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혁기의 책상물림]융합이라는 화두

융합교육이 화두다. 대학에서도 이제 하나의 학과만을 전공하여 졸업하는 학생보다 제2전공이나 융합전공을 택하는 학생이 더 많아졌다. 최근 포항공과대학교가 인문사회계 학부 출신만 대상으로 하는 데이터사이언스 전공 석사과정을 신설한 것은 융합의 가능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또 하나의 시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에서 학과와 전공의 장벽이 여전히 견고한 것은, 근대의 학문이 분과학문과 함께 출발했다는 연원과 관련이 깊다. 근대의 개념어 가운데에는 19세기 일본이 서양서를 번역하는 과정에 한자로 만들어진 것이 많은데, 처음부터 단일한 번역어가 사용된 것은 아니다. 각축을 벌이던 학(學), 이학(理學), 학문(學問) 등의 어휘를 물리치고 새로운 조어인 과학(科學)이 사이언스(science)의 번역어로 채택된 데에는, 이 실증적이고 분과적인 학문을 기존 용어에 담기는 부족하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과(科)는 말(斗)로 곡식(禾)의 양을 잰다는 뜻이다. 이러한 자원이 고려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정확하게 계량하고 반복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지식을 통해 사물 현상의 법칙을 추구하는 학문을 수식하는 말로 적절하다. 과학이 ‘분과학문’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초기 용례도 많은 것으로 보아, 과(科)의 확장된 의미인 ‘조목조목 나누다’라는 뜻도 반영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분야별로 전문가를 배출하며 한 세기 동안 굳어진 분과학문의 체계 위에서 섣부르게 융합을 말하는 데 대한 경계의 시선이 있는 것도 자연스럽다.

융합이 가치를 지니는 것은, 특정 분야에 매몰되어 있을 때는 보이지 않는 질문을 던지는 순간이다. 깊어야 넓어질 수 있고 넓어야 다시 깊어질 수 있다는 ‘박이정(博而精)’의 지혜야말로 융합의 조건이다. 과(科)에는 ‘웅덩이’의 뜻도 있다. 흐르는 물은 과(科)를 채워야 앞으로 나아간다는 맹자의 비유는 본디 단계를 건너뛰려는 태도를 경계하는 말이지만, 자기 분야를 채우고 넘쳐야 다른 분야에서 의미 있는 융합을 이룰 수 있음을 뜻하는 말로도 읽힌다. 융합이라는 화두가 자칫 주체를 확보하지 못한 채 흐름에 휩쓸려 여기저기 기웃거리기만 하는 세태를 조장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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