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통설 깬 ‘침팬지 박사’…이젠 청소년에 ‘희망의 씨앗’ 뿌린다

2020.01.07 21:00 입력 2020.01.07 21:01 수정
장영은

제인 구달

제인 구달이 탄자니아 곰베 국립공원에서 침팬지 ‘프로이드’와 함께 앉아 있다. 구달은 해마다 300일 이상 세계를 다니며 틈틈이 글을 쓰고, 환경운동과 난민구호 활동을 벌이고 있다. 86세의 구달은 오늘날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전한다.

제인 구달이 탄자니아 곰베 국립공원에서 침팬지 ‘프로이드’와 함께 앉아 있다. 구달은 해마다 300일 이상 세계를 다니며 틈틈이 글을 쓰고, 환경운동과 난민구호 활동을 벌이고 있다. 86세의 구달은 오늘날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전한다.

“나는 열여덟 살이 되었을 때 치른 마지막 고사에서 좋은 성적을 받았다. 그리고 갑자기 내 학창 시절이 끝났다. 그 다음엔 무엇을 하지? 나는 단지 동물을 관찰하고 동물에 대해 글을 쓰고 싶었다. 어떻게 그 일을 시작할 것인가? 동물을 관찰하는 것으로 어떻게 먹고살 수 있을까?”

제인 구달은 일곱 살이 되던 해인 1941년 장차 아프리카로 가겠노라고 마음을 굳혔다. 어머니가 도서관에서 빌려온 <둘리틀 박사 이야기>에는 신세계가 펼쳐지고 있었다. “그만큼 좋아했던 책이 없었다.” 책을 읽으며 아프리카의 동물들을 상상하는 시간들은 행복했다. “아프리카에 사는 동물뿐 아니라, 각종 동물들에 대한 책을 손에 잡히는 대로 읽었다.” “나는 러디어드 키플링의 <정글북>에 나오는 모글리 이야기를 무척 좋아했고, 에드거 라이스 버로스의 <타잔>을 특히 좋아했다.”

학교 공부도 재미있었다. 문제는 가정 형편이었다. 대학교를 다닐 돈이 없었다. 어머니는 비서 학교를 강력하게 추천한다. “비서는 세계 어디에서도 직장을 구할 수 있다.” 제인 구달은 런던에 있는 비서 학교에서 타자, 속기 등을 배웠다. 제인 구달은 어린이병원에서 편지를 타자로 치며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옥스퍼드대학 행정실의 서류 정리과로 직장을 옮겼지만 업무는 지루했다. 제인 구달은 사표를 내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넉 달 동안 식당에서 일을 하며 모은 돈으로 여객선 “케냐 캐슬”을 타고 아프리카로 떠난다. 1957년, “나는 그때 스물세 살이었다. 죽을 때까지 그 멋진 항해를 잊지 못할 것이다.”

제인 구달은 여행을 마친 후 케냐 나이로비에 정착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자신은 동물을 아주 좋아한다고 이야기했다. 누군가 “동물에 관심이 있다면 루이스 리키 박사를 만나 봐야 한다”고 조언했다. 제인 구달은 박물관으로 전화를 걸어 루이스 리키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인류학자이자 고생물학자인 루이스 리키는 나이로비 자연사 박물관에 재직 중이었고, 마침 비서를 구하고 있었다. 루이스 리키는 제인 구달의 “풍부한 지식에 감탄”했다. 어머니의 선견지명은 옳았다.

동물 좋아해 자연사 박물관 근무
1957년부터 침팬지 연구 첫발

1957년 5월에 제인 구달은 루이스 리키의 비서로 채용되었다. 화석(化石)보다 동물이 좋았지만, 우선 주어진 박물관 업무에 최선을 다했다. 루이스 리키는 1956년 말 우간다 고릴라 연구를 마친 후, 곰베 강 침팬지 보호구를 후속 연구로 검토 중이었다. 1957년 9월, 루이스 리키는 제인 구달에게 침팬지 연구를 권유했다. 제인 구달은 학위도 현장 경험도 없는 자신이 과연 동물 연구를 제대로 해낼 수 있을지 잠시 머뭇거렸다. 루이스 리키의 관점은 완전히 달랐다. 그는 “이론으로 머리가 가득 차지 않은” 사람, “진정으로 침팬지들 속에서 살면서 이들의 행동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이 독보적인 연구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단언하며 제인 구달의 두려움을 불식시켰다. 더불어 제인 구달의 관찰력과 인내력 및 기록 능력을 정확하게 칭찬했다. 침팬지 연구가 “매우 길고 어려운 작업일 것”이기 때문에 인내심을 잃지 않는다면 반드시 동물학자로 성공할 것이라고 제인 구달을 격려한다.

제인 구달은 연구기금이 마련되는 1년 동안 런던 동물원에서 일을 하며 침팬지 관련 책들을 섭렵했다. 1960년 7월16일, 26세의 제인 구달은 침팬지의 땅으로 알려진 곰베 국립공원에 도착했다. 침팬지들은 낯선 인간을 경계했다. 때로는 제인 구달에게 위협을 가하기도 했다. 검증 기간은 매우 길었다. 4년이 지나고 나서야 침팬지들은 제인 구달과의 거리를 좁히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내가 500m나 되는 먼 거리에 있거나 골짜기 반대편에 나타나기만 해도 침팬지들은 모두 도망쳐 버렸다. 그러나 지금 이 두 마리 수컷은 내 곁에 너무나 가까이 앉아 있어 나는 거의 그들의 숨소리까지 들을 수 있을 지경이다. 이때가 내가 겪었던 수많은 시간들 가운데 가장 뿌듯했던 순간이다.”

곰베 국립공원선 ‘10년 관찰’ 집념
“동물도 감정” 발표에 학계선 반발
인간 재정의한 ‘인간의 그늘에서’
동물행동학 연구의 고전으로 우뚝

곰베 국립공원에서 10년 동안 침팬지를 관찰한 제인 구달은 1971년 <인간의 그늘에서>를 출간한다. 제인 구달의 관찰에 따르면 침팬지들은 나름의 의사소통체계를 가지고 있었고, 도구를 제작하고 사용하며 먹이를 서로 나누어 먹을 줄 알았다. 제인 구달은 “동물에게 성격이 있다는 것을, 이성적인 사고가 가능하고 행복, 슬픔, 절망 같은 감정을 느낀다는 사실”을 어린 시절 키우던 개 러스티를 통해 이미 알고 있었고 침팬지들을 연구하며 자신의 관점에 더욱 확신을 가졌지만, 1960년대까지만 해도 비교행동학계에서는 동물의 마음과 성격에 대해 언급하는 것 자체를 꺼렸다. 게다가 침팬지들에게 이름을 붙여가며 개별성을 부여하고 침팬지들의 성격을 분석하는 제인 구달의 연구 방식에 반대하는 전문가들이 많았다.

제인 구달(오른쪽)은 고생물학자인 루이스 리키 박사의 비서로 채용되면서 동물 연구의 첫발을 내딛는다. 리키 박사는 구달의 가능성을 꿰뚫어보고 연구자로서 성공할 것이라고 격려했다.

제인 구달(오른쪽)은 고생물학자인 루이스 리키 박사의 비서로 채용되면서 동물 연구의 첫발을 내딛는다. 리키 박사는 구달의 가능성을 꿰뚫어보고 연구자로서 성공할 것이라고 격려했다.

제인 구달이 침팬지와 인간의 유사성에 주목하고 연구 결과를 축적할수록 그가 대학 교육을 받지 못한 채로 침팬지 연구자가 되었기 때문에 학문적 깊이가 없는 내용을 발표한다는 악의적인 허위주장이 떠돌았다. 제인 구달은 1962년 현장에서의 연구 경력을 인정받아 학사학위 없이 케임브리지대학 동물박사과정에 입학해 3년 후인 1965년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제인 구달의 권위를 빼앗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시간은 제인 구달의 편이었다. “침팬지들과 시간을 보내면서 대부분의 인간과 아주 비슷하게 강렬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기는 힘듭니다. 상식이었어요. 이제 과학이 바뀌었지요.” 제인 구달의 침팬지 연구는 인간을 더욱 정교하게 재(再)정의할 필요성을 깨닫게 했다. <인간의 그늘에서>는 “1세기에 한번쯤 인간이 그 스스로를 바라보는 관점을 송두리째 변화시키는 연구 결과”로 평가받으며 동물행동학 연구서 가운데 고전이 되었다. 여러 난관을 뚫고 학자로서의 입지를 확보한 제인 구달은 연구와 저술을 본업으로 삼으며 침팬지들과 목가적인 생활을 이어나가길 원했다. 예측은 어긋났다.

‘서식지 파괴’ 학회 발표에 충격
업적 집착 않고 침팬지 보호 나서
전 세계 강연·난민구호 회의 동참
젊은이들과 환경교육 활발히 진행

1986년 침팬지의 행동 특성에 대한 책을 출간하고 미국 국립과학원 학회에 참석한 제인 구달은 서식지 파괴 현황에 관한 발표를 듣고 큰 충격에 빠진다. 침팬지들이 여러 지역에서 처참하게 도륙되고 있었다. 생포된 채로 철장 안에 갇혀 있는 침팬지들도 많았다. 나흘 동안의 학회가 끝난 후, 제인 구달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야생 침팬지 보호와 사육 및 서식 환경 개선이 시급했다. 연구 업적에 집착하지 않았다. 제인 구달은 침팬지를 관찰하는 사람에서 지켜주는 사람으로 직업을 바꾸었다. 활동가 제인 구달의 삶이 시작되었다.

어린 시절 겪었던 경험 또한 결단의 순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내가 어렸을 때 한 번은 나보다 훨씬 큰 남자아이 네 명이 게의 다리를 떼어 내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아주 화가 났다. 나는 왜 그러는지 물었고, 그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야.’ 나는 그것이 잔인한 짓이라고 말해 주었다. 그들은 웃어 댔다. 그리고 나는 그 자리를 떠나 버렸다. 40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그 일로 수치스러워하고 있다.” 부끄러운 기억은 한 번으로 충분했다.

제인 구달은 1986년 이후부터 현재까지 1년에 300일 이상 전 세계를 다니며 강연을 하고 환경운동과 난민구호활동 관련 회의에 참석한다. 2002년 유엔 평화대사로 임명된 이후로 분쟁지역과 재난발생지역 복구에도 적극적이다. 시간이 부족하면 비행기에서라도 글을 쓰고, 새로운 책을 낼 때마다 독자들과 만나 대화를 나눈다. 특히, 청소년들의 사회 참여가 지구의 희망이라고 믿어 온 제인 구달은 1991년 탄자니아에서 16명의 젊은이들과 함께 환경교육 프로그램 ‘뿌리와 새싹(Roots&Shoots)’을 시작했다. 현재 120개국에서 수십만 개의 ‘뿌리와 새싹’ 모임이 공존의 가치를 추구하며 자치적으로 운영 중이다. 86세의 제인 구달은 오늘도 “젊은이들을 위한 뿌리와 새싹 프로그램에 에너지의 대부분을 쏟고” 있다. 글 쓰는 여자는 희망을 물려준다.

■ 필자 장영은

[여성,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21)통설 깬 ‘침팬지 박사’…이젠 청소년에 ‘희망의 씨앗’ 뿌린다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초빙교수다. 이태영, 천경자, 박완서 등 20세기 초 한국 여성 지식인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과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공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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