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억압과 공포의 시대…극단의 선택 극복할 힘을 ‘문학’에서 찾다

2020.01.21 21:08 입력 2020.01.21 22:55 수정
장영은

헤르타 뮐러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헤르타 뮐러는 루마니아 차우셰스쿠 독재정권 아래에서 억압과 박해를 받았다. 자유로운 창작을 위해 독일로 떠난 헤르타 뮐러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문학으로 극복했다.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헤르타 뮐러는 루마니아 차우셰스쿠 독재정권 아래에서 억압과 박해를 받았다. 자유로운 창작을 위해 독일로 떠난 헤르타 뮐러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문학으로 극복했다.

“나는 바닥을 쳤지만 동시에 비밀경찰이 나를 죽이겠다고 협박까지 하는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이런 결론에 이르렀죠. ‘그들에게 죽임을 당하느니 차라리 나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 그들은 나를 물속에 던져 버리거나 교통사고를 당하게 하겠다고 협박했어요. 나는 ‘만약 나를 이 세상에서 없애 버리고 싶다면 그것은 너희들이 해야 할 거야’라고 생각했어요. 그 생각이 나를 살렸습니다.”

작가모임 가입 이유로 루마니아 독재 치하서 감시·모욕받아
첫 소설 ‘저지대’ 검열 후 출간…서독서 원본 펴내자 ‘금서’ 수모
‘작가로서 삶 원천 봉쇄’ 판단에 독일로 망명 작가 활동 이어가

헤르타 뮐러는 1953년 루마니아 니츠키도르프의 독일계 소수민족 가정에서 태어났다. 가난하고 외진 마을에서 자랐다. 헤르타 뮐러는 어린 시절부터 ‘언어’에 몰입했다. 독일어를 가장 먼저 익혔다. 루마니아어는 열다섯 살 때부터 학교에서 배우기 시작했다. “내 머릿속에는 두 가지 언어가 살고 있어요.” 1973년 헤르타 뮐러는 티미쇼아라대학교에 입학했다. 독일 문학과 루마니아 문학을 전공하며, 차우셰스쿠 독재정권에 반대하는 작가들의 모임인 악티온스그루페 바나트에 가입한다. 그는 악명 높은 루마니아의 비밀경찰 세쿠리타테(Securitate)의 특별 감시 대상이 되었다. “나는 문인 단체에서 유일한 여성이었는데 모든 남성 작가들도 나와 같은 상황에 처해 있었어요. 그들도 여러 번 조사받았지만 내가 견뎌야 했던 것과 같은 수치스러운 말을 그들에게는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들은 나를 창녀라고 불렀습니다. 스타킹이나 화장품을 받는 대가로 내가 아랍권 학생들과 성관계를 맺은 것을 알고 있다거나 내가 여러 남자와 함께 있다는 것을 봤다고도 말했습니다.” 헤르타 뮐러는 아랍권 학생을 본 적도 없었다. 루마니아의 독재정권은 정치적 견해나 문학 작품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건들을 “꾸며내기 시작”했다. 차우셰스쿠 정부가 여성 지식인을 매장시키는 방식이었다. 대학 시절을 독재 치하에서 힘들게 보냈지만,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헤르타 뮐러는 대학을 졸업하고 트럭 공장에서 번역사로 일하며 글을 썼다. 정년퇴직 때까지 성실하게 근무하며 좋은 작품을 쓰고 싶었지만 독재정권이 그의 일상을 짓밟았다. 헤르타 뮐러는 비밀경찰의 정보원 역할을 강요받았다. 협력을 거부했다. 다음 날, 헤르타 뮐러의 책상에는 다른 사람이 앉아 있었다. 사전들은 통로에 내던져졌다.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된 헤르타 뮐러는 유치원에서 독일어 교사로 일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독재정권은 계속 폭주했다. 비밀경찰은 헤르타 뮐러를 수시로 소환한다. 가택 수색도 서슴지 않았다. 헤르타 뮐러가 조사실을 자주 드나들자 그를 비밀경찰의 스파이로 오해하는 사람들도 생겼다. “나는 50번 이상 조사받았고 아직도 카메라 플래시에 대한 공포감이 있어요. 조사실에 매달려 있던 작은 전등을 연상시키기 때문이죠.”

모멸감에 글을 쓰지 못하는 날들이 많았다. 독재정권 아래에서 “단 하루도 살고 싶지 않았고 단 한 줄도 쓰고 싶지” 않았다. 헤르타 뮐러는 죽음을 떠올렸다. 비밀경찰들 손에 죽는 것보다 자살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고 잠시 오판을 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살고 싶었다. 헤르타 뮐러는 “내 고유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본능”을 되찾았다. 살해 위협에 겁을 먹고 스스로 생을 포기하는 것이야말로 독재정권이 가장 원하는 결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죽을 이유가 없었다.

“내가 답을 찾은 곳은 문학이었습니다.” 헤르타 뮐러는 1982년 첫 소설을 발표했다. 루마니아의 작은 시골마을조차도 피할 수 없는 독재국가의 공포를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그려낸 <저지대>는 루마니아에서 출간 당시 검열을 거쳐 대폭 수정된 채 나올 수밖에 없었다. 독재자 차우셰스쿠는 작가에게서 언어를 강탈해갔다. 2년 후인 1984년 <저지대> 원본이 서독에서 출간되어 주목을 받았지만, 루마니아 정부는 <저지대>를 금서로 분류했다. 같은 해, 루마니아 독재정권과 비밀경찰을 비판한 <숨막히는 탱고>가 발표되자 헤르타 뮐러의 모든 서적이 루마니아에서 출판 금지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작가로서의 삶이 원천 봉쇄되었다. 헤르타 뮐러는 다시 용기를 낸다. 그는 국경을 넘는다.

헤르타 뮐러가 신문과 잡지에서 흥미 있는 단어들을 가위로 오려내 모은 ‘낱말 상자’.

헤르타 뮐러가 신문과 잡지에서 흥미 있는 단어들을 가위로 오려내 모은 ‘낱말 상자’.

1987년, 헤르타 뮐러는 독일로 망명했다. 신문과 잡지에서 흥미 있는 단어들을 가위로 오려내 모은 “낱말 상자”가 전 재산이었다. 독일 정부는 망명 작가 헤르타 뮐러에게 몇 가지 사항을 당부했다. “모르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지 마시오. 선물을 받지 마시오. 혼자 공원에 가지 마시오.” 1989년 12월25일, 마침내 차우셰스쿠가 처형되었다. 그 후로도 약 1년 동안 헤르타 뮐러는 ‘익명의 협박’에 시달려야 했다. 힘들 때마다 독일에 온 이유를 떠올렸다. 글쓰기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자전적 산문집 ‘외다리 여행자’ 작품성 인정받으며 이름 알려져
이후 글쓰기는 ‘루마니아 악몽’ 이야기하며 삶의 가치 환기

헤르타 뮐러는 거대한 도시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산문집 <외다리 여행자>를 1989년에 발표한다. 독일에서 작품성을 인정받고 독자들을 확보하자 그는 루마니아에서 겪은 이야기들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다. 차우셰스쿠 독재정권 치하에서 고통스러운 청춘을 보낸 다섯 명 주인공의 삶이 1994년 <마음짐승>에서 헤르타 뮐러의 처연하고도 사실적인 언어로 복원된다. 그는 의문투성이로 세상을 떠난 두 친구 롤프 보세르트와 롤란트 키르시를 잊지 않았다. 차우셰스쿠 독재정권 치하에서 두 친구의 부검은 허용되지 않았다. 서둘러 자살로 종결되었다. 헤르타 뮐러는 스스로에게 어려운 질문을 던진다.

“침묵하면 불편해지고, 말을 하면 우스워”지는 곤혹스러운 시대에 과연 문학은 무엇을 감당할 수 있을까? 그는 자신의 글쓰기가 증언에 머물기를 원하지 않았다. 헤르타 뮐러는 자신이 겪었던 ‘악몽’을 이야기하면서 삶의 가치를 환기시켰다. “이것들 보라고, 살고들 싶지.” 헤르타 뮐러는 자신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겪었던 악몽의 시대로 한 걸음 더 들어간다.

헤르타 뮐러의 아버지는 집안의 ‘우환’이었다. 아버지는 17세에 나치 친위대에 입단했고, 전쟁터에서 돌아온 후 트럭 운전사로 일하며 평생을 술에 의탁해 살았다. 자신의 과거를 일절 발설하지 않았다. “아침에 출근할 때는 멀쩡하던 사람이 밤에 집에 돌아올 때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죠. 분노에 가득 차고 화를 내고 폭력적으로 변해 있었어요.” 헤르타 뮐러의 어머니는 독일계라는 이유로 연합국의 적이자 죄수가 되어 소련의 우크라이나 강제수용소에서 5년간 노역에 시달리며 감자로 연명했다. 어머니는 25세에 너무 늙어 버렸다. 감자만 보면 집착했다. 어머니뿐만이 아니었다. 헤르타 뮐러가 자란 마을에는 이렇게 강제수용소에 끌려갔다 온 사람들이 많았지만, 자기들끼리만 비밀스럽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2001년, 헤르타 뮐러는 강제추방을 당했던 마을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의 삶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헤르타 뮐러가 동료 시인 오스카 파스티오르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헤르타 뮐러가 동료 시인 오스카 파스티오르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동료 시인 오스카 파스티오르도 어머니와 같은 이유로 소련의 강제수용소로 보내져 잡초와 감자 껍질을 삼켜가며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헤르타 뮐러는 그에게 공동 작업을 제안하고 본격적인 자료 수집에 착수했다. 헤르타 뮐러와 함께 우크라이나 수용소를 방문한 오스카 파스티오르는 당뇨를 극복하기 위해 철저하게 식이 조절 중이었으나 음식을 넘치도록 주문해 모조리 먹어치웠다. 헤르타 뮐러는 어떤 기억은 사람을 돌변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오스카 파스티오르는 2006년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헤르타 뮐러는 1년 동안의 공백기를 거친 후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2009년 3월, 헤르타 뮐러는 <숨그네>를 발표했다. 아사 직전에 처한 주인공 레오는 자신의 유일한 재산인 흰색 손수건을 그 무엇과도 바꾸지 않는다. 허기에 이성을 잃고 손수건을 음식과 바꿀 뻔도 했지만, 레오에게 손수건은 운명이자 희망이었다. 레오는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아 집으로 돌아온다. 헤르타 뮐러에게 문학은 극한 상황에서도 포기할 수 없는 운명에 대한 믿음이었고 삶에 대한 의지였으며 타인을 향한 사랑을 뜻했다. 헤르타 뮐러는 2009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노벨 문학상 수상 연설을 하며 헤르타 뮐러는 청중들에게 물었다. “당신은 손수건을 가지고 있습니까?” 글 쓰는 여자는 자신의 운명을 믿는다.

■ 필자 장영은

[여성,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22)억압과 공포의 시대…극단의 선택 극복할 힘을 ‘문학’에서 찾다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초빙교수다. 이태영, 천경자, 박완서 등 20세기 초 한국 여성 지식인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과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공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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