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의 흔적을 지운 베를린

2011.11.14 21:26 입력 2011.11.14 21:36 수정
와다 하루키 | 도쿄대 명예교수

9월 말부터 10월 초에 걸쳐 독일 베를린에 갔다. <북한 현대사>를 쓰기 위해 옛 동독의 평양대사관 자료를 보러 간 것이다. 북한사 자료는 입수하기 어렵고 시기별로 다른 자료를 구해야 한다. 김일성의 만주항일전쟁 시기의 경우 중국 문서관에 있는 중국공산당 문서가 중요하며 이는 중국 내부발행 자료집에 모두 들어 있다. 이 자료집은 일본에서도 몇몇 대학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다.

해방 후 1945년부터 1948년까지 소련 점령하의 건국기는 소련 점령군 자료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이는 한국 젊은 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잘 드러나 있다. 한국전쟁기에 대해선 소련의 대통령 문서관에 있는 스탈린, 마오쩌둥, 김일성, 소련 대사 간의 교신 자료가 공개돼 있다.

한국전쟁 정전부터 1950년대 말까지는 소련 대사, 대사관 직원이 김일성과 남일 정권 측, 추방당한 소련계 등 반대파로부터 이야기를 들어 북한 내정을 상세히 파악하고 있었다. 이에 그 시기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외국공산당연락부와 주북한 소련대사관 자료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이 가운데 외국공산당연락부의 1953~1957년 자료가 마이크로필름화돼 판매됐고 소련대사관 자료는 한국 연구기관이 인터넷상에서 공개하고 있다.

[와다 하루키 칼럼]비극의 흔적을 지운 베를린

그러나 필자가 ‘유격대 국가’라고 이름 붙인, 북한의 독특한 체제가 형성된 1960년대의 경우 평양의 외교사절 문서 거의 전부를 공개하고 있는 옛 동독, 독일민주공화국의 대사관 자료가 주목을 끈다. 이 옛 동독 자료를 확인하기 위해 베를린에 간 것이다.

우선 베를린 교외에 있는 연방문서관 분관에 독일사회주의통일당 중앙위원회 대외부의 문서가 있다. 여기서 필자는 1960~1962년 자료, 에리히 호네커·김일성의 회담 자료 등을 복사했다.

그리고 옛 동베를린 지구에 있는 외무성 문서관에서 1960년대 후반의 자료를 봤다. 그러나 예상한 대로 1960년대 사회주의국가의 평양 주재 외교관들은 북한 정권의 내부사정에 대해 직접적으로 아무 정보도 갖고 있지 않았다. 북한 당국은 이미 자국민에게 외국 외교관과의 접촉을 엄격히 금지한 것이다. 이에 동독 대사가 소련 대사를 만나 물어봐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얘기만 들어야 했다.

1967년 5월과 7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는 갑산파를 숙청해 유일사상 체계를 확립한 결정적인 회의였다. 하지만 외교관들은 회의가 열린 사실 자체를 몰랐다. 북한은 1968년 유격대 남파가 실패하자 그 책임을 물어 민족보위상 김창봉 등을 숙청하게 된다. 이에 대해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대표부 서기관은 “민족보위성 지도부에 변화가 있는 것 같은데 이것이 북한 정책에 어떻게 반영되는지 누구나 의문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하고 있다. “이상하다”는 말을 반복할 따름이다.

필자가 이 시기의 사안 중 가장 관심을 기울인 것은 1968년의 대남공작이 베트남전쟁의 전개와 실질적인 관계가 있는지 여부다. 이 점과 관련해 1967년 8월26일 베트남 대리대사와 동독 대사의 대화 자료를 발견했다. 베트남 대사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그는 북한에 대해 극도로 비판적이고 부정적이었다. “조선노동당 지도부의 정책은 전혀 마르크스-레닌주의적이지 않다.” “대외정책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지도부는 두 개의 얼굴을 조종하고 있다. 그들은 거짓과 속임수를 쓰고 있다. 우리에겐 이렇다고 말하고 중국인에겐 저렇다고 하고, 소련인에겐 또 다르게 말하는 것이다. 이런 일도 오래 갈 수가 없다.” “한반도 전쟁 위기에 대한 소문은 프로파간다다. 한반도 정세는 우리와는 전혀 다르다.”

이 말은 베트남인이 북한의 ‘우리 식’에 대한 이해 및 평가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을 의미한다. ‘유격대 국가’의 성립 과정은 극히 심각했다는 얘기가 된다.

주말엔 베를린 관광을 했다. 동서 독일의 통일 이후 21년이 경과한 베를린은 독일인 관광객으로 북새통을 이뤘다. 가을인데도 햇살은 뜨거워 여성들은 여름 옷차림을 하고 돌아다녔다. 전체적으로 베를린은 밝고 활기찼다. 애초 브란덴부르크 문은 어두운 색조를 띨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찌든 때를 씻은 문은 밝은 크림색으로 보여 왠지 맥빠진 느낌이었다. 어디에도 동서 베를린이 분할된 비극, 소련군에 의해 베를린이 함락된 비참함, 나치 독일의 수도였던 악몽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거리를 걷는 중에 베를린 벽이 어떤 모습으로 둘러쳐져 있었는지 알게 됐다. 전차를 갈아타는 포츠담 광장에 있는 벽의 흔적이 이를 말해주고 있었다.

베를린이 동서로 나눠졌을 때, 브란덴부르크문에서부터 동쪽은 옛 동독에 속해 있었다. 운터덴린덴 거리, 국립도서관, 훔볼트 대학, 국립가극장, 베를린 대성당, 박물관 섬 등 베를린의 중요한 건물은 모두 동쪽에 있다. 20년이 지났지만 수많은 독일 관광객들을 불러 모으고 있는 이유다.

생각해보면 수도가 분할된다는 것은 국토 분단 이상으로 두려운 사태이자 비극이다. 이는 직접적으로는 연합국의 공동점령에 따른 결과이기도 하지만, 원래는 소련군에 의한 수도 정복, 나치 국가의 분쇄라는 역사적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독일인은 오랫동안 그 사태를 이겨내고 드디어 1990년 비극은 끝이 났다. 그 긴 비극의 세월은 히틀러 체제를 자신들의 선택으로 만들어내고 지탱해온 것에 대해 독일 국민이 치른 대가다. 밝은 베를린 시내를 동으로 서로 왕래하면서, 아무런 책임이 없는데도 일본이 지은 죄 때문에 분단돼 지금도 통일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한반도의 현실을 다시금 생각했다.

현재 베를린에는 과거 동독 국가가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흔적이 없다. DDR박물관이 있으나 너무 빈약하고 독일민주공화국의 역사는 거의 농담의 대상이 돼버렸다는 느낌을 받았다.

게다가 베를린이 나치 독일의 수도였다는 것도 여기서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살해당한 유대인의 기념비가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으나, 큰 인상을 주진 못했다. 히틀러가 죽은 총통 관저의 흔적이 당연히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관광 안내서에도 올라 있지 않았다. 당시의 일을 떠올릴 수 있는 흔적은 국회의사당이다. 그 앞 묘지에 앉아 잠시 베를린 함락의 장면을 떠올렸다. 의사당 입구에는 나치에게 살해당한 의원들을 기리는 작은 기념비가 있었다.

지게스 조일레로 불리는 전승기념탑을 보러 갔다. 도대체 어떤 전승을 기념한 탑일까 궁금해서다.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서쪽으로 거대한 숲속을 가로지르는 ‘6월17일 거리(1953년 6월17일 동베를린에서 벌어진 노동자 시위를 기념해 붙여졌다)’로 나아가면 볼 수 있다. 이런 탑은 여러 유럽 도시에도 있다. 이탈리아 로마에는 트라야누스 황제 기념비가 있다. 프랑스 파리 방돔광장에는 아우스테를리츠 전투 승리를 기념해 나폴레옹이 직접 건조한 원기둥이 있다. 러시아 페테르부르크에는 겨울궁전 앞 광장에 알렉산드르 1세 전승기념비가 있다. 러시아에 침입한 나폴레옹군을 격파한 1812년 승리를 기려 만들어진 것이다.

베를린의 전승탑은 1846년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덴마크에 승리한 것을 기념해 건립이 계획된 것으로,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후에 건립이 착수돼 보불전쟁 후인 1873년에 완성됐다. 이는 국회의사당 앞 광장에 세워졌다. 세 개의 전쟁 기념품이 탑 안에 있다. 그러나 1938년 나치 정부에 의해 이 탑은 국회의사당 앞에서 지금의 장소로 옮겨져 새로 지어졌다. 과거 60.5m였던 탑은 67m로 높아졌다.

이 작업을 지휘한 이는 나치의 설계가로 히틀러가 베를린 건설총감독에 임명한 알베르트 슈페어다. 슈페어는 뉘렌베르크 전범재판에서 20년 금고형을 선고받았다. 즉 유럽 최대의 이 전승탑은 나치의 전승이 확실히 새겨져 있고 베를린에 남은 거의 유일한 나치 기념물인 것이다.

필자는 285개의 계단을 올라 전승탑 정상에 도달했다. 탑 위에서 본 비가 내리는 베를린은 자욱했다. 탑은 온전히 남아 관광명소의 하나가 됐지만 나치와의 관계가 강조되지 않은 것은 유감이었다.

 九月の終わりから一〇月のはじめにかけて、ベルリンに出かけた。現在書いている岩波新書の『北朝鮮現代史』のために、旧東ドイツの平壌大使館の資料を見に行ったのである。
 北朝鮮史の資料は入手が難しく、時期によって異なった資料をさがさなければならない。金日成の満州抗日戦争の時期については、中国の文書館にある中国共産党の文書が重要だが、これは中国で出ている内部発行の資料集にみなのっている。この資料集は日本でもいまではいくつかの大学図書館に所蔵されている。解放後の1945年から48年までのソ連占領下の建国期については、ソ連占領軍の資料が決定的に重要で、これは韓国の若い研究者田鉉秀、金聖甫氏たちがペレストロイカ以後ロシアの文書館でよく研究した。この人々の研究成果からこの資料について知ることができる。朝鮮戦争期については、ソ連の大統領文書館にあるスターリン、毛沢東、金日成、ソ連大使のあいだの交信の資料が公開されて、みなが使えるようになった。朝鮮戦争の停戦から1950年代のおわりまでは、ソ連の大使、大使館員が金日成や南日ら政権側からも、圧迫され追放されるソ連系などの反対派からも話を聞いて、北朝鮮の内情をくわしく掌握した。だから、その時期のソ連共産党中央委員会の外国共産党連絡部の資料とソ連の駐朝大使館の資料が決定的に重要になる。このうち前者の資料は1953年から57年までの分がマイクロフィルム化されていて売り出されたし、後者の資料は韓国の研究機関が獲得して、ネット上で公開している。
しかし、今日の北朝鮮の独特な態勢、私が「遊撃隊国家」と名づけたものが形成された1960年代については、ピョンヤンの外交使節の文書の中でもっとも完全に公開されている旧東ドイツ、ドイツ民主共和国の大使館資料に注目が集まっている。すでにこの資料を系統的に使ってベルンド・シェーファーが論文を出している。それで私も、この旧東ドイツの資料を見に、ベルリンに来たというわけである。
まずベルリンの郊外にある連邦文書館分館にドイツ社会主義統一党中央委員会対外部の文書がある。ここでは私は1960年―62年の資料、ホーネッカー・金日成会談の資料などをコピーした。マイクロフィッシュになっているものは、好きなだけ自分でコピーがとれるのでありがたい。それから、旧東ベルリン地区にある外務省文書館で、1960年代後半の資料をみた。ここでは資料はみなマイクロフィシュ化されていて、フィッシュをまるごと複写してくれと頼むことができた。
 だが、資料をみていくと、私が予想した通り、60年代の社会主義国のピョンヤン駐在外交官たちは、北朝鮮の政権の内部事情について直接には何も情報を持っていない。北朝鮮当局はすでに自国民に外国の外交官との接触を厳しく禁止しているのである。だから東ドイツの大使がソ連大使に会って尋ねても、自分にもわからないと言われてしまうのである。1967年の5月と7月の朝鮮労働党中央委員会全員会議は甲山系を粛清し、唯一思想体系を確立した決定的な会議なのだが、外交官たちは会議が開かれたこと自体まったく知らないのである。1968年の遊撃隊の南派が失敗すると、その責任を民族保衛相金昌奉らに負わせて、粛清するわけだが、南ベトナム民族解放戦線代表部の書記官が、民族保衛省指導部が変化したようだが、それが北朝鮮の政策にどのように反映するものなのか、誰しも疑問をもつのは当然だと述べている。「謎だ」という言葉がくりかえされている。
 私がこの時期のことで最大の関心をよせていたのは、1968年の北朝鮮の韓国への作戦とベトナム戦争の展開とは実質的な関係があったか否かということである。この点に関連して、1967年8月26日、ヴェトナム代理大使ホアン・ムイと東ドイツ大使のシュトラウスの対話についての資料を発見した。ムイ代理大使の言葉は衝撃的であった。彼は北朝鮮に対して極度に批判的、否定的であった。「朝鮮労働党の指導部の政策はまったくマルクス=レーニン主義的でない。」「対外政策では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国の指導部は二つの顔をあやつっている。彼らは虚偽とペテンを使っている。われわれにはああ言い、中国人にはこう言い、ソ連人にはまた別のことを言うのである。こういうことも長くはうまくいかない。」「朝鮮における戦争の危機についてのうわさはプロパガンダだ。朝鮮の情勢はわれわれのところのものとはまったく違う。」
 この言葉は、ベトナム人が北朝鮮の「ウリ式」にまったく理解を示さず、評価もしていないことを示している。「遊撃隊国家」の成立の過程はきわめて深刻な過程であるということになる。
 週末はベルリン観光をした。東西ドイツの統一以来、21年が経過したが、ベルリンはドイツ人の観光客で一杯だった。秋なのに夏のような日差しで、女性は肌を出して、歩き回り、夏の雰囲気であった。全体としてベルリンは明るく、光輝くようであった。ブランデンブルク門は暗い色調のものと思いこんでいた。門は汚れを落として、明るいクリーム色にみえ、なにか拍子ぬけしてしまう感じであった。一体どこに東西ベルリンの分割の悲劇、ソ連軍によるベルリン陥落の悲惨、ナチス・ドイツの首都の悪夢はあるのか、と思うほどであった。
 それでも街を歩いているうちに、まずベルリンの壁がどんなふうにはりめぐらされていたかがわかってきた。電車を乗り換えるポツダム広場の中央でうめこまれた壁のあとをいつもみて、それをまたいで往来していた。ベルリンが東西に分けられていたとき、ブランデンブルク門から東は東側に属していた。ウンター・デン・リンデンの大通り、国立図書館、フンボルト大学、国立歌劇場、ベルリン大聖堂、博物館島といったベルリンの重要な建物はすべて東側に入ったのである。だからこそ、20年も経ったのに、ドイツ中から観光客がつめかけてくるのだろう。
 考えてみれば、首都が分割されるというのは国土の分断以上に恐ろしい事態であり、悲劇である。それは直接的には、連合国の共同占領の結果でもあるが、もとよりソ連軍による首都の征服、ナチス国家の粉砕という歴史的現実の反映である。ドイツ人はながくその事態をたえ、ついに1990年に悲劇は終わった。その長い悲劇の歳月はヒトラーの体制を自らの選択でつくり出し、支えたことに対してドイツ国民が支払った償いであった。明るいベルリンの市内を東に西に往来しながら、私は、朝鮮半島はいかなる責任もないのに日本国家の罪の故に分断され、統一の見通しもいまだないという理不尽さをあらためて思った。
 それにしても、今日のベルリンには、かって東ドイツ国家が存在したという痕跡がない。DDR博物館というのがあるが、あまりに貧弱で、ドイル民主共和国の歴史はほとんど冗談の対象にされてしまっているという感じである。
 さらにベルリンがナチ・ドイツの首都であったということもここではまったく感じられない。殺されたユダヤ人の記念碑がブランデンブルク門から遠くないところにあるが、私にはあまり印象をあたえなかった。ヒトラーが死んだ総統官邸のあとがあるはずだと思ったが、そういうものは観光案内には載っていない。その当時のことを偲ばせるのは、国会議事堂である。その前の草地に座って、私はしばらくベルリン陥落のシーンを頭に浮かべていた。議事堂の入り口にはナチに殺された議員たちの小さな記念碑があった。
 私はジーゲス・ゾイレとよばれる戦勝記念塔を見に行った。一体何の戦勝を記念した塔なのか、関心があったからである。ブランデンブルク門から西へ、巨大な森の中を走る6月17日通り(1953年6月17日の東ベルリンでの労働者のデモと暴動を記念して名付けられた)を進むと5叉路にぶつかる。その中央にその塔はある。こういう塔が方々のヨーロッパの都市にはある。ローマにはトラヤヌス帝記念柱がある。これは中空のドラム型大理石を20個積み上げてつくられたもので、内部に階段があり、柱の上にのぼれる。パリにはヴァンドーム広場にアウステルリッツの勝利を記念してナポレオンが自ら建造した円柱(コロンヌ)がある。中空の大理石を積み重ね、表面に青銅の板を巻いて補強している。これも上にのぼれる構造である。柱の上にはナポレオンの像が置かれている。ロシアのペテルブルクには、冬宮前広場にアレクサンドル一世柱がある。ロシアに侵入したナポレオン軍を打ち破った1812年の勝利をたたえてつくられたものである。この柱は巨大な赤大理石の一枚岩を切り出したもので、空洞ではなく、柱の上にはのぼれない。柱の上には十字架と天使の像が置かれた。柱の高さは32mあって、パリの円柱より高い。
 これに対して、ベルリンの戦勝塔は1864年にプロイセンとオーストリアがデンマークに勝利したのを記念して建立が企てられ、1866年のプロイセン=オーストリア戦争のあとに建立に着手され、普仏戦争のあとの1873年に完成した。これは国会議事堂の前の広場に建てられた。3つの戦争の記念品が塔にはめ込まれていた。だが1938年ナチ政府によって、この塔は国会議事堂前から現在の場所に移築され、なおかつ元は60.5mあった塔は67mとさらに高くされたのである。この移築改造を指揮したのはナチの設計家で、ヒトラーによりベルリン建設総監督に任命されたシュペーアである。シュペーアはニュルンベルク裁判で戦犯として裁かれ、20年の禁固刑を宣告された。つまりヨーロッパ最大のこの戦勝塔にはナチの戦勝がはっきりと織り込まれているのである。ベルリンにのこるほとんど唯一のナチの記念物なのである。
 私は285段の階段をのぼって、塔の頂上に達した。雨が降っていて、塔の上からみるベルリンは煙っていた。塔がそのまま残って、観光名所に一つになっているのは、自然のなりゆきである。しかし、ナチとの関係は展示においてよくよく説明すべきことだと考えたが、その点があまり強調されていないのは残念に思った。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