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이번 주 팟캐스트는 ‘패장 신립을 위한 변명’입니다.

서애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충주 전투에서 대패한 신립 장군을 두고 “장수가 군사를 쓸 줄 모르면 그 나라를 적군에게 넘겨주는 것”이라고 폄훼했습니다. 그러면서 “신립(1546~1592)은…전투의 계책에는 부족한 인물이다.”라 했습니다. 명나라 사령관인 이여송도 “천혜의 요새지(조령)를 몰랐으니, 신립은 지모가 부족한 장수였다”고 촌평했습니다. 그 뿐인가요. 1801년(순조 원년) 탄금대를 지나던 다산 정약용은 “신립을 깨워 ‘왜 문(조령)을 열어 왜적을 받아들였는지 묻고 싶다”고 했습니다. 임진왜란 때 신립이 천혜의 요충지라던 조령(해발 642m) 대신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다가 대패한 것을 비판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궁금증에 생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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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조선의 종묘사직이 급속도로 기운 책임이 전적으로 신립에게만 있을까요. 신립은 1583년 여진족의 침범을 막아낸 용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징비록>은 시종일관 신립을 부정적인 인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신립은 성질이 잔인하고 사납다는 평판이 있다.… 신립이 무사를 모집했지만 따라가려는 사람이 없었다.”

서애는 장수(신립)를 잘못 썼음을 토로하면서 “지금 후회한들 어쩌겠냐만 훗날의 경계를 위해 기록한다”고 썼습니다. 서애는 신립을 ‘징비(懲毖)’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립은 그리 용렬한 장수가 아니었습니다. 전쟁에 총지휘할 체찰사(류성룡)와 부체찰사(김응남)가 문신들로 채워지자 “무장인 내가 나서겠다”고 화를 내며 고집했을 뿐입니다. 신립은 결국 오합지졸 8000명을 이끌고 나섰습니다. 하지만 왜적은 이미 조령 인근까지 접근해있었습니다. 게다가 조령 주변에는 몇군데 우회로가 있었습니다. 만약 천험의 요새지라는 조령만 막았다가 왜적이 우회라도 한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아마 서울의 임금과 조정은 피할 틈도 없이 화를 입었을 지도 모릅니다.

결국 신립은 왜병이 반드시 거쳐가야 할 요로, 즉 충주(탄금대)에 병력을 집중한 것이 아닐까요. 그 잘난 임금과 종묘사직을 위해 옥쇄를 결심한 것은 아닐까요. 신립을 위한 변명 한마디 해봤습니다. 이번에도 관련 기사와 함께 팟캐스트를 애청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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