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성폭력 해결은 사적 문제? 공동체 모두가 연루된 의미투쟁

2018.03.09 19:17 입력 2018.03.09 20:00 수정

손희정의 ‘미투와 위드유’

성폭력 피해를 고발하는 여성들의 ‘미투(#MeToo)’ 운동이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세계여성의날인 지난 8일 서울 마포구청 대강당에서 열린 한국노총 여성노동자대회에서 참석자들이 ‘미투’라고 적힌 손팻말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성폭력 피해를 고발하는 여성들의 ‘미투(#MeToo)’ 운동이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세계여성의날인 지난 8일 서울 마포구청 대강당에서 열린 한국노총 여성노동자대회에서 참석자들이 ‘미투’라고 적힌 손팻말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계_내_성폭력’ 운동을 지나 ‘미투(#MeToo)’ 운동의 물결이 거세다. 하지만 성이 지극히 사적인 문제로 여겨져 왔던 탓에 (성희롱, 성추행, 성폭행을 포함하는 의미에서의) 성폭력은 여전히 판단이 쉽지 않은 난제의 영역에 머물러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미투 운동을 지지하면서도, 때때로 혼란을 느낄 것이다. 무엇이 성폭력인지, 어떻게 예방하거나 대처해야 하는지, 근본적인 해결책은 무엇인지 등 성폭력에 대해 생각하고 판단하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금까지 반성폭력 운동이 이에 대해 축적해 놓은 지혜와 지식, 운동의 노하우 등에 귀를 기울이고 그 조언을 바탕으로 성폭력 문화를 개선하기 위한 실질적인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일이다. 여기 몇 권의 책을 소개한다. 완벽한 리스트는 아니겠지만 훈련을 위한 스타트라인으로는 나쁘지 않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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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권하는 첫 책은 여성학자 정희진의 <아주 친밀한 폭력>(2016·교양인)이다. 2001년에 출간된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또하나의문화)의 개정판으로, 한국에서 출간된 성폭력 관련 서적들 사이에서 가장 많은 독자를 만난 책 중 한권이다. 이 책은 가정에서 일어나는 성폭력인 ‘아내 폭력’을 다루고 있지만, 아내 폭력을 가능하게 하는 문화는 미투가 고발하고 있는 공적 영역의 성폭력과 무관하지 않다. 어디에서 벌어지건 성폭력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성별 위계와 권력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정희진에 따르면 권력은 사용함으로써 지속된다. 성폭력은 이런 가부장의 권력이 행사되는 실천 중 하나다. 가부장제는 성폭력을 규범화하고 용인한다. 그리고 이런 만연한 성폭력에 대한 두려움은 여성으로 하여금 스스로의 행동을 단속하고 위축되게 만든다. 그렇게 해서 성폭력은 여성을 종속된 위치로 끌어내리는 것이다. 가부장제와 성폭력은 뫼비우스의 띠와도 같이 얽혀있어서, 가부장제는 성폭력을 정당화하고 성폭력은 가부장제를 지속시킨다. 이것이 ‘강간문화’의 실체다. 우리는 지금 이 강간문화를 박살 낼 절호의 기회를 만난 셈이다.

한편으로 책은 성폭력의 구조적인 성격 및 그 구조를 지속시키는 개인의 생각과 행동을 이해함에 있어 훌륭한 가이드를 제공한다. “왜 맞으면서 이혼하지 않았대?” “왜 당하면서 고발하지 않았대?”와 같이 피해자를 탓하는 질문에 답을 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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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는 레베카 솔닛의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2015·창비)를 소개하겠다. 이미 스테디셀러의 반열에 올라있는 터라 소개 리스트에서 제외했던 책이다. 그러나 미투 운동이 공작세력에 의해서 이용당할 수도 있다는 말을 대단한 통찰인 양 떠드는 김어준과 그의 지지자들을 보면서 이 책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예언’에서 피해 여성은 “다른 목적을 위해 준비되어 이용당하는 자”의 자리로 떠밀리고, 그렇게 다시 한번 여성들의 증언은 ‘가치 없는 것’ 혹은 ‘대의를 망치는 문제적인 것’으로 전락한다. 이 책이 주목하는 게 바로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의 말과 여성의 말 사이에 설정되어 있는 위계의 문제다.

책은 남녀 간 대화에서 쉽게 관찰되는 하나의 경향을 묘사하면서 가볍게 시작된다. 남자는 말하고 여자는 은은한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 그야말로 뭐든 가르치려 하는 남자에 대한 묘사. 별것 아닌 이런 장면은 기실 남성은 보편적인 지식을 갖추고 있고 여성은 그렇지 못하다는 남녀 지위와 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리하여 남성의 말에는 권위가 부여되지만 여성의 말에는 언제나 의심의 꼬리가 달라붙는다. 성폭력 피해 고발에 “꽃뱀 아니냐, 피해의식 아니냐, 거짓말 아니냐” 등 의심의 반응이 먼저 나오는 것은 이 탓이다. 그리하여 ‘가르치려 하는 남자’에 대한 분석은 가부장제가 어떻게 여성의 목소리를 말소시켜왔는가에 대한 이해로 확장되고, 이것이 미국에서 하루에 세 명씩 여성들이 남성 파트너 혹은 전 파트너에게 살해당하는 현실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미투 운동은 권위 있는 남성의 말이 여성의 증언보다 더 신뢰할 만하다고 믿는 사회를 전면적으로 뒤집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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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직업 세계에서 성폭력은 왜 일어나는가? 가해자와 피해자가 똑같은 사건을 놓고도 서로 다르게 기억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부장님, 그건 성희롱입니다>(2015·나름북스)는 구체적인 케이스를 통해서 직장 내 위계에 의한 성폭력이 무엇인지 설명하고, 그에 대한 예방법과 대처법을 알려준다. “호감의 표시, 농담, 혹은 연애일 수도 있잖아?! 왜 성폭력이라는 거야?!”라는 혼란에 사로잡힌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봐야 할 ‘실용서’다. 예컨대 저자인 무타 가즈에는 이런 조언을 준다. “사내 연애는 가능하면 피하라. 그러나 꼭 시도하고 싶다면 다음의 철칙을 지켜라. 첫째, 일을 빙자해 데이트 신청을 하지 말 것. 둘째, 집요하게 요구하지 말고 깔끔하게 할 것. 셋째 거절당했을 때 분풀이로 복수하지 말 것.”

책에 따르면 성희롱에는 ‘회색 성희롱’과 ‘검은 성희롱’이 있다. 문제적이지만 치명적이지는 않은 것이 회색 성희롱이다. 그러나 그것을 지적당했을 때 제대로 사과하고 시정하며 재발을 방지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 탓을 하면서 2차 가해를 시작하면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검은 성희롱이 된다. 사회는 빠르게 변하고 있고, 상식은 이제 다시 쓰이고 있다. 예전에는 회색 성희롱이 공동체 내에서 ‘분홍빛 로맨스’ 혹은 ‘할 수 있는 농담’으로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많았지만, 미투 이후의 한국사회는 그렇게 쉽게 ‘야만의 시대’로 회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 책을 지침 삼아 스스로 조심하기 바란다.

다음으로는 공동체의 문제로 넘어가 보자. 회사와 같은 직업 세계를 포함하는 ‘공동체’는 성폭력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최근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되면 모든 것이 끝”이라는 불안이 한국사회를 사로잡고 있다. 그러다 보니 “아예 남녀가 섞이지 말자”며 오히려 여성을 활동에서 배제함으로써 또 다른 성차별을 야기하고, 이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움직임조차 감지된다. 그러나 ‘잠재적 피해자’를 제거하는 것으로 성폭력 문제가 해결될 리 없다. 이런 식의 성차별 문화야말로 성폭력의 근본 원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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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여성민우회 홈페이지 ‘발간자료’ 메뉴에서 다운받아 볼 수 있는 <성폭력을 직면하고 다시 사는 법>은 이와 관련하여 한국 반성폭력 운동의 역사 속에서 축적된 지식과 지혜에 자문을 구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피해자 중심주의’, ‘2차 가해’, ‘사건의 종결’ 등 다양한 개념을 소개하고, 이 개념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 설명한다. 자료집은 “어떻게 해야 성폭력 사건은 종결되는가? 가해자는 언제까지 사과해야 하는가?”와 같은 매우 어려운 질문에 답을 찾아갈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자료집에서 전희경은 “성폭력 사건 해결 과정은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연루된 의미 투쟁의 과정”이라고 강조한다. 애초에 그런 성폭력을 가능하게 한 공동체 문화 자체에 대한 점검과 근본적인 개선의 노력이 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에서 지속되지 않는 한 유사한 사건은 계속해서 반복된다. 번개와도 같은 빠른 판단과 징계만이 답이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나의 성폭력 사건은 돌출적인 절단면이 아니다. 그것은 공동체의 과거로부터 등장해서 공동체의 미래로 이어진다. 우리가 반성폭력 문화를 만들어 가려면 미투를 특이한 사건으로서 자극적으로 소비할 것이 아니라 더 긴 흐름 속에서 봐야 한다. 의식의 근본적인 전환이야말로 우리가 도달해야 하는 해결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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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잠시 언급했던 것처럼, 공동체 내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비단 명시적인 폭력만은 아니다. 이제 공동체 내 성폭력의 근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성차별 문화로 시선을 돌려보자. <여성 셰프 분투기>(2017·현실문화)는 레스토랑 부엌에서 일어나는 성차별에 대한 흥미진진한 보고서다. 어째서 요리는 ‘여자의 일’로 여겨지면서도, 요리로 돈을 버는 것은 남성 셰프뿐인 것처럼 보이는 걸까? 남성 셰프들은 ‘레스토랑의 요리’를 ‘가정의 요리’와 구분하고, 전자를 전문가의 영역에 후자를 아마추어의 영역에 놓음으로써 요리사라는 직업의 ‘여성화’를 막는다. 역사적으로 여성적인 일로 여겨지는 직군은 소득이 적었고, 심지어 여성의 진출이 늘어난 영역에서는 소득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남성 요리사들은 레스토랑 부엌 문화를 마초적으로 만듦으로써 요리를 남성화한다. 그렇게 여성들이 셰프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어려워질수록 요리 장의 마초문화는 더욱 강화되었다. 주목할 만한 것은 부엌 바깥에만 나가면 ‘온순해’지는 ‘좋은 남자’들도 부엌에서만큼은 욕설을 퍼붓고, 여성을 비하하며, 성적인 농담을 지껄인다는 관찰이다. 여성들은 살아남기 위해 ‘여자짓’을 하거나 ‘어머니’의 역할을 자임하거나 ‘X년’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이 비단 레스토랑의 뜨거운 오븐 앞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렇게 다섯 권의 책을 읽고 나면 확실히 성폭력은 피해자의 문제라기보다는 가해자의 문제에 가깝고, 견고하게 구조화되어 있는 성별 권력관계의 문제임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회가 강요하는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의 문제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남자는 씨를 뿌리려는 본능이 있다”는 한 국회의원의 망발과 달리 남성이 여성에게 가하는 성폭력은 여성을 소유하고 그 위에 군림함으로써 진정한 남자가 될 수 있다고 가르치는 문화의 소산이다. 남성들은 미투 운동을 남성에 대한 위협 혹은 남자다움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왜 남성에게 그런 폭력이 용인되었는지 혹은 강요되었는지에 대해 근본적으로 고민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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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페미니스트 토니 포터가 쓴 <맨박스>(2016·한빛비즈)는 가부장제가 강요한 맨박스(남자다움에 대한 강박)에 갇혀 남성들이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는지를 잘 보여주며, 폭력과 지배가 아닌 배려와 공존이 남성다움, 그리고 인간다움의 성격이 될 수 있음을 친절하게 설명한다. 또한 저자는 ‘진짜 남자’에 대한 성별이분법적이고 이성애중심적인 성적 판타지는 여성혐오와 함께 성소수자 혐오를 바탕으로 형성된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지적한다. 이와 함께 벨 훅스의 <남자다움이 만드는 이상한 거리감>(2017·책담)을 읽어봐도 좋겠다. 남성들에게 끊임없이 페미니스트가 되자고 손을 내밀고 말을 걸어온 벨 훅스의 작업은 남성들과 일상적으로 부딪히며 살아갈 수밖에 없고, 또 남성을 (애인, 친구, 가족, 동료로서) 사랑할 수밖에 없는 여성들에게 남성을 이해하고 동지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지침서가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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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미녀, 야수에 맞서다>(2016·사회평론아카데미)를 추천한다. 이 책은 ‘길거리 괴롭힘’ 및 일상적으로 대면하는 성폭력에 맞설 수 있는 방법들을 알려준다. 저자인 엘렌 스노틀랜드는 여성들이 자신의 몸을 단련하고 자기방어 훈련을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경험을 바탕으로 설득력 있게 서술하고 있다. 주먹을 쥐고, 가드를 올리고, 상대방을 걷어차는 것. 그러나 책에서 말하는 가드는 육체적인 힘에 국한되지 않는다. 정신을 무장하고 말싸움 기술을 습득하는 것 등까지 포함하는 ‘자기방어’를 말하는 것이다. 사회 자체가 형질전환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 변화를 견인하기 위해서 우리는 스스로 조금 더 강해질 필요가 있다. 학교에서도 성평등 교육과 함께 자기방어 교육을 진행하면 좋겠다.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강인함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특히나 여성을 대상화하고, 자율성을 부정하며, 가능하면 몸을 움직이지 말고 조신하게 행동하도록 강요하는 이런 사회에서는 말이다.

미투 운동은 몇몇의 가해자들을 색출에서 퇴출하는 것에 만족해서는 안 되며, 매우 근본적인 인식의 변화로 이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미투를 지지하는 우리 역시 위드유(#WithYou)를 말하기 위하여 성폭력에 대한 생각의 근육을 훈련하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스스로의 한계를 극복해 가야 할 것 같다. 더불어서 성폭력 문화를 종식시킬 수 있는 매우 구체적인 제도적 개선을 책임 있는 단위와 국가에 요구해야 한다. 지금 여성들은 쉽지 않은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 줄 수 있기를 기도한다.

▶손희정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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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적 시각에서 대중문화를 비평하는 연구자이다. 국내에 출간된 다수의 페미니즘 서적을 저술, 번역하거나 해제하면서 젊은 페미니스트 필자로 주목받고 있다. 연세대에서 영문학과 사학을 공부하고 중앙대 첨단영상대학원에서 영화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단독 저서로는 <페미니즘 리부트>(나무연필)가 있고, <그런 남자는 없다> <소녀들> <그럼에도 페미니즘> 등을 함께 썼다. 역서로는 <여성 괴물, 억압과 위반 사이>와 <호러 영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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