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무이한 직책 ‘오케이어’로 산다는 것···“자아보다 언어를 우위에 두는 헌신이 중요”

2022.06.05 14:31 입력 2022.06.05 14:55 수정

지난 4일 서울 코엑스 서울국제도서전에서 강연을 하고 있는 메리 노리스. 대한출판문화협회 제공

지난 4일 서울 코엑스 서울국제도서전에서 강연을 하고 있는 메리 노리스. 대한출판문화협회 제공

‘오케이어(OK’er)’는 미국 주간지 뉴요커에만 있는 직책이다. 기계적 교열 업무를 뛰어넘어, 문법과 문학뿐만 아니라 삶 전반의 넓고 깊은 지식을 바탕으로 질의·교정하며 원고를 다듬고 책임지는 자리로 알려져있다.

25년간 오케이어로서 뉴요커의 글을 읽고 다듬어 온 ‘콤마퀸’이자 책 <뉴욕은 교열 중> <그리스는 교열 중>의 작가로도 널리 알려진 메리 노리스(70)가 지난 4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서울국제도서전을 찾았다. 노리스는 엄격한 철학과 특유의 유머가 어우러진 강연을 통해 언어와 직업에 대한 자신의 헌신과 사랑에 대해 이야기했다.

“일반적인 교열 편집자가 표기법, 철자, 구두점 등을 조정하는 작업을 주로 한다면, 오케이어는 글에 해석적으로 관여해 더 나은 문장과 용어 등을 제안하며 작가의 글을 개선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인쇄 직전까지 편집상의 실수가 발생하지 않도록 철저히 감수하는 역할도 맡습니다.”

노리스는 오케이어라는 유일무이한 직책을 이같이 소개했다. 그는 “인쇄에 임박해서는 지금까지의 수정 사항이 온당한지에 대한 추가적 평가 회의인 ‘오케이 미팅’을 여는데, 이때 편집자와 팩트체커, 교열 편집자 등과의 치열한 소통이 벌어져 이전보다 원고가 10% 정도 개선되는 효과가 있다”고 설명했다.

오케이어이자 교열 편집자로서의 그가 고수하는 가장 중요한 원칙은 “해를 끼치지 않는 것(Do no harm)”이다. 노리스는 “교열 편집자는 무대 뒤편에서 보이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주목받는 순간은 보통 실수를 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라면서 “이 직업은 내 자아는 억누르면서 언어를 우위에 두어야 하는 업무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직업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언어와 글에 대한 직업을 ‘자아실현’과 연관 짓는 일반적인 생각과 달리, 노리스는 언어의 탁월성에 대한 자아의 헌신을 강조한다. 그는 “이 일을 하는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글의 세부사항에까지 기울일 관심과 언어에 대한 헌신”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지난 4일 서울 코엑스 서울국제도서전에서 강연을 하고 있는 메리 노리스. 대한출판문화협회 제공

지난 4일 서울 코엑스 서울국제도서전에서 강연을 하고 있는 메리 노리스. 대한출판문화협회 제공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한층 빨라진 언어의 변화 속에서도 노리스는 ‘강경한 보수주의자’를 자처한다. 그는 “인쇄물을 통해 세상에 어떤 단어가 내보내지는 것을 허락하기 전에, 그 단어가 가진 지속력을 확실히 하고 싶다”면서 “예컨대 앞으로 1년 이후에는 더 이상 사용하지 않을 신조어와 속어들을 잡지에 담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소셜미디어를 통해 많은 이들이 스스로 작가가 되지만 여기에는 교열의 기능이 없다. 나는 그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정통 표기법을 고수하려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뉴욕은 교열 중>에 쓰여 있듯, 노리스의 첫 직업은 열다섯 살 때 클리블랜드 공공 수영장에서 발이 깨끗한지 검사하는 ‘발 검사자’였다. 이후 의상업체 직원, 우유 배달원, 치즈 공장 직원 등 특이한 이력을 전전하고 25세에 뉴요커에서 마침내 일하기 시작했다. 그가 이곳을 평생 직장으로 삼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돈을 벌어야 했으니까요.” 웃음 띤 얼굴로 그는 말을 이었다.

“뉴요커에 입사해 처음 3년은 아카이브 도서관에서 잡지 내용을 분류하는 작업을 했어요. 창문 너머의 반대편 4층짜리 건물을 보며 ‘내가 일하고 싶은 곳은 저곳 교열 데스크인데…’라고 생각하면서요. 오랜 인내 끝에 결국 그 자리에 들어가게 됐죠. 언제나 단어에 매력을 느껴왔고, 단어에 대한 지식이 나를 좋은 작가와 독자로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단어와 관련된 일로 생계를 잇게 된 것이 정말 좋았습니다. 글을 충분히 고치지 않거나, 너무 많이 고친 적도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저는 작가들을 당황스러운 실수로부터 지켜주는 좋은 편집자로 성장하게 됐습니다.”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