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립에서 관계망으로

2018.10.19 16:24 입력 2018.10.19 16:26 수정
조은아 | 피아니스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예브게니 키신은 완벽주의자이자 연습벌레다. 공연 당일, 보통은 2시간 정도만 할애되는 무대 리허설을 6시간이나 요청한다.

[세상 속 연습실]고립에서 관계망으로

이때 음악적 몰입에 방해되지 않도록 모두가 공연장 밖으로 퇴장해야 한다. 스태프나 주최 측의 인력도 예외가 없다. 리사이틀을 위해 계약서를 작성할 때도 하루 7시간 이상 연습할 수 있는 환경을 최우선으로 내세운다. 순회연주로 이 시대 가장 많은 도시를 여행하는 피아니스트지만, “연습에 집중하기 때문에 공항부터 호텔, 공연장까지의 동선만 기억”할 정도다.그래서 사람들은 키신을 ‘사회성이 결핍된 자폐적인 예술가’라 일컫는다. 천재성을 훼손하지 않은 채 스스로 고립을 택했다는 것이다. 어떤 자극에도 동요되지 않을 표정과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 감정, 게다가 말수가 적으며 말투는 어눌하니 이 인상비평을 강화시켜온 감이 없지 않다. 하지만 필자의 견해는 다르다. 키신은 고립만 자처한 것이 아니라, 음악적 벗들과 풍성한 합을 이루는 실내악 연주에도 적극적이었다. 실내악을 중점적으로 구성하는 베르비에 음악축제의 중요 멤버로 매년 동참하면서 다양한 음악가들과 장르를 넘나드는 소통을 펼쳐왔다. 얼마 전엔 한국의 조성진과 피아노 한 대에 나란히 앉아 로시니의 윌리엄 텔 서곡을 연주했었다.

그의 말투 역시 마냥 어눌하지만은 않다. 여러 인터뷰를 접하다보면 러시아어, 영어, 이디시어 등 어떤 언어를 구사하건 간에 입을 크게 움직여 명료하게 발음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마치 읽기 연습이라도 하듯 또박또박 천천히 이야기한다. 동사 뒤에 이어지는 전치사 사이에도 특유의 여백을 두곤 하는데, 어눌한 어투라기보다는 정확한 문법을 구사하려는 의지로 보인다. 그러므로 키신의 언어 습관은 그의 연주와 닮았다. 한 음도 허투루 뭉뚱그리지 않고 모든 개별음을 생생하고도 명료하게 살려내는 그의 연주를 연상케 하는 것이다.

자신의 전문영역밖에 모르는 사람을 독일어로 ‘Fachidiot’라 일컫지만, 키신은 음악밖에 모르는, 음악에 매몰된 인물은 아니었다. 10대 시절부터 음악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적 이슈에 관심을 가져왔으며 독서와 연극에 심취했다. 요사이는 피아노 연습을 하지 않을 때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책을 읽지 않을 때 피아노 앞에 앉을 정도라 농을 건네기도 한다.

게다가 키신은 청중과의 만남을 연주자로서 가장 큰 사명으로 여길 만큼, 다른 사람들과 생생한 경험을 공유하길 원한다. ‘늘 새로운 영감을 주는 청중’ 덕택에 밀실에서 펼쳐지는 스튜디오 녹음보다는 실황 녹음을 훨씬 더 선호한다. 청중을 위해 연주할 때 더 많은 영감이 샘솟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껏 키신에게 붙여왔던 ‘사회성이 결핍된 자폐적 예술가’란 수식은 재고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세상 속 연습실]고립에서 관계망으로

평생 유일한 스승이었던 파블로브나 칸토르 교수와 불혹이 넘도록 연주여행을 다니다가, 작년 3월엔 어릴 적 친구인 카리나 아르주마노바와 결혼식을 올려 세계 음악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에머슨 현악4중주단과 2017~2018시즌 유럽과 북미의 순회연주를 다니는가 하면, 첼로 소나타를 작곡해 고티에 카퓌송과 유자 왕에게 연주를 위촉하기도 했다. 이처럼 점차 넓혀가는 관계의 그물망은 키신의 음악세계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까.

다행스럽게도 한국의 청중은 그 진화를 직접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독주뿐만 아니라 오케스트라와의 협연도 예정되어 있다. 11월29일과 30일, 키신은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과 함께 리스트의 피아노 협주곡 1번으로 한국 청중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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