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브뤼겔 ‘베들레헴의 인구조사’

2011.12.21 20:57
이주향 | 수원대 교수·철학

혁명적 크리스마스

올 크리스마스엔 눈이 올까요? 저 그림처럼 천지가 눈으로 덮일까요? 서울에서의 저런 눈은 악몽일 텐데, 꿈속에서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길몽입니다. 마음속에서 눈은 하늘에서 내리는 별이니까요.

저 그림은 얼핏 보면 손으로 카드를 그려 보내던 시절의 카드 풍경 같지요? 브뤼겔의 유명한 그림 ‘베들레헴의 인구조사’입니다. 브뤼겔이 저 그림을 그릴 당시 플랑더스는 끔찍할 정도로 추웠다고 합니다. 그러니 저 그림은 화이트 크리스마스라는 낭만을 그린 게 아니라 아름다움 이면의 거칠고 혹독한 세상을 그린 것입니다.

제목으로 봐서는 베들레헴에서 실시됐던 인구조사를 그린 그림이지요? 누가복음은 그때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때 가이사가 영(令)을 내려,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고향으로 돌아가매, 요셉도 정혼자 마리아와 함께 베들레헴이라는 다윗의 동네로 호적하러 올라가니….”

피터 브뤼겔 ‘베들레헴의 인구조사’, 1566년, 목판에 유채, 116×164㎝, 왕립미술관, 안트웨르펜

피터 브뤼겔 ‘베들레헴의 인구조사’, 1566년, 목판에 유채, 116×164㎝, 왕립미술관, 안트웨르펜

그러니까 저 그림은 예수가 태어나기 직전 베들레헴의 풍경인 셈입니다. 제목을 보고나서야 찬찬히 요셉과 마리아를 찾아보게 됩니다. 얼핏 그림만 보고는 누가 주인공인지 알 수 없으니까요. 그건 작가의 의도입니다. 모든 사건과 사람들은, 심지어 나무와 태양과 집들과 수레바퀴까지도 모두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썰매를 지치는 아이, 짐을 나르는 노동자부터 모이를 찾고 있는 닭들을 거쳐 나뭇가지에 걸려 있는 태양까지 모두가 주인공이고 모두가 조연입니다. 우리의 성가족은 그렇게 복잡하게 엉켜 있는 세상을 기반으로 나타난, 그날의 주인공입니다.

그림을 찬찬히 들여다보십시오. 세상이 눈밭인데 등에 무거운 짐을 지고 터벅터벅 걷는 고단한 노동자가, 저 추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익숙한 듯 아무렇지도 않게 돼지를 잡는 손이, 불가에 모여 있는 표정 없는 사람들이, 땔감을 나르는 사람이, 집이라고 할 것도 없는 허름한 오두막에서 걸어나오는 존재감 없는 노인이, 만약에 일어날 시위를 대비해 창을 든 군인들이 거칠고 혹독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와 겹쳐집니다.

그렇게 추위에 얼고 삶에 지친 어른들 밑에서도 아이들은 놀 줄 알지요? 무엇보다도 빨간 옷을 입은 아이의 표정에 절로 마음이 환해집니다. 눈싸움을 하는 아이, 얼음판에서 팽이를 치는 아이, 아이들은 역시 희망이고 에너지입니다. 그러고 보니 창을 든 군인들도 심상치 않지요? 그렇습니다. ‘베들레헴의 인구조사’란 제목에 걸맞게 왼쪽에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이 바로 절대권력 앞에 세금을 내는 사람들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지 않습니까? 혁명은 바로 피로에 눈을 감고 당나귀를 탄 만삭의 여인에게서 일어납니다.

그나저나 베들레헴에 눈이 온 적이 있나요? 그 뜨거운 나라에 눈이 온 적이 없을 텐데도 브뤼겔은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그렸습니다. 그는 아마도 ‘베들레헴의 인구조사’라는 누가복음의 일화에 기대 살아내기 팍팍했던 16세기 ‘우리’ 나라, 보통사람들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로마황제 대신에 스페인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느라 어깨가 무겁고 손이 시렸던 보통사람들을.

어떤 그림은 사색을 하고 어떤 그림은 혁명을 합니다. 브뤼겔의 저 그림 ‘베들레헴의 인구조사’는 혁명을 하고 있습니다. 녹색 옷을 입고 당나귀를 탄 혁명의 주인공, 처녀 마리아를 찾아보십시오. 눈바람을 견디느라 피곤에 지친 얼굴을 하고도 꿋꿋하기만 합니다.

사실 그녀는 왕후도 아니고, 공주도 아닙니다. 아니, 세련된 도시처녀도 아닙니다. 그녀는 바로 나사렛 처녀, 촌구석의 촌색시입니다. 새로운 생명은 바로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그런 곳에서 시작됩니다. 그녀는 병든 노인의 딸이고, 고단한 노동자의 아내이며, 거처가 없어 마구간에서 태어나야 했던 아이의 어머니입니다. 혹독한 세상도 놀이터로 만들 줄 아는 아이들의 누이이며, 먹이를 찾고 있는 새들의 친구입니다. 그녀가 새로운 세상의 씨앗을 잉태하고 거기, 베들레헴에 왔습니다. 새로운 세상을 낳기 위해 거기에 온 것입니다.

1년 동안 귀한 지면을 허락받아 행복한 글쓰기를 했습니다. 행복을 전하며 연재를 마칩니다. 내년에는 ‘나’의 베들레헴을 찾아 참생명을 낳으시길!

※ 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 이번호로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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