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이 매끈한 곡선 위에 서울의 역사는 들러붙을 수 없었다

2022.01.24 21:47 입력 2022.01.24 21:48 수정
박정현

한국식 랜드마크 동대문디자인플라자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를 설계한 건축가 자하 하디드는 이 공간이 가진 지형, 방위, 주변도로, 건물 내 공간의 크기와 수용 예상 인원 등을 치밀하게 수치화해 설계했다는 점에서 ‘장소 특정적’이라고 본다.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다른 공간감을 느낄 수 있다는 점(아래 작은 사진)에서도 그런 설명이 일견 이해된다. 빼어난 완성도와 공간감에도 불구하고, 개관 8년이 되도록 이 공간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인증용 사진의 배경으로 주로 쓰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박정현·셔터스톡 제공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를 설계한 건축가 자하 하디드는 이 공간이 가진 지형, 방위, 주변도로, 건물 내 공간의 크기와 수용 예상 인원 등을 치밀하게 수치화해 설계했다는 점에서 ‘장소 특정적’이라고 본다.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다른 공간감을 느낄 수 있다는 점(아래 작은 사진)에서도 그런 설명이 일견 이해된다. 빼어난 완성도와 공간감에도 불구하고, 개관 8년이 되도록 이 공간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인증용 사진의 배경으로 주로 쓰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박정현·셔터스톡 제공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이 빚은 ‘건물+관광+도시재생+미술’ 이미지
DDP는 서울이 그 열망의 대열에 합류한 결과물

1997년 스페인 빌바오에 문을 연 구겐하임 미술관은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스페인 북동부 바스크 지역의 거점인 빌바오는 공업 및 무역 도시였다. 철강 및 조선업이 쇠락하면서 침체되었던 도시의 활력은 구겐하임 미술관 개관과 함께 되살아났다. 전시장과 공연장이야 사람들을 유인하는 오랜 수단이었지만, 미국 건축가 프랭크 게리가 설계한 구겐하임 빌바오만큼 도시의 인지도와 경제를 극적으로 바꾼 경우는 없었다. 개관 후 첫 3년 동안 400만명의 관광객과 6000억원이 넘는 수입을 도시에 안겨주었다. 분리독립을 주장하는 바스크 지역의 움직임이나 유럽 조선업의 몰락을 소개하는 기사에서나 언급되곤 하던 빌바오를 이제 모르는 사람은 없다. 여러 매체를 통해 끊임없이 재생산된 구겐하임 빌바오의 매끈하고 번쩍이는 표면, 이전에 본 적 없는 파격적인 형태는 사람들의 관심을 단번에 낚아챘다. 이 자태는 건물 내·외부의 유기적 관계 같은 건축의 고전적인 물음은 말할 것도 없고, 건물을 의미소통의 기호로 여기곤 한 포스트모더니즘도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구겐하임 빌바오는 오랜 유럽 도시의 맥락에서 완전히 자유로웠고 하나의 이미지가 되었다.

건물과 관광과 도시재생과 미술이 한 덩어리로 빚은 이미지는 열망을 낳았다. 스타 건축가가 설계한 낯설고 새로운 형태의 미술관과 박물관, 공연장이 도시에 활력을 부여할 수 있다는 환상이었다. 시간을 다투며 전 세계 도시에 속속 들어섰다. 미국의 시애틀(팝문화박물관, 2000), 로스앤젤레스(월트디즈니콘서트홀, 2003), 중국의 광저우(오페라하우스, 2002), 하얼빈(오페라하우스, 2010), 난징(국제청소년문화센터, 2015), 내몽골 자치구 캉바스(오르도스박물관, 2017), 프랑스 메츠(센터퐁피두, 2010), 아제르바이잔 바쿠(하이덜알리예프센터, 2012), 아랍에미리트연합 아부다비(루브르박물관, 2017), 카타르 도하(국립박물관, 2019)로 이어진다.

서울도 이 자본과 욕망의 대열에 합류했다. 2006년 7월 당선된 오세훈 서울시장은 동대문운동장을 허물고 “세계적인 수준의 공원과 디자인센터”를 건립하기로 결정했다. 청계천 복원으로 동대문운동장에 대한 재개발 압력이 커져 있던 참이었다. 같은 해 12월 아이디어 공모가 있었고, 2007년 8월 국내 건축가 4인(유걸, 조성룡, 승효상, 최문규)과 해외 건축가 4인(자하 하디드, 스티븐 홀, MVRDV, FOA)을 초청해 국제지명현상설계를 개최했다. 정부나 지방자치단체로서는 처음 시도하는 방식이었다.

서울의 도심이 대개 그렇듯 동대문운동장 일대에는 수백년의 역사가 누적되어 있다. 청계천과 동대문에 면해 있고 낙산에서 내려오는 서울 성곽이 지나가는 곳이다. 1923년 일제는 성곽을 허물고 이곳에 종합운동장을 지었고 해방 후인 1959년 야구장이 건립됐다. 1982년 시작된 프로야구의 첫 한국시리즈가 이곳에서 치러졌고, 잠실야구장으로 프로구단이 옮겨간 뒤에도 아마추어 야구의 중심지였다. 기능을 다한 종합경기장은 2000년 이후 주차장과 풍물시장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인근은 창신동 일대의 봉제 공장을 비롯한 여러 제작업체, 평화시장을 중심으로 한 의류 유통업체가 거미줄처럼 펼쳐져 있는 의류산업 지역이었다. 복잡한 장소에 걸맞게 프로젝트의 과제 역시 만만치 않았다. 인근 패션산업을 엮어내는 거점이면서 주변 상인과 지역민을 위한 공원이어야 했고, 전시 및 회의 등의 기능이 다 들어간 복합문화시설이면서 ‘세계적인 관광명소’이자 ‘랜드마크’가 될 만한 외관을 지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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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의 관건은 이 복잡다단한 장소의 성격을 어떻게 풀어내는지에 달려 있었다. 여러 건축가들이 장소에 켜켜이 녹아 있는 구체적인 흔적을 통해 이곳의 과거를 드러내 보였다. 조성룡과 승효상뿐 아니라, MVRDV나 FOA도 동대문운동장 관람석의 일부를 남겼고, 대지를 가로질러 서울성곽이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게 하는 접근을 취했다. 이들에게 장소는 무엇보다 과거의 추억 위에 새로운 기억이 더해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어야 했다. 장소성을 역사나 기억 같은 추상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은 이도 있었다. 자하 하디드는 시간대에 따라 달라지는 차량과 사람들의 흐름, 지표면의 높이, 대지를 둘러싼 건물들의 높이 등 물리적 데이터를 우선시했다.

당선은 자하 하디드의 몫이었다. 2008년 국제 금융위기가 터지기 전, 매끈한 곡선을 뽑아내는 스타 건축가들은 랜드마크를 원하는 도시에서 크게 환영받았다. 구겐하임 빌바오 같은 충격을 도시에 미치기 위해서 건축은 과거의 흔적을 모른 척해야 했다. 아무것도 들러붙을 수 없는 표면을 제시한 자하 하디드의 당선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1980년대 마르크스주의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은 주변의 모든 것을 반사시켜 배척하는 거울 같은 유리 마천루를 후기자본주의의 문화를 대변하는 건물로 꼽은 바 있다. 이제 건축은 거울처럼 마주할 평평한 면을 찾기 힘든 모습으로 바뀌었다. 굳이 반사해낼 필요도 사라졌다.

장소성을 역사나 기억 대신 차량·사람의 흐름, 지표면 높이 등
물리적 데이터로 해석한 자하 하디드의 작품공간의 완성도는 훌륭하나
여전히 관상용일 뿐…‘활용방안 없이 일단 짓는다’는 점에서 역설적으로 한국적이다

당선 직후부터 비판적인 목소리가 불거져 나왔다. 공사 도중에 조선 시대의 유구가 발굴되면서 공사 중단과 설계 변경, 비용 증가가 잇따르자, 자하 하디드의 장소 해석이 오랜 역사를 지닌 서울 도심에 시민의 세금으로 짓는 공공건축물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의견이 더 힘을 얻었다. 2013년 초 실시된 설문조사 ‘한국 현대건축의 빛과 그림자’ 명작 30선과 태작(솜씨가 서투르고 보잘것없는 작품) 20선에서 동대문디자인플라자(이하 DDP)는 태작 5위에 오른다. 공사가 끝나기도 전의 일이었다. 건축의 공공적이고 윤리적인 측면을 우선시하는 건축계의 정서가 짙게 배어 있는 결과다.

흥미로운 지점은 자하 하디드와 그의 파트너 패트릭 슈마허가 DDP를 장소에 맞게 만들어진 결과로 자평한다는 점이다. 그들에 따르면 “이 설계는 맥락, 지역 문화, 필요한 프로그램, 혁신적 엔지니어링이 하나로 합쳐진 ‘특정한’ 결과다. 건축, 도시와 조경이 한데 어우러져 형태적이고 공간적인 경험을 선사한다. 서울에 맞는 완전히 새로운 시민 공간을 만들었다”. 건축가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을 이유는 없지만, 맥락과 장소를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어디서 이런 차이가 생겼을까? 이는 그들이 ‘파라메트리시즘’(parametricism)이라 부르는 방법에서 기인한다.

단독주택을 설계한다고 상상해보자. 우선 평면도를 그린다. 많은 이들이 종이에 원이나 사각형으로 큰 방, 작은 방, 거실, 욕실, 부엌, 서재 등을 이리저리 그리며 배치해볼 것이다. 땅에 어떻게 집을 앉힐지, 또 방들의 크기와 관계를 고려해 나가다 보면, 배치가 얼추 마무리되었을 무렵 스케치는 하나의 깨끗한 선으로 그려진 것이 아니라 여러 선으로 어지럽게 덧그려지게 마련이다. 형태를 부여하는 전통적인 건축가의 역량은 지금부터 발휘된다. 지우고 고치느라 어지러운 수없이 많은 선들 사이에서, 기능을 충족하면서 비례와 질서를 이루는 하나의 선을 찾아내 평면도를 확정하는 것이 실력이다. 이렇게 확정된 한 가닥의 선은 창이 되고, 벽이 된다.

자하 하디드와 패트릭 슈마허의 파라메트리시즘은 종이 위에서 선을 무수히 그려가며 특정한 형태를 찾아가는 과정을 생략한다. 대신 미리 설정되어 있는 컴퓨터 프로그램에 여러 매개 변수(파라미터)를 입력한다. 지형, 방위, 주변 도로 같은 대지의 조건, 건물에 필요한 여러 공간의 크기와 사람들의 동선 등이 매개 변수가 된다. 이 변수에 따라 프로그램이 다양한 조건을 조정해 건물의 형태를 만들어낸다. 이렇게 산출된 형태를 전통적인 비례나 미적 규범으로 재조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과정은 생산 및 건설 시스템으로 직결된다. 자하 하디드만의 스타일과 낯선 형태에도 불구하고 ‘장소 특정적’이라는 것이다.

동대문 일대에서 도출된 매개 변수를 통해 만들어졌기에 DDP는 유일무이한 결과물이라는 것이 그들의 설명이다. 장소를 역사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은지, 물리적 조건을 우선시하는 것이 맞는지 간단히 말하기는 어렵다. 그 장소가 어딘지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답이 나올 수 있다. 역사의 무게가 언제나 현재의 상황보다 더 무겁다고 말하기도 힘들다. 자하 하디드는 전자보다 후자를 택했다. 기억과 역사를 수량화해 매개 변수로 만들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들의 장소 해석에서 눈에 띄는 점, 그리고 완공 이후 실제로 확인할 수 있는 특징은 대지 전체의 배치다. 전시 공간과 부대 시설 등은 동대문 역사문화공원역과 청계천으로 이어지는 남쪽과 서쪽에 몰려 있고, 신당동에 면한 동쪽은 거의 온전히 비워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이는 다른 건축가들의 안에서는 볼 수 없던 배치다.

공원에 유구전시장과 동대문운동장기념관 등이 있지만 작은 규모와 지형 때문에 좀체 눈에 띄지 않는다. 거대한 DDP 때문에 상대적 크기는 더 위축된다. 언제나 붐비는 서쪽 도로변의 교통량과 소음을 DDP가 가려주기에 공원은 주변에서 드문 고요함마저 느낄 수 있다. 동대문운동장에 가려 있던 동쪽으로 눈길을 돌리는 것도 예전에는 없던 경험이다. 장충단로에서 바라보는 DDP, 전철역과 연결된 어울림마당에서 바라보는 DDP와는 또 다른 공간감이다. 장소에 특정한 결과물이라는 자하 하디드의 언급 역시 이런 공간감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일 것이다.

건축물의 완성도만을 따지면 DDP의 수준에 비견할 건물은 많지 않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건물의 빼어난 완성도와 공간감은 SNS 인증용 사진의 배경으로만 쓰인다. 아직까지 DDP는 관상용에 머물러 있다. 개관한 지 8년이 되어가지만, DDP가 왜 동대문 ‘디자인플라자’인지 누구도 알지 못한다. 역설적으로 DDP는 한국적인 건물이다. 활용방안 없이 건물부터 짓는 한국식 랜드마크의 전형이기 때문이다.

■박정현

[콘크리트와 글로 빚은 20세기 한국 건축](10)이 매끈한 곡선 위에 서울의 역사는 들러붙을 수 없었다


서울시립대학교 건축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건축은 무엇을 했는가: 발전국가 시기 한국 현대 건축>을 비롯해 <김정철과 정림건축>(편저),

<전환기의 한국 건축과 4.3그룹>(공저) 등을 쓰고, <포트폴리오와 다이어그램> <건축의 고전적 언어> 등을 번역했다.

2018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국가 아방가르드의 유령’ 등의 전시에 큐레이터로 참여했다. 현재 도서출판 마티에서 편집장으로 일하며 건축 비평가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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