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골목·자본의 만남 ‘쌈지길’…상업공간서 이뤄진 ‘보존·소통의 실험’

2021.12.27 21:38 입력 2021.12.27 21:49 수정
박정현

1990년대와 2000년대 ‘길’

서울 인사동 ‘쌈지길’은 상업 건물에 길을 도입한 가장 극적인 사례이다. 부동산으로 가치를 최대한 확보하면서 오래된 도시 풍경 속에 녹아들어야 하는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건축가 최문규가 취한 전략은 ‘길’을 건축물의 일부로 만드는 것이었다.  인사동 길을 걷는 시민들은 실제로는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고 느끼지 못한 채 건물 안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중정으로 들어가게 된다. 강윤중 기자

서울 인사동 ‘쌈지길’은 상업 건물에 길을 도입한 가장 극적인 사례이다. 부동산으로 가치를 최대한 확보하면서 오래된 도시 풍경 속에 녹아들어야 하는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건축가 최문규가 취한 전략은 ‘길’을 건축물의 일부로 만드는 것이었다. 인사동 길을 걷는 시민들은 실제로는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고 느끼지 못한 채 건물 안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중정으로 들어가게 된다. 강윤중 기자

수십년간 서울을 비롯해 전국 도시의 땅은 쉴 새 없이 뒤엎어졌다. 도심재개발, 신도시 건설, 재개발과 재건축 등 이름은 달랐지만 각종 건설 사업은 결국 기존 흔적을 지우고 백지로 만든 뒤 건물을 올리는 것이었다. 간척지, 산, 논밭, 주거지 등 자연과 삶의 자취는 중장비 앞에서 사라져갔다. 거의 모두가 극적으로 달라진 모습을 발전의 증거라고 믿었다. 지방과 서울, 상계동과 을지로를 가리지 않고 수용권을 동원해 폭력적으로 재개발되었다. 이에 대한 반발이 본격적으로 제기된 때는 1987년 민주화 이후다.

1990년 30대 젊은 건축인들은 전면 철거 대신 소단위로 사업을 진행하고, 원거주자를 쫓아내지 않는 재개발 방식을 모색해야 한다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1991년 서울 가회동 일대가 한옥지구에서 해제되어 개발된다는 소문이 무성하자, 40대 건축가들이 지역주민들과 함께 보존과 전면 재개발 사이의 가능성을 찾기도 했다. 빈 서판을 만들 듯 모든 것을 지워버리는 개발에 반대한 이런 시도들은 낙후된 건물은 어쩔 수 없이 철거하더라도 오래된 도시의 조직, ‘길’을 보존하려 했다.

길, 그중에서도 ‘골목길’은 도시의 긴 역사가 찍어낸 흔적이자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이 남긴 자취였으며, 건물이 바뀐 뒤에라도 기억을 잇는 무엇이었다. 골목길에 대한 향수 어린 감상을 접어두더라도 한국 도시의 골목길은 로마 도시가 기원이 되곤 하는 유럽 도시의 길과 사뭇 다르다. 길고 복잡한 이야기를 생략하고 오해를 무릅쓰고 말하면 로마 도시는 길부터 만들었다. 공공의 것인 길이 있어야 사적인 개별 필지가 존재할 수 있었다. 반면 서울에서는 각각의 필지들이 먼저 자리를 잡았다. 이 땅들 사이에 길이 나 골목길이 되었다. 그래서 골목길은 법적으로는 공공장소일지 몰라도 점유되고 사용되는 방식은 사적인 경우가 많다. 골목길에서 추억과 향취를 느끼는 이들은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이 뒤섞여 펼쳐지는 풍경을 이야기하곤 한다.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이 중첩되고, 이웃과의 소통과 만남이 일어나는 골목길을 어떻게 보존할지를, 어떻게 더 만들어낼지를 두고 많은 건축가들이 씨름했다. 이 길이 도시와 건축이 만나는 방법을 풍성하게 만들고, 사유화되어 가는 도시에 맞서는 방패가 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낭만적이고 낙관적인 이 생각은, 1990년대 한국 건축의 특징으로 꼽을 수 있는 독특한 유형의 건축물을 생산해내는 동인이 되었다.

‘깍두기’ 닮은 5층 남짓 근린생활시설들
1990년대 도시계획 타고 ‘우후죽순’
도시의 길도 공적·사적 공간 뒤섞이자
건축가들, 건물에 ‘골목길’ 설계 고심

서울 ‘양재 287.3’엔 출입문·창 없애고
외부 계단 만들어 ‘길의 연장’ 주목받아
대지 더 넓은 ‘대학로 문화공간’도 계단
시민들에게 공공성 지닌 숨구멍 공유

건축가 조성룡의 ‘양재 287.3’이 대표적인 예다. 1980년대 말 양재동 일대는 필지만 구획된 채 건물은 들어서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 올림픽 이후 개발 열풍과 함께 땅값이 폭등하자, 1990년 노태우 정부는 토지공개념을 주장하며 건물을 짓지 않고 내버려두면 투기로 보고 세금을 부과했다(토지초과이득세로, 1998년 폐지되었다). 그러자 5층 남짓의 근린생활시설(이하 근생)이 우후죽순으로 들어섰다. 도시계획에 따라 깍두기 썰 듯 조성된 100평 남짓의 땅에 따라야 할 규범이나 존중해야 할 맥락이 있을 리 없었고, 근생의 존재 이유는 임대소득이었다. 건축으로 도시에 공공성을 불어넣어야 한다고 믿는 건축가들이 이곳에서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조성룡은 양재동 주소 이름을 딴 근생 건축물 ‘양재 287.3’에 출입문과 창이 없는 외부 계단을 도입했다(이후 출입문과 창이 설치된다). 건축가는 “길의 연장”인 이 계단이 개발의 광풍이 잦아들면 “공적 공간으로 개방”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3층 이상 이어지는 개방된 외부 계단이 한쪽에 붙은 근생이 무척 익숙하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익숙함이 ‘양재 287.3’ 유형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를 증명한다. 층별로 임대하는 근생 건물에서 유일하게 공적인 성격이 있는 계단을 실내에 두지 않고 외부에 노출시킨 이 유형은 전국에서 수없이 반복되었다. 이 계단이 건축가의 기대만큼 길로 보기 힘들다 하더라도 계단이 내부에 배치된 꽉 막힌 입방체 건물에 비해 거리를 덜 답답하게 만드는 것은 확실하다.

건물 안으로 길을 끌어들이는 수법은 당연히 대지가 클 때 더 효과적이기 마련이다. 1996년 승효상의 작업 ‘대학로 문화공간’은 대지와 건물 모두 ‘양재 287.3’보다 두 배 이상 큰 규모다. 두 필지를 합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건물을 가로지르는 문자 그대로의 길이 도입된다. 100m 이상 이어지는 블록을 끊고 건물 앞뒤의 도로와 연결하는 길이었다. 승효상은 “밀도 있고 사연 있는 골목길”이 되기를 희망했고, 이 길을 수직 계단과 연결했다. 창이나 문으로 막혀 있지 않은 이 길과 계단은 건물이 도시와 만나는 면을 다채롭게 하며, 미로 같은 계단의 공간감은 근생 건물에서 좀처럼 마주하기 힘든 종류다. 이런 시도들은 반듯한 바닥 면적을 최대한 제공하는 것이 최상의 미덕인 상업 건물이 최소한의 공공성을 지니게 하는 숨구멍들이었다. 공원이나 광장 같은 공공 공간을 공유하지 못하는 근생 밀집지역에서 건축이 도시와 만나는 방식을 고민한 결과였다. 건물로 들어온 길은 1990년대 건축의 조형적 특성이자 윤리적 장치였다.

1990년대 서울에 임대수익을 위해 똑같이 생긴 ‘근린생활시설’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선 뒤 건축가 조성룡이 공공성을 불어넣고자 ‘양재동 287.3’에 출입문과 창이 없는 외부 계단을 도입했다(위 사진). 1996년 승효상의 ‘대학로 문화공간’에 건물을 가로지르는 길이 도입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박정현 건축비평가 제공

1990년대 서울에 임대수익을 위해 똑같이 생긴 ‘근린생활시설’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선 뒤 건축가 조성룡이 공공성을 불어넣고자 ‘양재동 287.3’에 출입문과 창이 없는 외부 계단을 도입했다(위 사진). 1996년 승효상의 ‘대학로 문화공간’에 건물을 가로지르는 길이 도입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박정현 건축비평가 제공

문화지구인 서울 인사동의 ‘쌈지길’
방문자들 시선 안팎 모두 머물 수 있어
‘건물 아닌 길’로 여길 정도 최고 명소로

1990년대 근생의 길은 ‘윤리’ 물었다면
2000년대 쌈지길은 ‘자본’ 흐름에 공생

상업 건물에 길을 도입한 가장 극적인 예는 서울 인사동 ‘쌈지길’이다. 문화지구로 지정된 인사동 일대는 모든 간판을 한글로 표기하고 전통문화 관련 업종이 아니면 영업을 제한하면서 한국적인 것과 주변 맥락을 강조한다. 서울에서 가장 보행자를 우선시하는 인사동에서 대부분의 활동은 거리와 거리에 면한 1층에서 일어난다. ‘인사동 문화의 거리’에 늘어선 기념품과 전통공예품을 판매하는 작은 상점들, 좌우로 이어지는 좁은 길을 따라 펼쳐진 식당들을 찾는 이들은 좀처럼 위로 발길을 옮기지 않는다. 카페와 찻집이 있는 2층 정도가 소매활동이 일어나는 최대 높이다. 이 거리 한가운데 쌈지길이 있다. 잘게 나뉜 주변 필지에 비하면 450평 규모의 쌈지길은 대단히 큰 땅이다. 주변의 한옥과 작은 건물에 비하면 4~5층 건물도 거대해 보일 수 있다.

매스를 조절해 거리에서 건물이 크게 보이지 않도록 하고, 작은 상점들이 이어지는 거리의 맥락이 끊어지지 않게 하면서, 모든 층에서 소비가 일어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건축가가 풀어야 할 과제였다. 요컨대 부동산으로서의 가치를 최대한 확보하면서, 오래된 도시 풍경 속에 녹아들어야 했다. 더구나 이곳이 대형 건물로 재개발되는 것을 막기 위해 시민들의 반대 서명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기에, 전면 재개발과 대형 건물이 아니어도 땅의 잠재적 자본을 끌어낼 수 있음을 보여주어야 했다.

건축가 최문규의 전략은 ‘길을 건축물로 만드는 것’이었다. 주변 작은 상점처럼 보이는 한 동이 길의 윤곽을 따라 배치된다. 지붕 위의 잔디와 나무도 이 건물이 거리의 일부처럼 보이게 한다. 그 옆에 열린 입구는 사람들을 자연스레 건물 안으로, 더 정확히는 부지 안으로 유인한다.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큰 중정과 마주하고 길이 연장되어 펼쳐지는 듯한 건물로 발걸음을 옮기게 된다. 그리 크지 않은 중정이지만 인사동처럼 밀집된 가로에서 개방감을 제공하기에는 부족하지 않다. 행인을 위층으로 유도하는 데 걸림돌이 되곤 하는 계단도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일단 계단에 발을 디뎠다면 끝까지 한 바퀴 돌고 내려오는 것은 시간문제다. 어떤 상점이 있는지 궁금해서, 앞뒤로 또 건너편에서 산책하듯 걷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리고 인사동의 풍경을 내려다보며 4층까지 올라간다. 쌈지길에 가본 적이 있다면 대부분 공감할 것이다. 건축가는 모든 시선을 중정으로 향하게 하지 않았다. 서쪽 면에서 보행로는 건물 바깥쪽에 배치되어 인사동 거리 쪽으로 방문자의 시선을 이끈다. 다시 돌면 중정이 보이고 한 층 더 올라가면 다시 외부로 눈길을 돌리게 된다. 많은 비평가들이 다공성으로 묘사한, 열렸다 닫혔다 하는 이 건물은 시선의 교차와 변화를 부여한다.

2006년 문을 열자마자 쌈지길은 엄청난 화제를 모으며 순식간에 인사동 최고의 명소로 떠올랐다. 흥미로운 점은 사람들이 이 건물을 건물이라기보다 길로 여겼다는 점이다. 많은 건축가들이 공을 들이는 기하학적 비례에 무심한 듯한 외관도 이런 인상을 더한다. 기능과 목적으로는 여느 쇼핑몰과 다를 바 없는 곳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백화점과 쇼핑센터는 방문자의 시선이 입점한 점포 바깥으로 흐르는 것을 원천봉쇄하는 것을 기본으로 삼는다. 계절과 날씨, 시간을 차단하는 백화점에서 창은 금물이다. 보행로가 외기에 면하는 교외 아웃렛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의 눈길은 더 오래 상품에 머물러야 한다. 쌈지길이 여느 쇼핑몰과 다른 것은 외부의 길이 확장된 것처럼 느껴지게 하고, 시선을 내부에 가두지 않는 장치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개장 초기 몰려든 방문객에 비해 정작 쌈지길 안에서 물건을 사는 이들이 적자, 운영자는 소액의 입장료를 받기로 한다. 입장료 3000원에 해당하는 상품권을 주어 쌈지길 내 상점에서 물건을 살 수 있고, 쌈지길 내 갤러리에 앤디 워홀 같은 유명 아티스트의 작품이 전시되기도 하니 큰 무리는 아니라는 설명이었다. 그러나 이 방침은 심한 반발에 부딪혀 이내 철회된다. 길을 막고 입장료를 받는 것은 억지라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쌈지길은 건물이 아니라 길, 단위 면적당 매출이 제1순위인 상업 공간이 아니라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길이어야 했던 것이다.

1990년대 근생의 길과 2000년대 쌈지길은 사뭇 다르다. 전자가 자본에 침윤되어 가는 도시에서 건축이 윤리적일 수 있는지 묻는 것이었다면, 후자는 자본의 흐름에 적극 동참하면서 그 속에서 다른 행위가 일어날 수 있는지 실험한 것이었다. 각각 1987년 민주화와 1997년 IMF 구제금융 이후의 시대 조건에 대응하는 건축의 최전선이었다. 이 길들은 지금 어디로 이어지고 있을까.

■박정현

[콘크리트와 글로 빚은 20세기 한국 건축](8)골목·자본의 만남 ‘쌈지길’…상업공간서 이뤄진 ‘보존·소통의 실험’


서울시립대학교 건축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건축은 무엇을 했는가: 발전국가 시기 한국 현대 건축>을 비롯해 <김정철과 정림건축>(편저), <전환기의 한국 건축과 4.3그룹>(공저) 등을 쓰고, <포트폴리오와 다이어그램> <건축의 고전적 언어> 등을 번역했다.

2018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국가 아방가르드의 유령’ 등의 전시에 큐레이터로 참여했다. 현재 도서출판 마티에서 편집장으로 일하며 건축 비평가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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