘관계맺기’의 속살 그려

설재인 작가. Melva · 한겨레출판 제공

설재인 작가. Melva · 한겨레출판 제공

그 변기의 역학 |

설재인 지음 |한겨레출판 |288쪽 |1만5000원

아정은 뜻밖에 청년 주택지원사업에 당첨된다. 당첨 발표는 진작에 끝났고, 가능성 없는 예비번호를 받고 포기하고 있던 터였다. 만 39세인 아정은 만 40세라는 지원 자격 조건에 가까스로 해당했다. 내년부터는 지원조차 못 한다는 사실에 낙담하던 중 벼락처럼 행운이 찾아온 셈이었다. 게다가 아정이 입주할 집은 서울 변두리 잘 포장된 평지의 5층짜리 신축 빌라. 거주 가능 기간 최장 10년, 보증금 6000만 원에 월세 6만 원이었다. 인근 투룸의 전셋값이 3억을 넘는 것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헐값이었다.

입주한 후 아정은 안온한 주거환경에 기쁨과 만족을 느낀다. 그러던 어느 날 화장실의 변기 물이 모두 말라버리는 ‘봉수 파괴 현상’이 나타난다. 보통 윗집 화장실 변기에 넣지 말아야 할 이물질을 넣어 공용 변기 배관에 문제가 생겨 발생하는 경우가 많았다. 아정은 국민거주지원센터에 해결을 요청하려고 하지만 불현듯 계약서의 조항이 떠오른다. ‘센터는 1년마다 센터 및 입주자 내 자체 평가를 통하여 공동 주택에서의 규범을 어기고 미풍양속을 해치는 입주자를 방출한다.’

혹시나 변기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요청 때문에 불량입주자로 낙인찍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정은 참기로 한다. 그러다 윗집에 직접 책임을 묻기로 결심하고 윗집을 관찰하다가 그곳에 젊은 남성 외에 한 노인이 거주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정은 낮에는 전혀 정체를 드러내지 않다가 밤에만 잠깐 나오는 노인을 보고 ‘등록된 세대원 외에 다른 거주자를 들여서는 안 되는’ 계약사항 위반이라고 확신한다. 윗집의 약점을 잡았다고 생각한 아정은 ‘봉수 파괴 현상’을 해결하지 않으면 지원센터에 신고하겠다며 노인을 협박한다.

<그 변기의 역학> . 한겨레출판 제공

<그 변기의 역학> . 한겨레출판 제공

<그 변기의 역학>의 설정은 기이하다. 늙은 부모의 몸을 깎아 작게 만들어 유리병에 가둬버린다는 현대판 고려장, 변기에서 노인의 크리처가 출몰한다는 설정은 다소 장난스럽게도 느껴진다. 그러나 청년 빈곤, 노인 빈곤, 관계 단절 등 냉혹한 자본주의의 현실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가 뒷받침되면서 이 같은 설정은 오히려 현실을 더욱 극적으로 드러내는 장치가 된다.

아정은 ‘봉수 파괴 현상’을 계기로 윗집 남자 이상기가 ‘실버스파클’라는 중소기업에서 일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실버스파클’은 “가장 인간적인 효도”를 내세우며 “부모님과 아름답게 이별할 기회를 제공한다”라고 홍보한다. “‘인생은 육십부터’란 말은 얼마나 무책임합니까. 하루가 멀다 하고 고장 나는 몸, 끝없이 치솟는 물가와 바닥나는 예금, 그리고 노인에 대한 멸시의 시선. 그 모든 걸 견디며 30년을 더 버텨야 하는 우리네 부모님은 얼마나 괴로울까요?” ‘실버스파클’은 때수건과 각질 제거기와 면도기 등을 이용해 매일매일 노인의 몸을 조금씩 깎아 최종적으로 작은 유리병에 가둬두는 사업을 한다. 아정의 빌라 배관을 막히게 한 정체불명의 물질은 바로 이상기가 밤마다 자신 엄마의 몸을 깎은 후 내버린 단백질 덩어리였다. 이 단백질들은 뭉쳐져 노인의 또다른 생명체가 되어 아정의 변기에 출몰한다.

소설은 각자도생이라는 생존 원칙과 냉혹한 자본주의를 내면화한 등장인물들을 그려낸다.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지에 따라 모든 관계는 재편된다. “이웃은 간헐적인 층간 소음과 거실에 있을 때 들리는 현관문 밖의 소리와 온갖 종류의 재활용 쓰레기 그리고 우편함의 우편물이나 현관문 앞으로 배달된 택배 상자의 형태로만” 존재했으며, 폐지 줍는 노인들은 “종이류를 내놓으면 두어 시간 안에 싹쓸이해 가는 사람들. 그리하여 분리배출의 귀찮음을 덜어주는 사람들”이었다. 특히 이상기의 이야기는 관계 맺기의 속살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청년주택 당첨으로 주거 불안정에서 벗어난 그는 고립에서 벗어나 관계를 만들어나가고 싶다고 생각한다. 중고거래 앱을 통해 동네 친구를 구해보려 하지만 일회적인 술자리로 끝이 날 뿐 관계는 좀처럼 확장되지 못한다. “왜 나와 더 끈끈해지지 않으려 할까, 라고 자문했을 때 나온 결론은 바로 직업과 소득이었다. 남자의 모임을 통해 파생되는 관계들이 분명히 있었다. 그들의 공통점을 추려보면 답은 뚜렷했다. 괜찮은 직업, 혹은 ‘사업가’라는 주장에 걸맞은 행색.”

물론 ‘이익’ 여부로 쉽게 재편될 수 없는 관계도 있었다. 가족이었다. 그러나 ‘이익’이 안되어도 끊어낼 수 없는 가족 사이에는 서로를 원망하고 증오하는 감정만 흘렀다. 아정의 엄마는 가난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자 자신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딸들을 혼낸다. 그는 “너 때문에 엄마가 이 모양 이 꼴이니까 네가 책임져야지. 다른 인간들은 나이 들어 자식 덕 보고 사는데”라며 아정을 몰아세운다. 아정은 엄마를 두려워하면서도 엄마의 논리를 답습한다. 그는 윗집 노인이 학대받고 있음을 의심하면서도 “능력도 안 되는데 서울에서 이렇듯 번듯하고 멀끔한 집에 얹혀살고 싶으면 뭐, 참아야지”라고 생각한다.

이 지점을 공략한 게 바로 실버스파클의 사업이었다. “내 하루하루가 괴로운 이유를 알면서도 그 원인이 가족이라서, 그 소중하다는 빌어먹을 가족이라서 해결할 엄두를 내지 못했을까.” 실버스파클은 “경제적으로 취약한 청년층에 대한 디딤돌”이라고 홍보하며 취약 청년층을 겨냥했다. 이상기의 권유로 새로 실버스파클에 입사한 아정은 여기에 새로운 아이디어를 더한다. 부모의 이름으로 지급될 각종 연금들과 유산이 있기에 “가진 사람들이 더 집요하게 욕심을 낼 것”이라며 부자들에게도 이 사업을 확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아정의 말대로 사업은 부유층을 중심으로 승승장구하며 더욱 확대돼 나간다.

소설은 등장인물의 각성이나 반전 없이 그 방향 그대로 질주하며 끝난다. 층간소음 신고를 받고 국민거주지원센터 직원이 용역들을 이끌고 아정의 집을 찾아온다. 청년주택 거주 청년들이 나랏돈으로 방탕하게 살고 있다는 한 보도에 시범사례를 찾던 중 아정의 집이 걸린 것이다. 아정과 직원들 간의 싸움으로 한바탕 아수라장이 펼쳐지고, 화장실에 갇힌 아정을 구한 건 엄마도 동료도 이웃도 아닌 아정의 역할이 필요했던 회사 사장이었다.

청년 빈곤, 노인 빈곤, 초고령 사회, 연금개혁, 출생률 등 세대와 인구 구성을 둘러싼 사회적 문제에 대한 논의가 수년째 이어지고 있다. 근본적인 패러다임 변화가 필요한 문제이기에 뾰족한 대책은 나오지 않는다. 문제를 낳은 시스템을 변화시키려는 의지는 없고 ‘쓸모’ ‘생산 가능성’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통계와 담론들만 끝없이 질주한다. 소설은 그 질주의 종착지가 어디인지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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