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행정가 김주호를 떠나보내며

2013.06.05 21:36
문학수 선임기자

삼우제가 끝났습니다. 그렇게 당신을 떠나 보내고 유고(遺稿)를 읽습니다.

‘안녕하십니까? 한국에서 온 김주호입니다’로 시작하는 원고를 눈으로 읽어 가노라니, 마치 생시이기라도 한 것처럼 당신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영어로 쓰여진 A4용지 10장짜리 원고입니다. 쓰다가 지우고 다시 쓰기를 반복한 꼼꼼한 문장들이 당신의 성품을 많이도 닮았습니다. 예술의전당과 LG아트센터의 실무 책임자, 문화예술교육진흥원 초대 원장, 서울시립교향악단 대표, 그리고 클래식 전용홀로 건립 예정인 롯데홀 대표에 이르기까지, 당신이 지난 26년간 공연장과 오케스트라에서 갈고 닦은 노하우가 쉽고 간결한 문장으로 빼곡하게 담겨 있군요. 게다가 저 같은 영어 까막눈도 더듬더듬 읽을 수 있을 만큼 쉬운 문장들입니다.

이 원고를 마지막으로 심장이 멈추지 않았다면, 아마 당신은 지금쯤 오스트리아 빈에 있었겠지요. 빈에서 열리는 국제포럼 ‘클래시컬 넥스트’에서 한국 측 대표로 연설할 예정이었던 당신은 지난달 26일 새벽 3시께 쓰러졌습니다. 연설 원고를 마무리한 직후였습니다. 숨 가쁜 소리에 놀란 아내가 119에 전화를 하고 고등학생 아들이 인공호흡을 시도했지만 당신의 의식은 영영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고 말았지요. 119 대원들이 심폐소생술을 시도하면서 병원으로 내달렸지만, 이미 사망했다는 의사의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것이 새벽 4시37분이었지요.

동그란 안경 속에서 빛나던 작은 눈. 아마 오래도록 못 잊을 것 같습니다. 외양은 조용했지만 내면은 용감했던 사람. 문화계 인사들이 정치권에 줄 대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행태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당당한 전문가. 당신은 정치인에게 굽실거리며 ‘자리’를 얻으려 하지 않았고 패거리를 만들어 문화계에 군림하려고 한 적도 없지요. 그래서 저는 장례식장에서 오열하는 당신의 후배들을 보면서, ‘그래 잘 살았구나 김주호’를 몇번이고 마음 속으로 되뇌였지요.

다시 당신의 유고에 눈을 돌립니다. ‘경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문장이 53년 생애의 마침표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요. 어쩌면 이렇게, 죽음마저도 당신답습니까? 허다한 문화 기관장들이 부하 직원에게 시켰을 법한 그 연설 원고를, 당신은 밤을 새워 손수 쓰다가 결국 가고 말았어요. 하지만 김, 주, 호… 그래서 당신의 이름은 기억돼야 해요. 한국 공연계의 테크노크라트 1세대를 대표했던 인물. 배경이나 로비가 아니라 실력과 성실함으로 승부하려고 했던 사람. 그래서 당신을 좋아했어요. 잘 가요 김주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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