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과 혐한 뚫은 창의·열정…대중문화 전방위로 영역 확대

2018.10.04 20:01 입력 2018.10.04 20:04 수정

[창간기획-한류 20년의 발자취]편견과 혐한 뚫은 창의·열정…대중문화 전방위로 영역 확대

6년 전 싸이가 ‘강남스타일’을 터트렸을 때만 해도 긴가민가했다. 방탄소년단이 한 해 두 차례 ‘빌보드200’ 정상에 오른 것은 몇 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던 기적같은 일이다. 아이콘과 슈퍼주니어는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폐막식 피날레를 장식했다. 일부에서는 2018년을 기점으로 한류가 글로벌 대중문화로 발돋움하고 있다는 평가까지 내놓는다. 미국 경제지 포브스는 방탄소년단이 빌보드 정상에 오른 것에 대해 “방탄소년단과 한국 음악계에만 중요한 일이 아니라 2010년대 팝 음악계 전체에 의미 있는 일”이라고 밝혔다. 2018년 한류는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위기도 많았다. 일본과의 독도 영유권 분쟁, 중국과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분쟁 등 정치적 상황에 휘말릴 때마다 위축됐다. 한류의 급격한 성장을 견제하는 반한류 정서도 넘어야 했다. 해외는 물론 국내에서도 한류가 불꽃처럼 타올랐다가 곧 사라질 것이라는 부정적인 전망과도 싸워야 했다. 한류는 수많은 부침을 겪어가며 K팝을 비롯해 드라마, 영화, 웹툰, 게임, 출판 등에서 한 걸음씩 세계인과 가까워졌다. 이제는 뷰티, 패션, 음식 등으로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지난 20년간 발자취에 따라 한류는 1.0~4.0으로 나뉜다. 다만 정확한 정의가 없어 사람마다 규정하는 기간이 조금씩 다를 수는 있다. 굵직한 변곡점이 있던 사건을 중심으로 한류를 분류해봤다.

■한류 1.0 - 1997년 외환위기로 제조업이 흔들릴 때 탄생…중국에 첫 상륙

한류는 1997년 외환위기로 한국 ‘제조업’이 흔들릴 때 벼락처럼 다가왔다.

대표주자인 ‘K드라마’가 중국과 일본 등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1997년 중국 CCTV에 방영된 <사랑이 뭐길래>는 시청자 수 최고 3900만명, 역대 수입 외화 시청률 2위(4.3%)를 기록했다. 이를 계기로 <별은 내 가슴에> <목욕탕집 남자들> 등 한국 드라마가 봇물처럼 중국 지상파를 점령했다.

1998년 당대 최고 아이돌이던 H.O.T.의 음반이 중국에서 정식 발매됐다. 흥겨운 춤과 리듬의 ‘꿍따리 샤바라’를 앞세운 가수 클론은 1998~99년 대만과 중국 공연을 성황리에 마쳤다.

북경청년보는 1999년 11월 “한바탕 한류가 로보캅 같은 클론을 보내고 두 손 가득 H.O.T. 홍보 전단을 들게 했다”고 적었다. ‘한류’라는 단어가 쓰인 것은 이때부터다.

2000년 H.O.T.의 베이징 단독공연은 한류의 중국 진출을 본격적으로 알리는 신호탄이 됐다. 중국예술보는 “한류가 중국을 습격했다”고 표현했다.

화들짝 놀란 중국은 한국 가수들의 단독공연을 한동안 금지하기도 했다. 베이비복스, 안재욱, 박미경, NRG 등이 1세대 한류스타였다.

영화계에서도 히트작이 나왔다. 영화 <쉬리>는 1999년 홍콩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고, 2000년 일본에서도 개봉 첫주 흥행 1위에 올랐다. <나의 야만적인 여자친구>로 번역돼 2002년 중국에서 상영된 전지현 주연의 영화 <엽기적인 그녀>는 ‘엽기’ 열풍을 일으켰다.

동남아에서의 한류 열풍도 이때 시작됐다. 베트남 호찌민 TV는 1997년 황금시간대에 드라마 <금잔화>를 편성하며 K드라마를 본격 소개했다. 보아, 비, H.O.T., 신화, 핑클 등 가수들도 2000년대 초 베트남에 진출했다. 당시는 CD, VOD, 지상파를 통해 한류가 전달됐다.

이창동 전 문화부 장관은 “한류라는 단어는 (2003년 장관이 될 당시에도) 긴가민가한 용어로 괜히 우리끼리 들떠서 하는 말이 아닌가 이런 느낌이었다”며 “그때만 해도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했다”고 회고했다.

■한류 2.0 - ‘대장금’ ‘겨울연가’ 드라마 열풍…동남아·중동으로 무대 넓혀

급속히 보급된 인터넷과 케이블·위성 방송은 한류를 아시아 무대로 확산시켰다. 국내 연예기획사와 방송사는 해외진출을 염두에 두고 기획을 준비했다. 일본에 ‘욘사마’ 열풍을 불러온 <겨울연가>와 중동과 동남아시아를 들뜨게 한 <대장금> 등 드라마가 앞장섰다. 한국 관광이 급증하고, 한국어를 배우는 사람이 폭증하는 등 사회현상으로 이어졌다. 일본 현지 매체들은 ‘대중문화 선진국 일본에 왜 한국 문화가 인기 있을까’라고 자문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으로 고조된 한·일 교류 분위기는 한류 열풍에 날개를 달았다. 가수 보아는 100만장의 앨범을 팔며 한국 가수로서는 처음으로 오리콘차트 앨범부문 1위에 올랐다.

중국에서도 K드라마와 K팝이 인기몰이를 했다. 2005년 가수 장나라는 중국 골든디스크 최고 인기가수상을 수상하며 ‘천후’ 별칭을 얻었다. 2004년 중국에서 시청률이 가장 높은 해외 드라마 10편 중 6편이 한국 드라마였다. <대장금>은 14%라는 높은 시청률로 ‘장금이 정신’이라는 용어까지 탄생시켰다.

인도네시아도 한류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2002년 최초로 방송된 한국 드라마 <가을동화>는 원빈과 송혜교를 스타로 만들었다. <대장금> 시청률은 30%에 육박했다.

한국 영화가 본격적으로 해외에 소개된 것도 이 시기다. 2002년 임권택 감독은 <취화선>으로 칸영화제 감독상, 이창동 감독은 <오아시스>로 베니스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했다. 2004년 박찬욱 감독은 <올드보이>로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 김기덕 감독은 <사마리아>로 베를린영화제 감독상을 받았다.

한국 게이머와 비보이도 무대를 세계로 넓혔다. 임요환은 게임 올림픽이라 불리는 월드사이버게임스(WCG) 스타크래프트 개인전 2연패를 차지하며 스타로 떠올랐다. 10인조 비보이팀 ‘갬블러크루’는 2004년 독일에서 열린 브레이크댄스 대회 ‘배틀 오브 더 이어(BOTY)’에서 우승하며 한국 비보이를 세계에 알렸다.

2001년 문화관광부는 ‘한류산업 문화 육성방안’이라는 정책자료를 내며 한류를 문화 콘텐츠로 육성하는 방안을 처음으로 제시했다.

거침없던 한류는 2005년 반한류 분위기에 휘청거리기도 했다. 2005년 독도 영유권과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를 두고 한·일 양국 갈등이 심해지면서 일본의 한류가 급격히 식어갔다. 중국도 2005년을 기점으로 부쩍 한류를 경계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중국 당국은 해외 드라마 방영을 축소하면서 한국 드라마를 압박했다.

하지만 한번 터진 물꼬를 막을 수는 없었다. 한류는 소수 마니아층에서 10대에서 20대로, 중국·일본에서 동남아·중동으로 조용히 무대를 넓혀갔다. 2009년 동방신기는 일본 도쿄돔에서 한국 그룹 사상 최초로 단독공연을 성사시키며 K팝 열풍을 예고했다.

■한류 3.0 - 유튜브가 만든 ‘강남스타일’의 기적…독도와 사드로 위기 겪어

2010년대 들어 연예기획사와 콘텐츠 기업의 해외 진출은 더욱 정교하고 다양해졌다. 한류 대신 K팝, K드라마, K뷰티 등 ‘K’가 귀에 익게 된 것이 이때였다.

2011년 ‘SM타운 라이브 파리 콘서트’는 K팝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사건이었다. 동방신기와 슈퍼주니어, 소녀시대, 샤이니 등이 출연한 파리 콘서트 입장권은 발매 15분 만에 매진됐다. 표를 구하지 못한 팬들이 프랑스 루브르박물관 앞에서 공연 연장을 요청하는 ‘시위성’ 플래시몹을 열었다. SM엔터테인먼트는 콘서트를 한 회 더 열어야 했다. ‘파리 소동’은 유럽에도 K팝을 즐기는 팬들이 있음을 전 세계에 알렸고, 망설이던 팬들도 커밍아웃하는 계기가 됐다. SM 관계자는 “파리 공연을 계기로 K팝이 문화현상으로 다뤄지기 시작했다”며 “K팝이 아시아뿐 아니라 유럽에서도 먹힐 수 있구나 하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은 K팝을 전 세계에 알리는 최대 사건이었다. 한류가 대중문화 변방에서 중심지인 북미로, 소수 마니아에서 대중의 문화로 얼굴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강남스타일’은 영국, 독일, 프랑스,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등 30개국 이상의 공식 차트에서 1위를 했다. 미국 대선 때는 ‘오바마 스타일’ ‘롬니 스타일’이라는 패러디물이 나왔다. 2013년 오바마 대통령은 한·미 정상회담 공동기자회견 모두발언에서 “전 세계에서 많은 사람들이 한국 문화, 한류에 매료당하고 있다. 제 아이들이 ‘강남스타일’을 가르쳐줬다”고 말했다.

‘강남스타일’을 세계 무대에 퍼뜨린 것은 동영상 공유 플랫폼 유튜브였다. 유튜브에서 ‘강남스타일’ 뮤직비디오 조회수는 32억회였고, ‘좋아요’ 추천은 845만건을 기록해 기네스북에 올랐다. ‘강남스타일’은 글로벌 기획이나 홍보 없이 세계 디지털 음악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싱글이 됐다.

이를 계기로 한류 콘텐츠 제작 시스템도 급변했다. 거대 연예기획사와 방송국의 홍보·기획에 의존하지 않아도 스타가 될 길이 열렸음을 체감한 것이다. 이른바 ‘완성된 공장형 아이돌’의 시대가 끝나고 유튜브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한 팬덤 형성이 중요해졌다. 2016년 Mnet의 오디션 프로그램 <프로듀서101>은 시청자가 투표해 아이돌 그룹을 직접 선발하고 키우는 방식을 도입했다.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와 <태양의 후예>는 글로벌 신드롬을 불러왔다. 2013년 중국 동영상 사이트 아이치이에서 방영된 <별에서 온 그대>는 첫 방영 당시 조회수 1억뷰, 1일 검색 횟수 200만회를 기록하며 중국 전역을 열풍에 몰아넣었다. 중국 정부가 까다로운 심의 규정을 내세워 K드라마의 지상파 방영은 막았지만, 온라인 플랫폼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2016년에는 <태양의 후예>가 26억뷰 기록을 세우며 또 다른 이정표를 열었다. 두 드라마는 ‘치맥(치킨과 맥주)’, 전지현 립스틱, 송혜교 패션 등으로 이어졌다.

한국 예능프로그램 포맷도 잇따라 세계시장에 진출했다. <나는 가수다> <아빠 어디 가> <꽃보다 할배> <1박2일> <런닝맨> 등 예능프로그램 포맷이 잇달아 중국에 수출됐다. <꽃보다 할배>는 미국 지상파 NBC에서 리메이크판이 방영됐다.

e스포츠에서는 임요환에 이어 차세대 스타가 탄생했다. 이상혁(페이커)은 ‘리그 오브 레전드 월드챔피언십’(롤드컵)에서 잇달아 우승하며 전 세계 게이머들의 우상이 됐다. 비보이팀 ‘진조크루’는 세계 5대 메이저대회 그랜드슬램을 달성하며 비보이 그룹의 전설이 됐다.

그러나 이 시기 한류는 정치적 상황 탓에 두 차례 위기를 맞았다. 2012년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으로 반한감정이 고조돼 일본 내 한류열풍이 급속히 식었다. 중국은 2016년 사드 배치를 이유로 한한령을 내리며 한류 콘텐츠의 중국 진출을 틀어막았다.

이병민 건국대 문화컨텐츠학과 교수는 “중국 정부가 규제로 막아도 모바일 세대인 주링허우(1990년대생), 링링허우(2000대생)의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은 식지 않고 있다”며 “K팝, 드라마뿐 아니라 e스포츠, 웹툰 등도 더 확산되고 있다”고 말했다.

■한류 4.0 - K팝 존재감 과시한 방탄소년단…큰물에서 통할 ‘신무기’ 모색

중국의 한한령은 한류의 무대를 남미와 북미 등 글로벌시장으로 재빨리 돌리는 계기가 됐다. 2017년 방탄소년단은 K그룹 최초로 ‘아메리칸 뮤직어워드’ 초청을 받아 미국에 데뷔하며 한국 대중문화사를 새로 썼다. 이후 미국 ABC방송의 <지미 키멜 라이브> 등 3대 토크쇼에 출연하는 등 활발히 얼굴을 알렸다.

리메이크된 KBS 드라마 <굿닥터>는 ABC에서 방영돼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콘텐츠 기업인 CJ ENM이 주최하는 ‘2018 케이콘 LA’ 행사에는 사흘간 9만명이 참여하는 등 북미에서 한류에 대한 관심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넷플릭스, 애플TV, 훌루, 드라마피버 등 새롭게 등장한 플랫폼은 한류의 북미 확산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과거 소수 마니아층의 관심을 받던 한류가 지금은 북미에서 한 장르로 주목받기 시작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김지연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연구원은 “한류가 단발적이며 곧 끝날 것이라는 편견은 싸이 때도 많이 나왔지만 방탄소년단이 이것을 완전히 깼다”며 “콘텐츠라는 게 불확실성이 크기 때문에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지만 K팝이 전 세계에 알려진 성과는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K팝은 일본, 중국, 동남아 등과의 협업을 통해 또 다른 비상을 준비하고 있다. Mnet 오디션 프로그램 <프로듀서 48>을 통해 시청자 투표로 선발된 장미영, 미야와키 사쿠라 등 12명의 한·일 소녀들은 그룹 ‘아이즈원’을 결성해 활동을 시작한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실장은 “2014~2015년 증시 보고서를 쓸 때 한류는 한계가 있어 아시아를 못 넘어설 것으로 예측했는데 틀렸다”며 “아시아를 넘어설 수 있는 원동력이 무엇이었는지 분석해 봐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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