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원로’ 김가진, 독립유공 서훈 8번 보류···사망 100주기 맞아 “재평가” 목소리

2022.10.27 15:26 입력 2022.10.27 15:27 수정

동농 김가진 선생.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동농 김가진 선생.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국가보훈처가 동농 김가진 선생의 독립유공자 서훈을 거듭 보류하고 있지만, 사망 100주기를 맞아 그를 재평가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보훈처는 1993년부터 올해까지 8차례에 걸쳐 서훈 보류 결정을 내렸다. 전문가들은 보훈처의 이 같은 결정이 다른 사례와 비교해 형평에 맞지 않는다고 말한다.

김가진 선생은 비밀결사 독립운동단체를 조직하고, 74세 나이로 상해에 망명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고문 역할을 했다. 1922년 김가진 선생이 사망하자 임시정부는 그의 장례를 국장에 준해 치렀다. 안창호 선생이 추도사를 올렸고, 김구 선생 부부가 조문했다고 기록돼 있다.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은 1면에 실은 부고 기사에서 ‘김가진은 강건한 기상으로 조국독립에 매진했다’고 적었다.

1846년 출생한 김가진 선생은 1886년 급제해 관직을 올랐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에 반대했지만 뜻을 관철시키지 못했고, 1907년 관복을 벗었다. 1910년 일제에서 남작 작위를 받았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이후 비밀결사 독립운동단체인 조선민족대동단을 조직하고 총재를 지냈다. 단원들이 일제에 체포되자 같은 해 10월 대동단 본부를 상해로 옮기고 자신도 망명했다. 11월에는 33명이 이름을 올린 제2의 독립선언서(대동단 선언)를 작성해 발표했다. 1920년에는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모금에 매진했다.

김가진 선행의 독립운동은 대를 이어갔다. 상해 망명 때 동행한 아들 김의한 선생은 김구 선생의 비서를 지냈고, 며느리 정정화 선생은 ‘조선의 잔다르크’로 불렸다. 지난 8월23일 별세한 손자 김자동 선생은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장을 지냈다. 김가진 선생 후손과 대동단원 대부분이 유공자로 인정받았다.

1919년 11월20일 독립신문에 실린 김가진 선생의 발언. ‘한민족이 최후의 1인까지 독립 의지를 꺽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이 담겼다.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1919년 11월20일 독립신문에 실린 김가진 선생의 발언. ‘한민족이 최후의 1인까지 독립 의지를 꺽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이 담겼다.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보훈처는 1993년, 1995년, 2000년, 2001년, 2006년, 2014년, 2019년, 2022년 총 8회에 걸쳐 김가진 선행의 서훈 보류를 통보했다. 남작 작위 수여, 의병 탄압 논란 등을 사유로 들었다.

역사학계에서는 친일 행적이 있어도 이후 독립운동을 했다고 인정받은 ‘선 친일, 후 독립운동’ 인사들이 유공자 서훈을 받은 전례에 비춰 김가진 선생만 예외가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보훈처가 서훈 불가 사유로 꼽은 것 중 ‘의병 탄압’ 건은 일본군 헌병대의 기록이어서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주장도 있다. 박용규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은 27일 “‘선 친일, 후 독립운동’ 인사들은 거의 예외 없이 유공자 서훈을 받았다”며 “하지만 보훈처는 지난해 ‘선 친일, 후 독립운동의 경우에는 공과를 종합적으로 검토하겠다’는 기준을 새로 마련했다”고 말했다.

보훈처 측은 “친일행적이 너무 무겁고, 그 이후 행적이 있어도 감안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이 있었다”며 “학자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지만, 서훈 심사위원들은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해 그렇게 평가한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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