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청회 한 번 안 열었다”…공론화 부재부터 기증품 구입·검증까지 이건희 기증관 반대 8가지 이유

2021.12.22 13:51 입력 2021.12.22 23:10 수정

‘이건희 기증관 건립 졸속 추진 반대 시민사회단체모임’ 구성원들이 22일 서울 종로구 참여연대 느타나무홀에서 개최한 기자회견 중 졸속 추진 반대 8가지 이유를 발표하고 있다. 왼쪽부터 사회를 맡은 최희진 솔방울커먼즈 활동가, 박선영 문화연대 문화정책센터 팀장,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소장,  윤은주 경실련 활동가.  한수빈 기자

‘이건희 기증관 건립 졸속 추진 반대 시민사회단체모임’ 구성원들이 22일 서울 종로구 참여연대 느타나무홀에서 개최한 기자회견 중 졸속 추진 반대 8가지 이유를 발표하고 있다. 왼쪽부터 사회를 맡은 최희진 솔방울커먼즈 활동가, 박선영 문화연대 문화정책센터 팀장,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소장, 윤은주 경실련 활동가. 한수빈 기자

‘이건희 기증관 건립 졸속 추진 반대 시민사회단체모임’이 “정부가 원칙도, 절차도, 명분도 없는 방식으로 기증관 건립을 강행하고 있다. 막무가내식으로 진행되는 이건희 기증관 건립 졸속 추진을 막고, 원칙과 절차에 따른 과정을 밟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22일 냈다. 이 모임엔 걷고싶은도시만들기시민연대, 경실련, 문화도시연구소, 문화연대, 서울시민연대, 서울환경운동연합, 솔방울커먼즈,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등이 참여했다.

이건희기증관반대시민모임은 이날 참여연대 건물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사회적 논의와 합의는 민주주의 사회라면 반드시 거쳐야 되는 과정이며, 대규모 국가예산이 투입되는 만큼 사회적 공감대와 공론화 과정은 중요할 수밖에 없다”며 졸속 추진을 반대하는 8가지 이유도 발표했다. ‘비정상적인 추진 속도와 사회적 공론화 부재’, ‘송현동 부지 매입 및 등가교환 과정 문제’, ‘기증품의 검증 과정 부재 및 구입 과정에 대한 의혹’, ‘이건희 명칭 사용의 적절성과 삼성 특혜 논란 의혹’ 등이다.

가칭 ‘이건희 기증관’ 건립 예정지인 서울 종로구 송현동 부지. 경향신문 자료사진

가칭 ‘이건희 기증관’ 건립 예정지인 서울 종로구 송현동 부지. 경향신문 자료사진

①비정상적인 추진 속도와 사회적 공론화 부재

시민모임은 “2021년 4월 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소장품의 기증이 결정된 이후, 1년도 채 되지 않은 기간 동안 기증관에 대한 구상, 추진계획, 관계부처 협의, 부지 결정 과정이 충분한 논의와 공론화 과정 없이 진행됐다. 기증관이 연면적 3만㎡ 규모의 대규모 국가 예산이 예상되는 사업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국가문화정책과의 연계성, 기증품에 대한 검증, 지역별 균형발전과의 연계성, 기증관의 지속가능성, 기증관의 시설·예산·인력·프로그램 등과 같은 운영요건에 대한 충분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했다.

기증관 건립 문제를 두고 공청회나 설명회도 열리지 않았다. 시민모임은 “이 점이 공론화 부재에 대한 문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했다.

시민모임은 지나치게 빠른 건립 추진 과정 때문에 다양한 쟁점들에 대한 공론화 과정이 부재했다고 지적했다. “전문가 7인으로 구성된 ‘국가기증 이건희 소장품 활용위원회’(이하 위원회)가 사실상 이러한 공론화 과정을 대체하고 있다”고도 했다. 위원회의 위원들이 “정부 산하 기관장이나 공무원 출신, 수도권 인사들이 주를 이루고, 미술과 문화재와 같은 특정 장르에 편중”된 점도 지적했다.

문화연대는 10여 차례 진행된 위원회 회의 녹취록을 정보공개 청구했다고 한다. 시민모임은 “문화체육관광부 측은 공공기관의 정보공개에 관한 법률 제9조 제1항 제5호(공개될 경우 업무의 공정한 수행이나 연구·개발에 현저한 지장을 초래), 6호(개인정보로서 공개될 경우 사생활의 비밀 또는 자유를 침해할 우려)를 근거로 설득력 없는 이유를 대며 회의록 공개를 거부했다”며 “국민의 관심이 높은 사안에 대해 결정과정을 비공개하는 것은 정부의 정책 과정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해칠 수 있고, 정보공개를 통한 국민의 알권리를 침해하고 있다”고 했다.

‘이건희 기증관’ 건립 추진 일정. 이건희 기증관 건립 졸속 추진 반대 시민사회단체모임  제공

‘이건희 기증관’ 건립 추진 일정. 이건희 기증관 건립 졸속 추진 반대 시민사회단체모임 제공

②문화균형발전 원칙에 위배되는 수도권 집중 문제

시민모임은 전국 미술관 229곳(2017년 기준) 가운데 41%가 수도권(서울·경기·인천)에 몰린 점도 거론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대선공약으로 ‘지역 간 문화격차 해소를 통한 문화균형발전’을 제시했고, 문체부도 문화균형발전이 주요 정책 기조임을 밝혀온 점을 지적했다. 시민모임은 “문체부는 송현동 부지 선정에 접근성을 중요한 이유로 꼽고 있으나, 해외의 유명 박물관·미술관의 경우 접근성이 낮지만 높은 인지도와 방문객 수를 기록하는 시설들이 있다는 점에서 꼭 수도권일 필요는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고 했다.

③송현동 부지 매입 및 등가교환 과정의 문제점

송현동 부지는 1945년 해방 이후 미국대사관 직원 숙소로 수십 년간 활용됐다. 숙소 이전에 따라 1997년 국방부가 삼성에 1400억원에 매각했다. 2008년 삼성은 대한항공에 2900억원에 팔았다. 대한항공의 관광호텔 건립 계획은 무리한 추진 과정과 시민사회의 반대로 무산됐다. 서울시는 2020년 이곳에 문화공원을 조성하기로 결정했다. 지난 3월 국민권익위원회 중재로 대한항공이 송현동 부지를 서울시에 매각하되, 매각대금은 LH가 지급하고 서울시는 해당 보상액에 준하는 시유지를 LH에 제공하는 방안에 합의했다. 서울시는 송현동 부지와 맞교환할 부지로 구 서울의료원(남측) 부지를 결정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지난달 10일 송현동을 이건희 기증관 건립 부지로 결정했다. 서울시와 기증관 건립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송현동 부지 일지’. 이건희 기증관 건립 졸속 추진 반대 시민사회단체모임 제공

‘송현동 부지 일지’. 이건희 기증관 건립 졸속 추진 반대 시민사회단체모임 제공

시민모임은 “서울시가 송현동 부지를 시세 수준으로 매입하겠다는 것도 재벌에 대한 특혜이자, 예산낭비의 사례로 볼 수 있다”고 했다. 송현동 부지는 2021년 1월 공시지가 기준 3762억원이다. 서울시는 토지 보상비로 4620억 원을 책정한 적이 있다. 시민모임은 “송현동 부지 매입가는 5000억원 정도로 예상된다”고 했다. 시민모임은 “문화체육관광부가 교환할 국유지 역시 지역의 맥락이나 상황, 여러 조건 등을 고려하여 신중히 결정되어야 한다. 하지만, 송현동 부지 이전을 위해서 이러한 측면들은 크게 고려되고 있지 않으며, 어떠한 부지로 할 지 결정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송현동 부지와 교환을 확정하는 것은 절차상으로도 적절하지 않다”고 했다.

④박물관·미술관 정책과의 충돌과 기증관의 모호한 정체성

시민모임은 “박물관·미술관 정책의 흐름과는 맞지 않는 방식으로 이건희 기증관 설립이 마치 독립적 사업인 양 진행되고 있다”고 했다. 이들은 “‘박물관·미술관 진흥 중장기 계획(2019~2023)’에 따르면 생활 문화기반시설로서 박물관·미술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지역공동체에 사회·문화적으로 기여할 방안을 제시했다. 균형발전과 지방분권 강화라는 기조 아래 박물관·미술관 진흥정책 수행체계를 재정비하고, 지자체의 역할 강화 필요를 역설했다”며 정책과의 충돌 문제를 짚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구상하는 ‘수장고+전시장+학예실’ 형태의 융합형 기증관 계획을 두고도 “국립현대미술관과 국립중앙박물관을 뛰어넘는 시설과 직제 구조를 만들겠다는 의미다. 이는 기존의 박물관·미술관의 운영체계를 무너뜨리게 되며, 기존 시설과 이건희 기증관의 위상과 정체성에서 혼란을 야기한다”고 했다.

유족 측은 기증처로 국립중앙박물관 2만1693점, 국립현대미술관 1488점, 광주시립미술관 30점, 전남도립미술관 21점, 대구미술관 21점, 강원도 양구 박수근미술관 18점, 제주 이중섭미술관 12점을 정했다. 시민모임은 “문화체육관광부 측이 ‘삼성가가 국가에 기증한 것이므로 국립기관의 소장처 이관은 아무 문제 없다’고 하지만, 소장처를 이관하는 절차나 협의 과정, 명분이라는 측면에서 충분히 설득되지 않는다”고 했다. 이들은 “‘이건희 컬렉션’이라는 특정 인물의 기증품을 중심으로 박물관·미술관이 만들어지는 경우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동일 인물이 기증했다는 이유만으로 하나의 시설에 소장되는 것은 시설의 정체성 및 목적이 모호하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했다.

⑤시민 공간으로서 송현동 부지의 역사·문화·사회적 가치와 충돌

경복궁 동쪽에 있는 송현동 부지는 지리적으로 경복궁과 창덕궁을 잇는다. 왕실 종친들의 주택과 왕실 사당들이 있던 자리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식산은행의 사택부지로, 해방 후 미국대사관 직원 숙소로 활용됐다. 시민모임은 “조선시대에는 궁중문화의 중요 공간이었고, 근대에는 굴곡의 근대사를 함께해 온 역사문화적으로 중요한 지역이라는 점에서 우리나라 역사를 상징하고 아우르는 대표성 있는 공간으로 조성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송현동 부지를 특정 개인이나 기업의 기증품을 전시하기 위한 공간으로 활용한다는 것은 송현동이 가지고 있는 역사, 문화적 의미와 가치에 반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들은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고 개입하는 과정을 통해서, 시민 주도 방식으로 만들어가는 민주주의 과정의 결과로서 송현동 부지가 조성될 필요가 있다”고 했다.

⑥관광수입 창출을 위한 경제적 효과에만 지나치게 집중되는 문제

‘이건희 기증관’ 부지로 결정된 서울 종로구 송현동 부지.

‘이건희 기증관’ 부지로 결정된 서울 종로구 송현동 부지.

문화체육관광부는 ‘국가 기증 이건희 소장품 활용방안’에서 제시한 4가지 기본원칙 중 하나로 ‘문화적·산업적 가치 창출을 통한 문화강국 이미지 강화’를 들었다. 관광객의 방문이 많은 외국의 유수 박물관(루브르 박물관, 대영박물관)과 같은 인지도 높은 박물관·미술관 건립을 통해, 광화문-송현동 일대를 부가가치 창출 및 상업적 가치가 높은 세계적인 문화관광지구(워싱턴의 내셔널몰, 베를린의 박물관섬)를 추진하겠다고 했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송현동은 경복궁, 광화문광장, 서울공예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을 비롯해 세종문화회관, 북촌·인사동이 인접해 있어 기증관 건립의 최적지이다. 기증관 건립을 통해 광화문 일대가 세계적인 역사·문화·관광지대(벨트)로 발전하고, 서울이 세계 5대 문화·관광 도시로 도약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했다.

시민모임은 “송현동 부지의 역사·문화적 가치와 송현동 부지를 둘러싼 다양한 논란과 쟁점, 시민과 지역주민의 요구에 대한 고려보다는 기증관의 입지 조건만 고려해 경제적 파급효과와 경쟁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지에 대한 판단으로 평가를 진행했다. 광화문-송현동 일대에 대한 다양한 맥락과 가치들이 상업화라는 명분에 묻혀버리는 부정적 효과를 만들고 있다”고 했다.

오세훈 서울시장(왼쪽부터)과 김영나 국가기증 이건희 소장품 활용위원회 위원장, 황희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지난 11월10일 서울 종로구 서울공예박물관 옥상에서 이건희 기증관 건립 예정지인 송현동 부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사진공동취재단

오세훈 서울시장(왼쪽부터)과 김영나 국가기증 이건희 소장품 활용위원회 위원장, 황희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지난 11월10일 서울 종로구 서울공예박물관 옥상에서 이건희 기증관 건립 예정지인 송현동 부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사진공동취재단

⑦기증품의 검증 과정 부재 및 구입과정에 대한 의혹

시민모임은 “(이건희 기증품 1만1023건, 2만3000여 점 중) 일부 작품은 언론보도와 특별전시회 등을 통해서 알려졌으나, 기증품 전체 목록과 구체적인 작품명에 대해서는 현재까지도 공개되지 않고 있다. 기증품은 어디까지나 국가와 행정이 관리·운영하는 것이고, 국민 모두의 것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기증품과 관련한 자료를 공개하지 않는 것은 국민에 대한 권리 침해”라고 했다.

이들은 2007년 삼성 법무팀장을 지낸 김용철 변호사가 삼성가가 고가의 미술품 구입으로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폭로 등을 두고 “작품 출처, 구입 및 소장 경위를 정확하게 규명해야 한다. 도난품·도굴품인지에 대한 조사도 필요하다”고 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 전문인력을 투입해 기증품 등록·조사·연구·데이터베이스 구축을 2023년까지 완료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시민모임은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의 경우 만성적인 인력난을 겪어왔고, 최근 ‘미술품 물납제’의 도입으로 기증품이 증가하면서 그 문제가 더 심해지고 있다. 기증품 검증 과정에 대한 제도적 개선도 필요하다”고 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이건희 기증작’ 특별전 언론 공개회(7월20일) 중 기자들이 ‘인왕제색도’ 앞에서 박물관 관계자의 설명을 듣고 있다. 김종목 기자

국립중앙박물관의 ‘이건희 기증작’ 특별전 언론 공개회(7월20일) 중 기자들이 ‘인왕제색도’ 앞에서 박물관 관계자의 설명을 듣고 있다. 김종목 기자

⑧이건희 명칭 사용의 적절성과 삼성 특혜 논란 의혹

시민모임은 국가 예산을 투입하는 공공문화시설에 ‘이건희’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적절한 지도 짚었다. “이건희라는 인물에 대한 정당한 평가, 컬렉션 수집 과정의 의혹, 컬렉션에 대한 조사 및 연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채 이건희라는 이름이 공공의 미술품과 문화재를 상징하는 이름으로 기억되는 것”이 적절한가라고 묻는다. 이건희 컬렉션 기증과 이재용 부회장 사면 등을 두고 “여러 논란에도 이건희 기증관 건립을 강행하는 정부의 태도는 (삼성에 대한 특혜 의혹) 의심이 커질 수밖에 없도록 한다. 투명한 논의 과정과 적절한 절차를 통해 이런 의혹들을 풀어나가는 과정들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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