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한 커피향에 어우러진 근대문화의 풍경

2012.02.14 21:14 입력 2012.02.14 21:22 수정
글·사진 최예선 http://sweet-workroom.khan.kr

대구 북성로의 재발견, 카페 ‘삼덕상회’

북성로를 다시 가보게 된 이유는 바로 삼덕상회 때문이었다.

작년 가을쯤이었나, 인터넷에서 대구 북성로의 오래된 상점에 카페가 문을 열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하루에도 수십개씩 문을 열고 닫는 카페가 대단할 이유는 없다. 그런데 이곳은 가볼 만하겠다고 생각했다. 카페 주인이 오래된 건물에 새로운 삶을 불어넣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오랫동안 ‘북성로 재발견’에 참여해온 20대의 건축학도였기 때문이다.

거리에 담긴 역사성은 돈으로 만들 수 없다. 그것은 그 도시에 살아온 사람들이 오랫동안 상호소통하며 이루어낸 결과다. 그 결과가 건물에 스며있다. 그런데 근대건축물을 허물지 말고 보존하자는 말들은 많지만 어떻게 활용할지는 여전히 어려운 숙제다. 규모가 큰 문화재급 건물은 박물관이나 전시관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문화재로 지정되기 어려운 개인 소유 부동산은 늘 태풍 앞의 촛불 신세다.

2009년 방문했던 대구 연초제조창. 시간이 멈춘 듯했던 그 거대한 건물은 지금 어떻게 변해 있을까?

2009년 방문했던 대구 연초제조창. 시간이 멈춘 듯했던 그 거대한 건물은 지금 어떻게 변해 있을까?

북성로 모퉁이 카페를 찾아갔다. 이름하여 삼덕상회. 원래 공구상회 건물이었다. 골목은 여전히 부산하고, 기계 소음이 들끓는다. 덕지덕지 붙은 간판만 떼어내면 이 거리는 옛 모습 그대로이리라. 예상보다 건물은 자그마했다. 2층짜리 일본식 목조주택이다. 일제강점기에 닦인 도로변에는 요즘 건물들과 달리 파사드(외관)가 좁고 안쪽으로 긴 집들이 거리를 채웠다.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서자 커피 향기가 퍼진다. 2층 안쪽에는 다다미방에 좌식 테이블을 두어 사랑방 분위기가 났다. 바깥쪽에는 오래 묵은 의자와 테이블을 두었다. 천장은 높고 시원했다. 1층과 2층 사이에 뻥 뚫린 자리가 있다. 아마 예전에 계단이 있었던 것 같다. 지금은 건물 뒤쪽에 계단을 만들어 오가기 편하게 했다.

커피를 기다리고 있는데, 가게를 지키던 이가 말을 걸어온다. “주인은 아니고, 주인의 후배예요.” 번개처럼 스치는 이름이 있었다. <청춘남녀, 백년 전 세상을 탐하다>라는 책을 쓰면서 답사했던 대구 연초제조창. 대구에 올 때마다 그 넓디넓은 폐허를 둘러볼 수 있도록 도와준 호리호리한 여성이 늘 생각나곤 했다. 그 최지애씨가 카페 삼덕상회의 주인이었다.

근대문화유산을 소개하면서 사진으로 다 보여줄 수 없고 글로도 모두 설명할 수 없는 건물들을 만나왔다. 80년 된 철암의 탄광이 그랬고, 대책 없이 스러져가는 일본인 대농장이 그랬다. 그중에서도 담배 공장들은 참 오랫동안 마음에 남아있다. 청주의 연초제조창이 그랬고 대구의 연초제조창이 그랬고 제천의 엽연초 수납시설물이 그랬다. 아직 가보지 못했으나 무주에 있는 연초재배장 관리사무소도 곧 발걸음하게 될 것 같다. 이들 건물은 대책 없이 커서 죽음을 앞둔 공룡처럼 움직이지 못하고 겨우 숨만 쉬는 형국이다. 너무 거대해서 다른 곳으로 옮길 수도, 없애버릴 수도 없다. 개조하여 사용하기에도 규모가 만만치 않다. 어쩔 수 없는 건물들, 어쩔 수 없는 인연을 보는 것처럼 아련한 건물들. 그 숱한 시간 동안 이 건물을 스쳐간 사람들은 얼마나 많았을 것이며 그들은 건물 곳곳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심어놓았을까.

대구 북성로 모퉁이에 있는 공구가게 ‘삼덕상회’ 건물은 근대건축을 보존하는 데 뜻을 둔 주인을 만나 고풍스러운 카페로 변했다.

대구 북성로 모퉁이에 있는 공구가게 ‘삼덕상회’ 건물은 근대건축을 보존하는 데 뜻을 둔 주인을 만나 고풍스러운 카페로 변했다.

이 건물들을 움직인 사람들은 모두 노동자들이건만. 그들에게서 나온 재화는 도시를 황금빛으로 만든 주요 자본이었다. 철암의 탄광에서, 대구의 담배 공장에서, 김제의 농장에서 나온 것들이 지역을 먹여 살렸다. 지금 그 황금의 재화들을 생산한 노동자들은 잊혀지고 있다. 공장이, 탄광이, 농장이 사라지면 어디서 그들의 삶을 유추해볼 것인가.

철암의 탄광 시설물 20개 동이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것은 참 반가운 일이다. 철암탄광 관계자는 1930년대 이래로 지역산업의 중추 역할을 했던 탄광 시설물이 잘 보존되어 향후 탄광산업의 역사를 들여다보는 박물관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했다. 설명하지 않아도 이런 장소들을 보는 것만으로 역사의 무게를 고스란히 느끼게 된다. 그것이 오래된 건물의 힘이다.

시간이 멈춘 듯한 대구 연초제조창도 그랬다. 내부는 위험하기 때문에 옥상을 건너다니며 건물을 조망했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다들 어디로 갔을까? 지금은 어떤 변화를 맞이했을까? 아니면 지금도 그대로일까? 연초제조창은 1910년대에 세워진 후로 확장을 거듭하면서 지금의 육중한 몸집에 이르렀다. KT&G가 대구공장을 영천으로 옮기면서 북성로 상단의 이 공장은 가동을 멈추었다. 원래는 건물을 모두 허물고 그 자리에 초고층 주상복합 빌딩이 들어설 계획이었다. 그러다 건설경기가 좋지 않아 계획이 무산됐다.

최근 들리는 소식으로는 내년에 창고건물을 복합문화단지로 바꾸는 계획안이 발표됐다고 한다. 장소는 변하더라도, 나는 처음 그 공간에 발을 디뎠던 날의 서늘하고 눅눅한 감촉을 잊지 못할 것이다. 그 텅 빈 공간에서 둥글게 말아올린 거대한 담뱃잎 뭉치들을 환영처럼 보았던 것도, 계단을 오르내리던 수많은 노동자들의 뒷모습을 떠올렸던 것도.

북성로 카페를 다시 찾아가 주인과 인사를 나눴다. 그녀는 차분한 대구 사투리로 ‘북성로의 재발견’이라는 프로젝트 그룹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미술사와 건축을 전공한 사람, 대구의 옛 골목을 샅샅이 정리한 대구 신택리지 팀 등이 모여 북성로 활성화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됐단다. 그러다 삼덕상회 건물이 새 주인을 찾는다는 소식을 듣고 카페를 열게 되었단다. 아직 손님의 발걸음이 많지 않지만, 예술이나 근대건축과 관련된 사람들이 워크숍을 하기도 한다. 뜻있는 이들의 발걸음이 조금씩 이어진다.

옛날 건물을 들여다보는 것은 참 재미있다. 할머니가 살았던 시절 속을 헤매며 당시 이야기를 찾아보는 그것은 또 다른 유쾌한 여행이다. 젊은 우리가 이런 건물에 대해 좀 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때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을까. 부산 중구 골목에는 예술가들이 모여 ‘또따또가’라는 단체를 만들어 거리를 되살리고 있고, 인천에는 아트플랫폼이 있다. 대전에서는 1930년대 지어진 대전부윤관사가 카페 겸 갤러리로 바뀌었다. 군산에서도 예술가들이 도시를 공부하며 오래된 일본식 주택에 머무는 활동을 하고 있다. 나는 그들을 만나러 가려고 한다. 그들이 오래된 집과 만나서 벌인 일들, 그 속에 담긴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볼 것이다.

■ 글·사진 최예선
■ 블로그 주소 http://sweet-workroom.khan.kr
글쓴이는 건축잡지 편집자로 일하다가 프랑스로 유학, 미술사를 공부했습니다. ‘오래된 풍경’이라는 블로그에 한국 곳곳의 근대 건축물 이야기를 올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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