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사회 곳곳 만연했던 성차별에 페미니즘으로 당당히 맞서다

2019.12.24 21:20 입력 2019.12.24 22:42 수정
장영은

글로리아 스타이넘

미국의 작가이자 페미니스트인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1972년 여성주의 잡지 ‘미즈’를 창간하며 여성운동의 성장을 촉진했다. 스타이넘은 지속적으로 여성인권에 대한 목소리를 내왔으며 2017년 워싱턴 여성행진에 참여하기도 했다.

미국의 작가이자 페미니스트인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1972년 여성주의 잡지 ‘미즈’를 창간하며 여성운동의 성장을 촉진했다. 스타이넘은 지속적으로 여성인권에 대한 목소리를 내왔으며 2017년 워싱턴 여성행진에 참여하기도 했다.

부친 사업 실패 겪으며 부모 이혼
책 읽으며 희망 품고 고난 견뎌내

“부정했거나 무시하려고 노력했던 과거의 억눌린 분노가 폭발해서 넘쳤다. 독신 여자는 집세를 낼 능력이 없을 거라고 생각한 주인 때문에 아파트를 빌릴 수 없었던 일, 여자라는 이유로 나보다 젊고 경험도 없는 남자 기자에게 정치 기사를 뺏겼던 일, 내가 이룬 일은 모두 내가 ‘예쁜 여자’이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여겨지는 것, 여자는 별로 돈이 필요하지 않다며 내게는 돈을 적게 주던 일, 나를 인정해 줄 때는 언제나 빈정거림을 빠뜨리지 않던 것.”

대학 졸업 후 프리랜서 기자 생활
편견 탓 ‘정치’보다 ‘패션’ 등 맡겨
여성운동 기사도 거절당하기 일쑤

1956년,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스미스대학교를 졸업하고 프리랜서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정치 분야에서 취재 업무를 맡고 싶었지만, ‘여기자’에게는 “패션이나 가정에 대한 신변잡기 기사”만 주어지던 시절이었다. 특종을 다루고 싶었다. 1963년 1월,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뉴욕 맨해튼에 위치한 플레이보이 클럽의 실체를 밝혀보기로 결심하고 위장취업을 감행한다. 약 한 달간 바니걸로 일하며 겪은 이야기들을 르포 형식으로 발표했다.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남성중심 사회의 축소판인 플레이보이 클럽을 체험하며 점차 페미니스트가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닥치는 대로 페미니스트의 글들을 읽기 시작했고 내가 만날 수 있는 모든 여성운동가들을 만나 이야기했다.”

잡지 ‘미즈’ 창간호

잡지 ‘미즈’ 창간호

혁신적 매체의 필요성 절실히 느껴
여성주의 잡지 ‘미즈’ 창간 이끌어
반발 세력의 협박·억압 정면 돌파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1969년 잡지 뉴욕에 기고한 글에서 “블랙 파워 다음에는 여성해방이다”라고 선언하며 페미니즘의 폭발적인 성장을 이끌었지만, 기성 언론은 새로운 시대를 거부했다.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여성운동에 관한 기사를 쓰겠다”고 제안했지만, 거절당하기 일쑤였다. “죄송하지만 페미니즘 관련 기사는 작년에 실었습니다.” “남녀가 평등하다고 말하는 글을 하나 실으면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바로 뒤에 그렇지 않다는 글을 실어야 할 겁니다.” 혁신적인 매체가 필요했다.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1972년 여성주의 잡지 미즈(Ms)를 창간했다. 일주일 만에 30만부가 팔렸다. 실비아 플라스와 버지니아 울프의 미출간 작품들과 ‘복지는 여성의 문제다’라는 기사 등이 실린 미즈 창간호는 독자들에게 파격을 선사했다.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비이성적으로 반발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살해 협박 전화도 수시로 걸려왔다. 진영을 막론하고 페미니즘을 억압했다. “여성운동은 ‘가족을 파괴하려는 좌파의 술책’이라는 이유로 우익은 일관되게 우리를 반대했고, 좌파도 가끔씩 여성운동은 ‘좌파를 분열시키려는 우익의 술책’이라고 생각해 우리를 적대시했다.” 근거도 없는 거짓 소문들이 떠돌아다니기도 했다. “사람들은 내가 글을 발표하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심지어 페미니스트로 또는 무엇으로든 성공하기 위해 내가 ‘남자들을 이용했다’고들 이야기했다.” 그럴 때마다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어느 남자냐?”고 반문하며 상대를 제압했다.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성공한 여자에게는 무수한 비난이 가해진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사회에서 성공하는 여자들이 많아지지 않는 한 계속해서, 여자들이 그 위치에 오르기 위해서는 남자를 이용한 것이 틀림없다는 편견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여성들의 사회적 성취를 자신의 일처럼 좋아했다. “임신한 비행기 승무원, 소방수, 뉴욕주 최고위 공무원, 노조 목수, 최초의 여성 우주인.” 이 다섯 명의 여성이 “여성운동이 없었다면 그들이 좋아하는 현재의 직업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대단히 기뻤다. 1960년대 이후부터 여성들이 다양한 공적 영역으로 진출하는 상황은 긍정적이었지만, 국회의사당과 백악관은 변함없이 남성들 전유물이었다.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글로리아 스타이넘이 1983년 인종차별 철폐를 주장했던 워싱턴 행진 20주년 기념 행진에서 미국 시인 마야 안젤루와 함께 걷고 있다.

글로리아 스타이넘이 1983년 인종차별 철폐를 주장했던 워싱턴 행진 20주년 기념 행진에서 미국 시인 마야 안젤루와 함께 걷고 있다.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실력 있는 여성 정치인들을 적극적으로 옹호한다. 1984년에 제럴딘 페라로가 민주당 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 “단지 상징적인 존재가 아니라 이길 가능성이 있는, 다수당 공천 부통령 후보로 나선 한 여성”이 등장하자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큰 기대를 가진다. 제럴딘 페라로가 “밑바닥부터 캠페인을 하면서 정치적 반대와 미디어 공격에 맞서 살아남았다”는 사실 또한 희망적이었다. 제럴딘 페라로는 부통령 당선에 실패했지만, 시대의 요청은 역행될 수 없었다. ‘여성의 해’로 명명된 1992년에 여성 국회의원들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2001년에는 힐러리 클린턴이 대통령 부인 역할을 마친 후 상원의원에 도전했고 국회의사당에 입성했다.

국회·백악관 ‘남성 전유물’ 깨려
실력 있는 여성 정치인들 옹호도

2008년, 힐러리 클린턴과 버락 오바마 두 사람이 치른 예비 선거 캠페인에서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힐러리 클린턴을 지지한다.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이 세기의 대결을 “후보로 보면 최고의 경쟁이었고, 갈등으로 보면 최악의 경쟁이었다”고 회고했다. 버락 오바마가 승리했다. “이제 살아서 백악관의 여성 대통령을 볼 수 없으리라는 사실에 상심한” 친구들과 함께 버락 오바마 선거운동을 시작했다.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힐러리는 오바마를 지지한다. 나도 그렇다” 문구를 넣은 배지를 만들었고, 힐러리 클린턴은 패배 승복 연설에서 오바마 지지를 약속하며 글로리아 스타이넘이 만든 배지를 원하는 청중들에게 나눠주었다. 페미니즘이 사회를 분열시킨다는 비난은 유언비어일 따름이었다. 그렇게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최악의’ 갈등 상황을 봉합하고 “모든 것이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을 실천했다. 어머니의 영향이 상당히 컸다.

1934년 미국 오하이오주 톨레도에서 태어난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열 살 때까지 집에서 공부를 했다. 책을 아주 좋아하고 시를 자주 암송했던 어머니는 기자 생활을 하며 혼자서 두 딸을 키웠다. 아버지는 새로운 사업을 벌일 때마다 실패했다. 골동품 상인이었던 아버지는 “초판 두 권을 건지려고 도서관 장서 전체를 사들이곤” 했다. 집안 형편은 하루가 다르게 나빠져 갔고, 어머니는 정신질환으로 “마침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폐인이 되어버렸다”. “결국 부모님들이 이혼하고 언니가 먼 도시에 일하러 가자, 나와 어머니 둘만이 남게 되었다.” 어린 둘째 딸은 어머니의 보호자가 되어야 했다. 그래도 좋은 책들이 많아 다행스러웠다. “나는 일주일에 한 번씩 도서관에 가서 책 세 권을 빌려왔다. 말하자면 현실로부터 벗어나 책 속으로 달아나고 싶어 했던 것이다.” 글로리아 스타이넘에게 루이자 메이 올컷의 <작은 아씨들>은 경전(經典)과도 같았다. “네 자매는 고난에 맞서 싸웠고, 서로와 어머니를 사랑했고, 전쟁보다 나은 것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매년 그 책을 다시 읽곤 했어요.”

어머니 역시 정신질환에 시달리면서도 딸의 미래를 포기하지 않았다.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대학 진학을 위해 어머니는 톨레도에 있는 집을 팔았다. 딸이 “집을 떠나 독립적인 인생을 살도록 도와주었던 것이다”. ‘미친 엄마’ 아래 자라면서 “집에 친구를 데리고 올 수 없었던 어린 시절”은 힘들었지만, 어머니는 딸에게 역사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보기 전까지는” 다른 사람을 비판하지 말 것을 당부하며 민주주의의 가치를 알려준 지성인이었다.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어머니를 ‘이해’하기까지 왜 그렇게 오랜 시간이 필요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결국 “어머니에게 일어났던 일이 개인적 원인 때문이거

나 우연적인 사건이 아니라, 나에게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점을 인정하기 싫어했기 때문”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아버지 이야기도 언제까지 덮어둘 수만은 없었다. 2015년,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자서전 <길 위의 인생>을 출간한다. “나는 아버지와 정반대의 방식으로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나는 내가 아끼고 휴식할 집을 만들었지만 아버지는 전혀 집을 가지려 하지 않았다.” 팔십 년의 생애를 글로 쓰면서 자신의 삶을 지배했던 ‘방랑’의 기원을 파악했다. 부정하고 싶었을 뿐, 아버지의 삶은 자신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었다.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자서전을 마무리하며 또다시 “떠날 시간”이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여전히 “할 것도, 말할 것도, 들을 것도 아주” 많은 그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튿날인 2017년 1월 50만명과 함께 여성 및 성소수자 인권과 이민정책 개혁 등을 외치며 워싱턴 여성 행진에 참여했다. 글 쓰는 여자는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

■ 필자 장영은

[여성,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20)사회 곳곳 만연했던 성차별에 페미니즘으로 당당히 맞서다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초빙교수다. 이태영, 천경자, 박완서 등 20세기 초 한국 여성 지식인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과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공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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