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1은 새로운 8·15이다

2011.07.04 21:16 입력 2011.07.05 11:20 수정

3월11일에 일어난 동일본 대지진, 1000년 만에 밀려온 거대한 쓰나미, 그리고 인류 사상 최악의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 그로부터 4개월이 지나고 있다. 필자가 보기에 3·11은 새로운 8·15이다.

과거 일본 국민은 1945년 8월15일 패전과 항복을 경험했다. 단순히 태평양전쟁에 패배한 것이 아니다. 1894년 청나라와 1904년 러시아에 선전포고한 이래 계속돼온 50년간의 동북아시아 전쟁, 동아시아 전쟁에 패배한 것이다. 일본인 사망자는 300만명, 일본의 희생양이 된 아시아인은 2000만명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 국토는 초토화되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는 원자폭탄 투하로 괴멸됐다. 쓰나미로 처참히 파괴된 동북지역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원폭 투하 후의 히로시마와 같다.

와다 하루키씨|도쿄대 명예교수

와다 하루키씨|도쿄대 명예교수

1945년 8월15일 방송에서 일왕은 “만세를 위해 태평한 세상을 열고자 한다”고 말했다. 9월4일 제국의회 개회식에선 “평화국가를 확립해 인류의 문화에 기여하길 바란다”는 내용의 칙어를 내렸다. 어떤 의도로 한 발언인지는 몰라도 ‘전쟁은 이제 싫다. 평화를 바란다. 군대를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한 국민은 일왕의 말을 받아들였다. 그로부터 5개월 후, 46년 1월 설날 아침. 학교에서 아이들은 휘호를 썼다. 초등생 2학년이던 필자는 ‘태평의 봄’이라고 썼다. 6학년의 황태자, 지금의 일왕은 ‘평화국가 건설’이라고 했다. 이것이 모두의 바람이었다. 그리고 46년 ‘소년 구락부’ 1월호의 권두에는 미야자와 겐지의 시 ‘비에도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 눈에도 여름 더위에도 지지 않고’가 게재됐다. ‘남쪽에 죽어가는 사람 있으면/ 가서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이르고/ 북쪽에 싸움이나 소송이 있으면/ 부질없으니 그만두라 이르고… 그러한 사람이 나는 되고 싶다.’ 대지진 후 동북지방 출신 시인의 이 시가 일본 안팎에서 읽혀지는 건 우연이 아니다.

패전 후 일본은 7년, 오키나와는 무려 27년간이나 미군에 점령됐다. ‘천황제’ 국가는 비군사화되고 민주화됐다. 국민은 전쟁과 무력 행사, 위협을 국제분쟁 해결의 수단으로 이용하지 않는다는 일본국 헌법을 얻었다. 전후 일본의 모든 것은 8·15부터 출발하고 있다. 변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군인은 없어졌지만 관료와 일왕은 남은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정권을 독점한 보수당이 헌법 개정과 자위군 창설을 목표로 삼았지만 비무장과 중립을 촉구한 야당이 헌법 수호로 맞섰다. 또한 8·15로 일본 관할에서 제외된 북방4도와 독도(일본명 다케시마)는 일본 고유의 영토라며 반환을 요구하는 주장이 국론으로 유지됐다.

일본에선 2월11일을 건국기념일로 지정해 국가적 축일이 됐으나 거의 무시되고 있다. 되레 국가적 축일이 아닌 8월15일은 가장 중요한 국민적 의식의 날이 됐다. 8·15가 전쟁을 그만둔 일본인의 사고방식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전후 일본을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8·15도 되돌아봤다. 8·15는 일본인에게 패전, 종전의 날이지만 한국인에겐 식민지 지배가 끝난 날이다. 일본인은 이 사실을 몰랐다. 식민지배를 반성하고 한·일 간 새로운 관계를 열려는 노력이 없었던 게 전후 일본의 본질적인 결함이다. 이런 인식은 65년의 한일조약 조인 후 생겨났다. 한일조약에서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 반성이 담기지 않았을뿐더러 8·15 후 결함을 바로잡는 일도 없었다. 침략과 수탈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한반도 사람들과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야 할 때가 됐다는 인식은 73년 시작된 한국 민주화운동과의 연대운동에서 생겨났다. 74년 필자는 65년 한일조약 때도 찬스를 놓친 일본인에게 한·일 연대운동으로 제3의 찬스가 왔다는 견해를 표명했다. 이런 노력은 80년대에 들어와 조선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사죄의 국회결의를 제안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89년의 쇼와 일왕의 죽음은 조선 식민지 지배의 반성·사죄를 촉구해온 지식인들이 국회결의를 촉구하게끔 했다. 89년 1월31일 우리의 결의를 담은 성명을 냈다. ‘세카이’ 4월호에 서경식씨가 ‘제4의 호기-쇼와의 종결과 조선’이라는 글을 발표했고 제3의 찬스를 만들려는 노력은 계속됐다.

80년대 말에는 북·일관계의 정상화를 촉구하는 지식인·정치가 모임이 식민지 지배의 반성·사죄로 북한의 문을 두드리자는 우리의 아이디어를 채용하게 됐다. 90년 가네마루와 다나베가 방북했고, 가네마루 자민당 부총재는 평양에서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을 표명했으며 북·일 국교정상화 교섭에 대한 김일성 주석의 결단을 이끌어냈다. 89년부터 시작한 조선 식민지 지배 반성·사죄의 국회결의를 촉구한 운동은 95년 전후 격렬한 공방을 일으켜 6월9일 중의원 결의를 이끌어내고 결국 8월15일 무라야마 총리 담화로 귀결됐다.

우리가 촉구한 것은 식민지 지배가 군사력을 바탕으로 조선 민족에게 강제했다는 인식, 식민지 지배가 끼친 고통에 대한 반성과 사죄, 여기에 기초한 내외정책의 시정 결의 표명이었다. 무라야마 담화가 찬스를 살리려는 우리의 성과물이었다고 볼 수 있다.

반성·사죄에는 피해자에 대한 보상조치가 뒤따라야 한다.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보상 요구가 90년부터 고조됐으나 일본 정부가 취한 것은 아시아여성기금 설치였다. 이에 강한 반발과 비판이 일었다. 일본 국내에선 우익적 운동이 거세졌다. 그래도 일본 정부는 아시아여성기금의 사업을 관철해 4개국 363명의 피해자에 대한 사죄와 보상 사업을 실시했다. 그러나 강제동원 노동자에 대해선 유골을 반환하는 것 이상의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

그리고 2010년 8월10일 한국병합 100년을 맞아 나온 간 총리 담화는 병합의 강제성을 인정하는 인식을 보이며 조선왕실의궤 등의 양도를 약속했다. 그러나 8·15의 결함을 극복하기 위해 장기간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민주당 정권에서도 북한과의 식민지 지배 청산, 국교정상화는 없었다.

한국병합 100년이 지나고 새로운 해에 3·11이 터졌다. 일본인은 다시금 파국의 바닥에서 부흥과 신생을 꾀하고 있다. 8·15가 스스로 일으킨 전쟁을 그만두고 앞으로 평화 속에 산다고 한 때였다면, 지금은 자연의 힘에 무너져 우둔함으로 스스로 악재를 배로 키운 사람이 그 고통의 밑바닥에서 일어나 자연과의 새로운 공생을 촉구할 때다. 8·15는 과거의 역사가 됐다. 일본 역사 속에서 ‘전후’는 끝난 것이다.

3·11을 새 출발점으로 해 일본의 장래를 구상해보자. 지진과 쓰나미의 열도 일본으로선 탈원전, 절전과 자연 에너지에 의한 발전을 중심으로 한 에너지 시스템, 이에 적합한 새로운 산업사회·자본주의의 형태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와 함께 이웃국가와의 협조와 토론을 통해 새로운 경제와 사회를 도모하는 지역주의가 추구돼야 한다. 이른바 동북아시아 공동의 집, 동아시아 공동체가 그것이다.

이웃과 정상적인 교제를 원한다면 분규는 신속히 해결해야 한다. 이것이 3·11 이후 일본의 외교방침이어야 한다. 이웃국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는 국교를 맺지 않은 이상한 현상을 바로잡아야 한다. 더욱이 세 개의 이웃국가, 러시아·한국·중국과 다툼을 벌이고 있는 영토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과거 65년간 해결하지 못하고 몇 년을 기다려도 충족되지 않을 요구를 반복할 여유가 없다. 당장 합의할 수 있는 선을 발견해 결단을 내려야 한다. 그러자면 현재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측의 권리를 인정하고 서로 양보하고 공동 수익의 선에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북방4도에 대해선 2개 섬의 양도 약속을 전제로 나머지 2개 섬의 러시아 영유를 받아들이고, 독도의 경우 한국의 영유권을 인정해야 한다. 이는 8·15에서 생긴 문제의 신속한 해결을 꾀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8·15 이후 해결되지 않고 남아 있는 역사인식의 문제, 피해자 보상 문제는 어떻게 풀어야 할까. 8·15가 과거가 됐다는 것은 제반문제를 이제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게 아니라 새로운 협력을 위해 일방적으로 요구해선 안된다는 얘기다. 필자는 3월 한국 언론에 “죄 있는 자는 죄를 뉘우치고 원한이 있는 자는 원한을 뛰어넘어 화해하고 협력해 새로운 공동의 집을 지향하며 지구, 자연과의 공생으로 나아가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3·11 이후의 세계에서 보다 잘 살기 위해서는 과감하고 적극적인 조치를 취해 8·15에 기인한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고 싶다. 그럼으로써 이웃국가 사람들의 신뢰를 얻고 협력체제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물론 8·15 이후 65년에 대한 진지하고 건설적인 재검증이 전제돼야 한다.

3月11日におこった東北大地震、1000年に一度の巨大な津波、そして人類史上最?の福島原子力?電所事故、あれから4ヶ月が?過しようとしている。次第に私の心の中で大きくなってきたのは、3?11は新しい8?15であるという意識である。

かって日本?民は1945年8月15日敗?と降伏を??した。たんに大東???に敗北しただけでない。1894年に??に宣?を布告して以?、1904年にロシアに宣?を布告して以?、つづけてきた50年間の東北アジア??、東アジア??に敗れたのである。日本の死者は300万人といわれ、日本の?牲になったアジアの死者は2000万人と言われるが、どの??からの死者がここに含められているか、わからない。いずれにしても、日本の?土は?土と化し、?島と長崎は原子爆?の投下で?滅したことである。津波で?滅した東北の町の雰??はまさに原爆投下後の?島の町の雰??と同じであった。

8月15日の放送で、天皇は?万世ノ?ニ太平ヲ開カムト欲ス?と述べた。9月4日帝?議?の開?にあたって出した勅語の中で、天皇は「平和?家ヲ確立シテ、人類ノ文化ニ寄?セムコトヲ願ヒ」、日夜心を?いていると述べた。それがどのような意?からなされた言葉であったにせよ、??はもういやだ、平和をのぞむ、軍隊は信用できないという?持ちであった?民は天皇の言葉をうけいれた。それから5ヶ月後、1946年1月元旦、日本中の?校で、子どもたちは書き初めをした。小?校2年生の私は「太平の春」と書いた。小?校6年生の皇太子、現在の天皇は「平和?家建設」と書いた。それが皆の願いだった。そして、そのとき『少年??部』1946年1月?の?頭に宮?賢治の詩「雨ニモマケズ 風ニモマケズ 雪ニモ夏ノ暑サニモマケズ」が?載された。「南ニ死ニサウナ人アレバ/行ッテ コハガラナクデモイイトイヒ/北ニケンクワヤ ソシヨウガアレバ/ツマラナイカラ/ヤメロトイヒ」とあり、「サウイウモノニ/ワタシハ/ナリタイ」と結ばれている。このたびの震災の中でも、東北の詩人のこの詩が日本の?外で?まれているのは偶然ではない。

敗?後日本は7年間米?軍隊に占領された。沖?はさらに20年間長く占領されていた。その中で、天皇制?家は非軍事化され、民主化された。?民は、??と武力の行使、威?を?際紛?解決の手段として用いないとする日本?憲法をえた。?後日本のすべては8?15より出?している。もちろん?わらないものもあった。一言でいうなら、軍人は去ったが、官僚と天皇はのこったのである。時とともに、?後の改革を不徹底とする者と行き過ぎとする者が?い、政?を?占した保守?が憲法改正して自衛軍をつくることを目標としたのに、非武?中立をもとめた万年野?が憲法の擁護を主張して、?い?いた。他方で、8?15で日本の管轄からはずされた北方四島と竹島(?島)は日本の固有の領土だとして、返還をもとめるという主張が?論として維持された。

日本では2月11日、?紀元節が建?記念日として、?家的祝日とされているが、ほとんど無視されており、?家的祝日とされてはいない8月15日はもっとも重要な?民的儀式の日となっている。そのとき以?日本は??をやめたのであり、??をしていないので、そこにたえず立ち返って考えることが?後の日本人の思考方式を決めていたのである。 

?後日本のあり方を批判的にみる人?が立ち返ったのも8?15であった。8?15は日本人にとっては敗?、終?の日であるが、朝鮮人にとっては、植民地支配の終わりの日であった。日本人はそのことにながく?づかなかった。8?15のあと、植民地支配を反省し、日本人と朝鮮人の新しい?係を開くという努力がなされなかったことが?後日本の反省の本質的な欠落、欠?をなしたのだ、という考えが1965年の日韓?約調印のあとに生まれた。日韓?約においても、日本の植民地支配反省はもりこまれず、8?15の出?時の欠?はただされることはなかった。そういうことを全?として振り返り、侵略と?奪の?史を否定して、朝鮮半島の人?との新しい?係を創造していくときがきたという認識が1973年からはじまった韓?民主化運動への連?運動の中で生まれた。私は1974年、日本人は8月15日に?えられた最初のチャンスをのがし、1965年にありえた第二のチャンスをのがしたが、いま日韓連?運動の中で第三のチャンスが?えられたという見解を表明した(『展望』12月?)。そのような努力は1980年代に入って、朝鮮植民地支配反省謝罪の??決議を提案する動きとなった。そして1989年の昭和天皇の死は、朝鮮植民地支配の反省謝罪をもとめてきた知識人たちに??決議をもとめる行動の時がきたことを認識させた。天皇の死にさいして私たちの決意をしめす?明が出たのは89年1月31日のことである。『世界』4月?に徐京植氏が「第4の好機――昭和の終わりと朝鮮」なる文章を?表したが、第三のチャンスを生かす努力は??中であったのである。

80年代の末には、日朝?係の正常化を求める知識人政治家のグル?プが植民地支配の反省謝罪ということで北朝鮮のドアをたたくという私たちのアイデアを採用するにいたった。1990年金丸田??氏は訪朝し、金丸自民?副?裁は植民地支配に?する反省を平?で表明することになり、金日成主席の日朝?交正常化交?開始の決?を引き出すことになった。他方で、89年からはじまった朝鮮植民地支配反省謝罪の??決議を求める運動は、1995年の?後50年??決議をめぐるはげしい攻防をよびおこし、6月9日の衆議院決議をうみ、最後に8月15日の村山?理談話に?結したのである。

 私たちがもとめたのは、植民地支配が軍事力で朝鮮民族に?制されたことの確認、植民地支配が?えた苦痛に?する反省と謝罪、これにもとづく?外政策の是正の決意の表明であったが、村山談話は基本的な第二項を?現した。第三のチャンスを生かす努力は、この一点で成果を獲得したと考えることができる。

 反省謝罪がなされれば、被害者に?する補償措置が?施されなければならない。慰安婦被害者に?する補償の要求が1990年から高まっていたが、これに?して日本政府がとったのは、アジア女性基金の設置であった。これに?しては?い反撥と批判が起こった。他方で、日本??では右翼的な反動も?くおこった。その中で日本政府はアジア女性基金の事業を貫き、4カ?363人の被害者に謝罪と償いの事業を?施した。だが、?制動員??者に?しては、遺骨を返還するという以上の措置はついにとられなかった。

 そして、2010年8月10日、韓??合100年の菅?理談話において、?合の?制性を認める認識が示され、朝鮮王家の書籍の引き渡しが約束された。しかし、自民?政?にかわった民主?政?でも、北朝鮮との植民地支配の?算、?交正常化はなされなかった。8?15の欠?を克服しようとする長期の?いの結果について私はこのように見ている。 

そして韓??合100年がすぎて、新しい年に3?11がおこった。日本人はあらためて破局の底で、復興と新生を求める時に際?したである。8?15が人間の社?の中で自分たちが引き起こした??をやめて、これからは平和に生きるという時であったのに、このたびは、自然の力にたたきつぶされ、自らの愚かさで災?を倍?した者がその苦しみの底から立ち上がって、自然とのあらたな共生の形をもとめる時なのである。あえて言えば、8?15はいまや過去の?史となった。日本の?史の中で「?後」は終わったのである。

3?11を新たな出?点として、日本のこれからを構想するとき、地震と津波の列島日本として、?原?、節電と自然エネルギ?による?電を中心にするエネルギ??システム、それに適合的な新しい産業社?、資本主義のかたちを中心にして考えなければならないだろう。それとともに、隣?との助け合いから進んで、近隣諸?との地域大の討論を通じる新しい??と社?のひろがりを求める地域主義が追求されなければならないと考える。東北アジア共同の家、あるいは東アジア共同?である。

そのためには、すべての隣人と正常なつきあいもち、もめごと、?いごとはすみやかに解決し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ある。それが3?11以後の日本の外交方針であるべきだ。そのためには世界中の?と?交をもっているのに、隣?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とだけ?交がないという異常なあり方をただちに改める必要がある。さらに三つの隣?ロシア、韓?、中?と領土問題をかかえているというこれまた異常な?態をすみやかに解決しなければならない。過去65年間解決できず、これから何年待っても?たされることがない要求をくりかえしている余裕はない。現在合意できる線をみつけて、決?することが必要である。とすれば現在??的に支配している側の?利を基本的に認めて、互?、共同受益の線で解決しなければならない。北方四島については、二島引き渡しの約束を前提に?捉、?後のロシア領有をみとめるべきだし、?島=竹島については、韓?の領有?をみとめるべきである。これは8?15で生まれた問題のすみやかな解決をはかるということでもある。

では、8?15以後解決されずにのこっている?史認識上の問題、被害者補償に?する問題はどのように考えるべきか。8?15が過去となったということは、それらの問題についてもはや考えることは必要ないということではなく、また新しい協力のために、過去の怨みを忘れるように一方的に求めるわけではない。私はハンギョレ新聞3月23日?に求められて寄稿したさい、「罪ある者は罪を悔い、怨みある者は怨みをのりこえて、和解し、協力して、新しい共同の家をもとめ、地球、自然との共生へ向かうことを期待する」と書いた。私の言わんとするところは、3?11以後の世界によりよく生きるためにこそ、8?15に起因する未解決の問題について、このさい思い切って積極的な措置を講じることが必要であるということである。そのようにしてこそ、隣?の人?の信?をまし、協力?制をつくることができるだろう。もちろんそのためには、何がなしとげられ、何がなされなかったのか、8?15以後65年の?過の??な、建設的な再??が必要とな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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