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무서운 신인들

2012.10.23 22:00
김재희 작·김정란 그림

상섭이 먼저 김동인을 알아보았다. 옆구리에 서류 봉투를 끼고 앙상스럽게 걸어오는 왜소한 체구의 남자가 보였다. 아팠다더니, 동인은 어두운 안색에 퀭한 눈으로 한 치수 커 보이는 양복을 걸치고 있었다. 살이 많이 빠졌고, 어깨도 처진 것이 의기소침해 보였다.

동인이 약간 저어하는 눈빛으로 멈칫하였다. 상섭은 안경알 너머로 눈을 부리부리하게 떠서 동인을 노려보았다. 동인은 길을 어떻게든 피하여 볼까하고 종로거리를 횡단하려 하였지만, 자동차와 우마차가 지나다니는 통에 여의치 않았다. 그가 머뭇거리는 사이 상섭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저어기, 염 군. 소설이라는 것은 말이야. 현실이 아니야. 그냥 그 자체 허구라고.”

상섭은 두툼한 손바닥을 들었다. 김동인이 서류봉투를 들어 머리 위를 방어하는데 상섭이 크게 웃었다. 상섭의 손은 동인의 어깨 자락에 멈춰서 토닥였다.

[소설 횡보 염상섭](13) 무서운 신인들

“ ‘젊은 그들’ 잘 보았네. 모름지기 신문연재소설은 그런 스피디한 전개가 잘 어울려, 암.”

“그, 그래? 나도 ‘삼대’ 잘 보았어. 이번에는 자네에게 졌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런가? 아무렴 어떤가? 둘 다 계속 작품을 쓸 터인데. 쿠하하하.”

“그렇지? 하하하.”

누구랄 것도 없이 웃음보가 터져버린 두 사람은 사이좋게 어깨동무를 하고 선술집에 들어가 막걸리 한잔으로 앙금을 풀었다. 상섭은 ‘발가락이 닮았다’ 사건으로 동인에 대한 해묵은 열등감을 다 털어버렸다는 시원함이 앞섰다. 이제는 더 이상 바닥을 드러내 보일 것도 없었다. 만천하에 가장 깊은 곳 비밀까지 보여주니 후련한 마음이었다.

1932년 3월 장편소설 ‘백구(白鳩)’를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기로 하고 준비하는 중 만주국이 세워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1931년 9월 일본 관동군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 북동부를 점거한 지 6개월 만의 일이다. 청나라 푸이 황제를 앉히고 실권은 일본군 사령관이 가져갔다. 친일 만주국의 등장으로 무장 독립군이 위협을 받게 되었다. 12월20일 ‘백구’ 원고를 넘기고 신문을 펴보는데 ‘상하이 폭탄범 윤봉길 총살’이라는 기사를 보았다.

“아, 사형을 받았구나.”

4월29일 홍구공원 의거 이후, 재판과 감옥생활 중에도 일본을 타도한다는 기개를 잃지 않던 윤봉길 의사가 사형 집행 당한 것이다.

“죽음도 불사하는 윤봉길 의사 앞에 무릎이 꿇어지는구나.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냐. 나의 작품이 그의 숭고한 죽음 앞에 당당한 것이라 말할 수 있느냐.”

뒤숭숭한 정세에도 상섭의 문학 시계는 계속 돌아갔다. ‘삼대’, ‘무화과’, ‘백구’로 이어지는 삼부작을 완성했다. 혈연으로 이어지는 삼대가 돈으로 인해 갈등을 빚고 죽음도 불사하며, 또한 애증이 뒤섞인 사랑으로 이어지면서 결국에는 돈으로 파멸되는 인간군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상섭은 어느 때보다 큰 문학적 성취감을 느꼈다. 게다가 큰딸을 얻어서 기쁨은 두 배가 되었다.

‘참으로 행복하였구나. 삼대와 더불어 무화과를 따고, 백구까지 하늘 높이 날려 보냈으니. 나는 작가로서 다 가졌다.’

1934년, 매일신보에 ‘모란꽃 필 때’라는 신여성을 다룬 소설을 연재할 때였다. 7월24일자 조선중앙일보를 펼쳐든 상섭은 대경실색하였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오.(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4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중략)’

이런 식으로 밑도 끝도 없이 13인의 아해가 무섭다는 이야기가 되풀이되는 괴상망측한 시가 신문에 떡하니 실렸다. 제목은 ‘오감도 시 제1호’였다.

‘이상이라? 아하, 종로에서 금홍이라는 기생하고 다방 차렸다는 건축기사 출신 시인?’

상섭은 당장 신문사로 전화를 걸어 이태준 편집국장을 찾았다.

“염 선배님, 보셨어요? 지금 신문사 난리 났어요. 구인회 후배라기보다는 시 자체가 발칙하고 기발해서 실어줬는데, 저 지금 사표 품고 다녀요. 신문 폐간하라, 폭탄 투척하겠다 독자들이 생난리라니까요.”

요것 봐라, 좋아죽겠다는 투인데?

구인회라면 1933년 8월에 경향문학에 반발하여 순수문학을 추구한다는 취지로 결성된 문학계 신진세력이었다. 하릴없이 이상이 열었다는 제비다방에 몰려다니지만 글 쓰는데 있어서는 어디에도 빠지지 않는 무적들이었다.

‘오감도’는 7월24일부터 8월8일까지 연재되었다. 독자들의 항의로 중단되었지만 시 자체가 문단에 던져주는 충격은 파장이 컸다. 같은 구인회 멤버인 박태원은 ‘소설가 구보 씨의 1일’이라는 소설을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였다. 룸펜의 경성 생활을 그린 소설로 포복절도할 우스운 이야기들이 세세하게 묘사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상이 하융이라는 화명(畵名)으로 삽화를 그려 더욱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무서운 아이들이로구나. 김동인이라는 산을 넘어왔더니 이제는 또 다른 산맥을 만났구나. 내가 이끌어줘야 되는 것이냐, 비켜주어야 되는 것이냐, 아니면 까여야 되는 것이냐.”

상섭은 신세대들의 문학 조류를 지켜보면서 자신의 문학관을 재정비하였다.

이듬해 5월 상섭이 매일신보 사회부장이 되어 김팔봉 등과 함께 근무할 때 카프 해체를 보게 되었다. 1925년 조직되어 순수문학파와 수많은 논쟁을 겪고, 자체적으로도 분열되어 진통을 하다 30년대 들어서는 일제의 탄압 속에 소속작가들이 검거되기도 하였다. 상섭은 카프 작가들에게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목숨을 내놓고 글 쓴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 줄 알기에 진정으로 존경심을 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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