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사회 개혁 원한다면…결국 필요한 것은 ‘노동 있는 민주주의’

2018.03.23 21:06 입력 2018.03.23 21:22 수정

조성주의 ‘노동과 민주주의’

‘해고는 살인이다’ 외치니 비정규직의 한마디 “해고·취업 반복 우리는 예수인가”

노동 배제된 한국민주주의, 저임금·고용불안·빈곤 그리고 부조리한 정치구조만 남아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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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년 전이었다. 대공장 노동조합의 정리해고에 반대하는 집회에 당시 내가 속해있던 청년실업자, 비정규직 청년들의 세대별 노동조합인 청년유니온의 조합원들과 함께 참석했었다. 집회에서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구호가 외쳐지고 사람들이 구호를 따라 하자 옆에 있던 20대 조합원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 “해고가 살인이면 몇 달 만에 해고되고 취업하기를 반복하는 우리는 부활하는 예수님인가?” 정말 예수님이라도 만난 것처럼 놀란 표정으로 뒤돌아보던 나와는 달리 그는 손톱만큼의 위악스러움도 느껴지지 않는 일상의 평온한 표정으로 나를 멀뚱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어느 술자리에서 다시 나에게 말했다. 체불된 아르바이트 임금을 받아 준 이 작은 노동조합을 만나지 못했다면 자신도 아마 ‘일베’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고. 아마도 그쯤이었던 것 같다. 민주주의 정치체제 안에서 노동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던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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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의미에서 최장집 교수의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후마니타스)는 평생을 민주주의 연구에 매진해온 정치학자가 바라본 한국 민주주의의 근본적 결핍에 대한 책이다. 민주화가 된 지 30여년의 시간이 흐르고 이제 민주화운동 당시 주역들이었던 청년세대들이 정권의 주역이 되었음에도 왜 한국 민주주의의 내용은 이리도 빈곤한지에 대한 질문을 최장집 교수는 노동배제적인 한국 민주주의의 현실에서 찾는다. 저임금, 고용불안, 빈곤, 그리고 그 목소리들을 담아내지 못하는 부조리한 정치와 제도들의 문제들을 다양한 노동현장에서 목도하는 노교수의 짧은 여정은 민주주의 내용을 채우는 것이 결국은 사회경제적인 갈등이며 그 결핍의 원인이 4년 또는 5년에 한번 진행되는 여야 간 정권교체만으로는 해소되지 않는다는 것을 고민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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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이 배제되거나 또는 여타의 이유로 무너져버린 민주주의에서 시민들에게는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각자의 방식으로 답한 책 두 권을 소개하려 한다. 하나는 현직 일간지 기자인 임지선 기자가 쓰고 2012년 발간된 <현시창 : 대한민국은 청춘을 위로할 자격이 없다>(알마)이다. ‘현시창’은 미국의 유명 힙합가수 에미넘이 ‘꿈은 높은데 현실은 시궁창’이라고 노래한 것에서 따온 말로 한때 유행어였다. 도발적인 책의 부제만큼 처참한 우리 사회의 현실들을 한 톨의 감정조차 섞지 않은 특유의 건조하면서도 디테일한 문장으로, 말 그대로 ‘기록’한 책이다. 대형마트 기계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질식해 죽고도 학자금 대출 빚을 가족에게 남겨야 했던 청년의 이야기에서 시작해 쓰레기 더미에서 발견된 세 살배기 아이의 시체와 무기력한 부모 이야기로 끝맺음하는 이 책이 더 고통스러운 이유는 책에서 다룬 사건들이 어제가 아닌 7~8년 전에 일어났던 것들임을 문득 깨달을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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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한권은 바다 건너 미국의 ‘러스트 벨트’라 불리는 곳의 이야기이다. 바로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흐름출판)다. 미국과 한국 모두에서 “트럼프 당선의 이유”로 언급되면서 화제를 모은 책이다. 그러나 정작 이 책은 공장이 떠나버림으로써 노동의 근간이 무너졌을 때, 그 공간에 남아있는 시민들이 어떤 무기력함에 빠져드는지에 관해 자전적 이야기로 풀어낸 책으로 해석되어도 좋으리라고 생각한다. 흔히들 노동 문제를 고용과 임금, 한 발쯤 더 나가면 불평등 문제로만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정치제도이기도 하지만 시민들의 삶에서는 생활양식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에 노동 없는 민주주의는 시민들의 생활양식마저 바꾸어 버린다. 앞서 최장집 교수의 책 제목처럼 노동 없는 민주주의가 시민들의 삶에 남기는 상처는 아마도 깊은 무기력과 윤리의 붕괴일 것이고, 그것은 다시 민주주의 그 자체를 위협하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것을 이 책의 저자인 한 청년의 삶의 궤적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 저자는 그 무기력한 삶에서 탈출했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우연과 축복으로 가능했다고 말한다.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좋은 우연이 다가오지 않는다는 것이고, 정치와 사회는 그 기회를 최소한 평등에 가깝게 만드는 과정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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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을 세계에서 마지막 남은 분단국가라고 부른다. 그러나 가끔은 우리가 살아내고 있는 현실의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역시 노동문제를 중심으로 다시 한번 분단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할 때가 있다. 또 다른 분단 현장에서는 ‘빨갱이’라는 단어 대신 ‘귀족노조’라는 단어를 비난의 주된 용어로 사용한다. <위장취업자에서 늙은 노동자로 어언 30년 : 내부자의 눈으로 본 대기업 정규직 노조&노동자>(레디앙)의 저자가 말하는 지난 30년간 변화된 노동현장의 모습과 그 안에서의 고민은 우리의 민주주의가 대기업 정규직의 울타리 밖을 넘지 못했음을 확인시켜 준다. 해고를 일어나서는 안되는 마치 살인처럼 여기는 정규직 노동자들과 해고가 반복되는 일상의 절망이 되어버린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같은 국가 안에 살고 있는 시민들일까? 사실 현실에서 소위 노동시장의 이중구조 문제라는 학술용어는 너무 부드러운 단어다. 그러나 또 다른 분단의 경계선에서도 남과 북의 경계선과 마찬가지로 치열한 갈등과 반목만큼이나 때로는 화해와 타협의 가능성이 희미하게 오간다. 학생운동가 출신 위장취업자에서 세월이 흘러 어느새 대기업 정규직 귀족이라는 비아냥을 받는 한 노동자가 현장에서 길어 올린 생생한 고민들은 현실적 대안으로서의 동의 여부를 떠나서 우리가 직시해야 할 노동현실 문제를 아프게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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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민주주의에서 노동이 배제되어 왔다는 지적은 사실 절반만 맞다. 노동운동 역시 민주주의를 일정 정도 회피했기 때문이다. 사실 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의 등장은 노동운동에도 큰 도전이자 때로는 위기였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 채 노동이 사회적 약자이기에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엘리트들 스스로의 도덕적 위안 그 이상을 벗어나기 힘들다. 노동운동이 민주주의를 앞에 두고 고민했던 과정들을 깊이 있게 성찰하게 해주는 책이 셰리 버먼의 <정치가 우선한다>(후마니타스)이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노동운동이 가장 활발했고 이념적으로 무장된 정당이라는 형태로 그 모습을 새롭게 등장시켰을 때 노동운동은 민주주의라는 커다란 도전을 맞이한다. 수많은 노동운동가들이 민주주의에 “참여할 것인가? 참여하지 않을 것인가?”를 두고 치열한 논쟁을 벌이며 민주주의의 도전에 응전했다. 나라별로 그 선택은 상이했고 그것이 초래한 결과는 파시즘의 등장과 전쟁, 그리고 이어진 냉전과 복지국가의 등장이었고, 최근에는 신자유주의와 그에 대한 대응의 차이로까지 이어졌다. 결국 저자는 결론적으로 노동운동이 민주주의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전략적으로 행동했던 결과가 현대 사회민주주의와 복지국가라는 더 좋은 성과를 만들어냈다고 지적한다. 물론 그것은 혁명이라는 달콤하고 매력적인 환상을 포기해서 얻은 대가임을 숨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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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정치가 우선한다>를 소개하며 언급했던 20세기 초 서유럽 노동운동의 고민들이 한국에서는 권위주의 체제가 무너지고 난 1987년 민주화 이후에 압축적으로 진행되었다. 100여년의 시간적 차이가 있었음에도 한국의 노동운동에 이론적 바탕을 제공했던 학생운동 출신 위장취업자들의 주된 이념은 19세기 서유럽의 노동운동가들과 다르지 않았다. 이후 한국의 노동운동이 택한 길은 총자본에 맞선 총노동의 단결된 투쟁을 통해 노동해방을 쟁취하겠다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일찍이 서유럽의 노동운동가들은 민주주의가 혁명의 무덤이지만 민주주의에 참여하지 않은 것은 다시 사회의 붕괴와 노동의 고립임을 눈치채고 고뇌했다. 마찬가지로 한국의 노동운동도 폭발적인 성장과 급격한 쇠락의 롤러코스터를 타며 방황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나타난 가장 큰 문제는 다수의 비정규직, 청년세대, 여성, 이주노동자 등이 노동운동을 통해 민주주의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린 것이었고, 이것은 한국의 민주주의를 더 좁게 축소시켰다. 그러나 87년 민주화 항쟁 이후 고작 10여년의 짧은 전성기를 스쳐보내고 1997년 외환위기를 맞아 본격적으로 민주주의 광장의 밖으로 밀려났던 존재들이 다시 15년여의 암흑기를 보내고 난 후 2010년대부터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한국 노동운동의 변화와 새롭게 등장한 목소리들을 조명한 책으로는 <한국노동운동의 위기 진단과 대안모색>(한국노동사회연구소)을 참고하면 좋을 것 같다.

우리는 보통 자본과의 긴장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노동’이라고 생각한다. 맞는 말이지만 다른 한편에서 그 구조의 기본원리상 1인 1표의 정치적 평등을 기초로 하는 민주주의 역시 자본주의 경제시스템과는 필연적으로 긴장관계를 형성한다. 그런 측면에서 노동과 민주주의의 관계 역시 새롭게 고민될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청년실업자, 또는 노동자라 불리지 못하는 수많은 노동 형태들은 자본과 싸우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자신들을 배제하고 있는 민주주의 체제 안에서 공공재에 참여할 권리를 두고 싸우고 있는 것일까? 결국 노동 있는 민주주의라는 말은 노동이 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를 통해 자신을 포함한 다수의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목소리를 확대하는 것이 가능해야 한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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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민주주의 정치란 결국 다수의 목소리를 집약해내어 대표하는 것을 게임의 룰(Rule)로 하기에, 노동운동 역시 배타적인 계급의 이익만이 아닌 다수 경제시민들의 요구를 모아내어 사회 다수를 대표하는 전략을 채택할 수밖에 없다. 20세기 초중반 미국의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을 이끌었던 사울 D. 알린스키는 그의 저서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아르케)에서 노동운동을 포함한 사회운동이 민주주의라는 룰 안에서 싸워나가는 방식을 익히지 않고서는 결코 우리가 원하는 개혁을 이룰 수 없음을 날카로운 언어로 일갈한다. 그는 또 복잡하고 거대해진 현대 국가 안에서 민주주의 방식으로 싸워나가기 위해서는 정치적으로 열려있는 자세와 이견을 다루는 현명함과 의사소통이 필연적이라고 지적한다. 알린스키의 말은 노동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사회경제적 약자들을 대변하면서도 민주주의 안에서 자신의 힘을 성장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지혜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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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추천하는 책은 긴 시간을 돌고 돌아와 다시 우리 앞에 놓인 <전태일 평전>(아름다운전태일)이다. 너무나 유명한 책인 만큼 우리에게 새로운 무언가를 줄 수 없을 거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임금노동자의 절반이 비정규직이며 ‘노동자’라 불리지 못한 채 각종 법제도의 사각지대에 놓인 수백만명의 ‘이름 없는 노동자’가 압도적 다수의 경제시민이 되어버린 지금 <전태일 평전>은 완전히 다른 맥락의 의미를 가진다. 청년노동자 전태일이 자신의 목숨을 걸고서라도 대변하고자 했던 이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여성이었고, 청년이었고, 노동자라는 이름이 아닌 ‘시다’나 ‘여공’ 무슨 무슨 ‘순이’ 따위의 명칭으로 불리던 이들이었다.

이 책에 담긴 전태일이 국가에 호소했던 내용의 편지들은 우리도 이 땅에 살아가는 한 명의 시민이며 그들에게도 인간으로서 누구도 침범하지 못하는 권리를 가지고 있음을 처절하게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결국은 전태일의 분신 이후 20여년이 훨씬 지난 후에 맞이한 민주주의의 핵심 내용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대학생 친구 한 명만 있었더라면’이라는 전태일의 회한에 많은 청년들이 노동현장으로 들어가서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을 만들어냈으나, 이제 그 노동운동과 민주주의가 전태일이 대변하고자 했던 존재들을 외부로 밀어내거나 외면하고 있는 것이 지금 우리의 현실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이 책을 다시 읽을 필요가 있다. 약자에 연대하는 착한 마음으로 이 책을 읽을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경제·노동의 영역에서 박정희 권위주의 체제와 ‘정말 달라졌다’고 말할 수 있는지에 대한 날카로운 반성과 성찰의 계기로 이 책을 꼭 다시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필자 조성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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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 진학한 이래 줄곧 청년과 노동 문제를 고민하며 활동해 온 젊은 정치인이다. 진보적 입장에서 정책을 개발하고 새로운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일에도 관심이 많다. 청년유니온 정책기획팀장, 국회의원 보좌관, 정치발전소 공동대표, 정의당 싱크탱크 미래정치센터 소장을 지냈다. 저서로는 <알린스키, 변화의 정치학> <청춘일기> 등이 있고 <세상을 바꾼 놀라운 정책들> 등을 공저했다. 현재 서울시 노동협력관으로 삶의 현장을 바꾸는 정치에 대한 고민을 이어 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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