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소설가 성석제

2014.08.29 21:12 입력 2014.08.29 21:23 수정
글 백가흠 | 소설가·사진 백다흠 | 은행나무 편집자

그의 소설을 닮고 싶었습니다

소설은 물론 작가의 분신이기도 하고 일부이기도 합니다. 오랫동안 작가의 내면에 쌓인 역사가 소설이 되는 셈이지요. 그러니 소설엔 작가가 일정한 부분 드러날 수밖에 없을 겁니다. 하지만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서술자를 작가로 착각하면 안 됩니다. 거기엔 왜곡되거나 과장된 음모가 숨어 있기도 하니까요. 그 의도 뒤에 작가는 숨어서 독자를 바라보기도 하고 서사를 진행하기도 합니다. 각설하면 소설은 소설일 뿐, 작가로 오해하지 말자는 얘기입니다. 물론 저도 좀 그렇게 봐 주십사 하는 말입니다. 저는 언젠가 독자에게 사람을 죽여본 적 있는 것 같다는 소리도 들었으니까요. 지금도 칭찬으로 고맙게 새기고 있습니다.

유난히 소설 수업에 강조되는 작가가 몇 있는데 저도 강의할 때 다르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제가 이름 붙인 것은 ‘판소리소설계보’라는 것입니다. 1930년대 일제라는 시대 상황과 맞물려 착취당하고 고통받는 민초들의 아이로니컬한 상황을 담은 사실주의 소설이 있었던 것은 우리 서사문학의 맨 처음이 사회나 계습의 풍자와 해학으로 풀어낸 판소리소설을 근원으로 삼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 한국소설의 정통기법을 이어받아 후대에 큰 족적을 남긴 작가들이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1970~1980년대 독재의 암울한 상황을 거치면서 아이러니, 그러니까 풍자적이고 해학적인 소시민의 인생을 소설에 풀어내 훌륭한 문학적 성과를 이룬 이, 몇 있다는 말씀입니다. 처한 역사적 현실과 그 안에 사는 시민들의 삶을 역설로 풀어내야 하는 과제가 이들에게 주어졌습니다. 거기에서 쓴웃음과 유머가 생겨나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그런 계보의 소설을 쓰는 이는 드물었습니다. 보통의 그냥 쓰는 소설보다 반대로 얘기하는 일이 어렵다는 말입니다.

이문구 선생의 소설이 대표적이겠지요. 그리고 1990년대에는 성석제 작가가 그렇습니다. 돌아가신 김소진 작가가 그렇습니다. 후에는 소설가 이기호가 그 계보를 잇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걸 겁니다. 우리 서사의 근원을 다룬다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소설을 읽는 독자는 이미 그런 이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것은 문학을 공부해서 아는 것이 아니고 이미 우리 피에 그것에 대한 이해가 녹아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보편성 안에서 소설을 쓴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정말 잘 써야지 겨우 소설이 남는다는 말이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그의 소설은 현재진행형인 동시에 훗날의 역사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미래는 소설가 성석제가 우리 서사의 근원과 후대를 잇는 어떤 징검다리였는지 평가하게 될 겁니다. 우리가 김유정이나 김동인을 잊지 않는 것처럼 성석제를 부르게 될 겁니다. 그의 작품은 출간하는 족족 이미 역사가 되고 있습니다. 독자가 찾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일이지요. 그의 소설은 그래서 언제나 우리를 향해 있습니다. 소설에서 등장하는 작가의 흔한 지적 자부심이나 허영 같은 것이 드물지요. 우리를 향한 완벽한 소설을 그는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축복받은 독자입니다.

[백(白)형제의 문인보](21) 소설가 성석제

성석제 작가의 소설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갖게 되는 믿음이나 기대감이 있을 겁니다. 소설이 너무 유려하고 입담이 좋아서 작가도 소설처럼 재밌을 거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의 소설만큼 기대감을 크게 만드는 작가도 드물 겁니다. 작품은 유려하고 입담이 넘치며 어떻게 이런 일까지 알고 있을까, 박식함도 넘칩니다. 소설 읽는 재미, 가독성에 있어 한국에서 따라올 자 몇 없지요.

제가 받은 인상은 그와는 조금 다릅니다. 아주 솔직하게 말하자면 작가가 소설만큼 재미는 없습니다. 그는 말과 말 사이 틈이 길고 하고자 하는 말은 뒤에 있습니다. 신중하고 진중하지요. 끝까지 주의해서 듣지 않으면 왜 이런 말을 시작했는지 잊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뒤에 오는 말은 의미 넘치고 재치 있습니다. 그의 농담이 집에 돌아오고 나서 생각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사나 역사적 사건과 인물사, 클래식 음악과 그림, 여행지, 사사로운 음식과 맛집까지 그는 모르는 게 없습니다. 그의 호기심이나 방대한 지적 탐구력에 다가서게 되면 주눅이 드는 것은 당연합니다. 작가들 대부분이 그렇다 한들 그에 비하면 소소함에 불과합니다.

그의 말에 다른 재미가 있지요. 예로 제가 수원 백씨이고 직계조상들은 전주, 정읍, 김제에 뿌리를 두고 살아왔는데 그는 우리 집안의 내력까지도 꿰고 있습니다. 그의 말로 우리네 몇 대쯤 되는 할아버지가 그런 일을 하셨다지요, 아마. 저는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이름도 모르는데 말입니다. 우리 가계 역사를 그를 통해 듣는 것이지요.

그는 조용하고 낮은 음성으로 말하는데 그의 말을 듣는 사람들은 금방 자못 신중해져서 귀를 기울입니다. 하지만 말 뒤엔 농담이나 재치가 숨어 있습니다. 여운이 길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백(白)형제의 문인보](21) 소설가 성석제

그를 강원도 평창에서 처음 보았습니다. 십년 전쯤 이효석문학상 시상식 때였는데 메밀밭 한가운데 무대가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하루 일과를 마친 마을 주민들이 무대 앞 자리를 메웠습니다. 따뜻하고 정겨운 풍경이었습니다. 그가 수상자라는 것이 잘 어울렸습니다. 지금은 이효석문화제가 조금 화려한 지역행사로 바뀌었지만 그 시작은 조촐하고 정겨웠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에 대한 첫 기억도 소설적 풍모와 잘 어울리는 소박한 풍경 안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와 단둘이었던 적이 한번 있었는데 잠깐이었습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기회가 적었습니다. 생각해보면 모임에서 자주 보기도 하고 때로는 지방행사에서도 줄곧 마주치기도 했습니다만, 좀체 제가 그에게 가는 길은 멀게만 느껴졌습니다. 떠드는 저와 조용한 그 사이에 울타리 같은 것이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양평 김화영 선생 댁에 놀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청량리에서 둘이 기차를 타고 양평에 간 짧은 시간이 그와 단둘이 가장 오랫동안 함께한 시간이었습니다. 천천히 흘러가는 강을 따라 기차는 더디게 달렸습니다. 저와는 꽤 차이가 나는 세대이고 자주 볼 기회가 없어서 선배라기보다는 선생님이나 그저 소설가로밖에는 대할 수 없어 어려웠습니다. 나란히 앉아 기차를 타고 가는 것이 신기하게만 느껴졌습니다. 이십대에 읽었던 그의 소설들이 머릿속에서 느리게 흘러가는 강처럼 지나쳐갔습니다. 저는 그의 소설을 닮고 싶었습니다. 저와 함께 학교를 다닌 친구들은 잘 알고 있는 사실이기도 하지요. 오랫동안 마음속 문학스승으로 모셔온 분과 함께한다는 것이 벅찼습니다.

그의 말은 느리고 가늘고 조용했습니다. 열차가 출발하자 기억 저편에서 출발한 기차의 기적이 울리기 시작했나 봅니다. 고등학교 다닐 때 아버지와 단둘이 살던 곳이 기찻길에서 보인다고 했습니다. 그곳에서 살던 시절의 한때를 그는 가만가만 얘기했습니다. 오랜 기억 속의 한때를 건너는 축축한 눈이 남한강 물빛을 따라 흐르고 있었습니다.

▲ 소설가 성석제

1960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연세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1994년 소설집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를 내면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중단편 소설집으로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 <조동관 약전> <호랑이를 봤다> <홀림>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어머님이 들려주시던 노래> <참말로 좋은 날> <지금 행복해> <이 인간이 정말>이 있고, 짧은 소설을 모은 <재미나는 인생>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을 펴냈다. 장편소설로는 <왕을 찾아서> <아름다운 날들> <도망자 이치도> <인간의 힘> <위풍당당> <단 한번의 연애> <투명인간>을 펴냈다. 한국일보문학상, 동서문학상, 이효석문학상, 동인문학상, 현대문학상, 오영수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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