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서희씨(43)의 딸은 2014년 4월16일에 태어났다. 아이가 태어난 날 TV에서는 배가 침몰하고 있었다. “미역국을 먹다가 눈물이 났어요. 본능적으로 이건 큰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씨가 말했다. 그는 아이가 태어난 지 100일 되던 즈음부터 충남 당진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밝혀달라’는 손팻말을 들고 1인 시위에 나섰다. 정씨는 “뉴스는 나오는데 세상이 너무 조용하다는 생각에 시작했다”며 “일주일에 한 번, 4~5년을 이어갔다”고 말했다.
10년이 흘렀다. 세월호 참사 10주기를 맞은 16일 정씨를 비롯한 시민단체 리멤버0416 회원 30여명이 대통령 집무실 근처인 서울 용산 녹사평역 앞에 섰다. 서울뿐 아니라 광주·천안·청주·창원 등 전국 각지에서 모였다. 이들은 대로를 지나가는 차량들을 향해 “우리는 여전히 세월호 안에 있다”는 플래카드를 들어 보였다.
경남 거제에서 한달음에 달려온 천현주씨(53)는 “우리 딸이 97년생으로 단원고 아이들과 동갑”이라며 “부모의 마음으로 잊을 수 없었다”고 했다. 전남 진도체육관·팽목항에서 봉사활동을 했던 그는 모두가 잠든 밤 숨죽여 울던 희생자 가족들의 흐느낌이 마음에 깊이 박혔다고 말했다. 그는 “주기가 지날수록 사람들이 무관심해지는 게 느껴진다”며 “그 많은 봉사자들도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지만 마음만은 잊지 않았다는 걸 얘기하고 싶다”고 말했다.
서울 중구 세월호 기억공간에서는 참사일을 연상케 하는 오후 4시16분 세월호 참사 시민기억식이 열렸다. 시민들은 기억식에 앞서 참사 당일 기록과 희생자들의 이름이 적힌 공간에 흰 국화를 헌화했다. 시민 150여명이 기억공간 앞을 가득 메웠다. 416연대 측에 따르면 이날 시민기억식 시작 전까지 이 공간을 방문한 인원은 1100여명에 달했다.
대학원생 이주원씨(29)는 “제가 성인이 되던 해 참사가 벌어졌는데 10년이 되도록 변한 게 없다”며 “세월호 참사 이야기가 ‘피곤하다’고 말하는 주변 친구들을 볼 때 안타깝다. 추모가 당연해지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전남 영광의 한 중학교 3학년생인 이헌준군은 “안타까운 사고로 돌아가신 형, 누나들도 저처럼 꿈과 희망이 가득하셨을 것”이라며 “20주기, 30주기, 50주기가 되어도 잊지 않겠다”고 발언했다.
세월호 기록팀의 일원으로 2016년 <세월호, 그날의 기록>(진실의힘)을 펴낸 박수빈 서울시의원은 “잊지 말자는 이야기가 추상적이지 않으려면 그날의 이야기를 기억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웃으면서 물이 차오르는 걸 찍으며 웃던 아이들과, 5살 아이가 구조될 수 있게 ‘여기 아이가 있다’고 외친 학생들이 있었다”고 했다.
세월호 기억 공간이 위협받아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416연대 이경희 활동가는 “광화문 광장 재구조화라는 이유로 2021년에 축소 이전한 이 기억공간은 임시로 운영되고 있다”며 “서울시의회는 이마저도 철거를 한다며 수차례 계고장을 보내고 변상금을 납부하라고 한다”고 말했다. 그는 “기억공간은 오후 8시까지 운영되는데 오후 6시부터는 단전을 한다”고 말했다.
기억공간 지킴이 유혜림씨는 “비가 새거나 눈이 많이 올 때 공간의 사진 속 얼굴들과 함께 버틴다고 생각하면 어렵지 않다”며 “그래도 바람이 있다면 이곳이 아닌 햇빛 들고 따뜻한 곳에서 애도할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