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한국 고고학 사상 최대 발굴조사 5년째…오늘은 또 뭐가 나올까

2019.11.08 16:38 입력 2019.11.08 20:35 수정

신라 왕궁 터 ‘월성’

천년왕국 신라의 왕들이 대를 이어 머물던 왕궁 터인 경주 월성(사적 16호) 안팎에서는 10만점이 넘는 유물·유구가 발굴되고 있다. 사진은 흙으로 인물·동물 등을 다양한 형태로 만든 토우들이다. 토우는 1600여년 전 신라 사람들의 생활문화상을 엿보게 한다.

천년왕국 신라의 왕들이 대를 이어 머물던 왕궁 터인 경주 월성(사적 16호) 안팎에서는 10만점이 넘는 유물·유구가 발굴되고 있다. 사진은 흙으로 인물·동물 등을 다양한 형태로 만든 토우들이다. 토우는 1600여년 전 신라 사람들의 생활문화상을 엿보게 한다.

둘레 2340m 면적 20만㎡, 101년 축조해 935년 통일신라가 무너질 때까지 800여년 동안 왕들이 머물던 곳

1915년 처음으로 성벽 일부가 발굴된 이후 안팎에서 3~10세기 유물 10만여점이 쏟아져 나왔다

학술적 의미가 큰 명문 있는 목간·기와·토기부터 배·방패·그릇·국자·빗 등 목제품, 토우, 금동 장식물, 철제물, 육지와 바다동물 뼈까지…

석회와 식물성 재료를 사용하고 성질이 다른 흙을 번갈아 쌓아 견고하게 만든 성벽, 서쪽 성벽에서 발견된 남녀 인골 2구는 ‘인주 설화’를 보여주는 첫 사례

건물지가 집중 분포된 C구역부터 발굴 중인 현장은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고대사를 다시 써야 할지도 모를, 언제 끝날지 모를 발굴은 오늘도 계속된다

“오늘은 또 뭐가 나올까….” 경주의 신라 왕궁터인 ‘월성’(사적 16호) 발굴조사가 오늘도 이어지고 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발굴조사단이 2014년 12월12일부터 시작했으니 다음달이면 5주년이다. “역사적 발굴” “한국 고고학사상 최대 발굴 조사” 등 여러 수식어가 따라붙는 발굴이다. 그만큼 기대가 크다는 의미다. 꼼꼼하고 체계적인 ‘학술 발굴조사’다 보니 앞으로 얼마나 더 발굴해야 할지 짐작도 힘들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 복원에 20년이 걸렸지만 월성은 30년, 50년이 필요할 수도 있다. 신라사, 나아가 우리 고대사를 다시 써야 할 어떤 유물·유구가 발굴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의례용으로 사용된 배 모양 목제품.

의례용으로 사용된 배 모양 목제품.

반달 모양을 닮아 반월성으로도 불린 월성 전경.

반달 모양을 닮아 반월성으로도 불린 월성 전경.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발굴단의 월성 발굴현장.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발굴단의 월성 발굴현장.

월성은 101년에 쌓아 935년 통일신라가 무너질 때까지 800여년 동안 왕들이 있던 곳이다. 그동안 신라시대 왕릉·무덤·사찰터 등이 조사돼 많은 유물·유구가 나왔다. 하지만 천년왕국 신라 왕경의 최고 중심지인 월성, 특히 성 내부는 정작 발굴된 적이 없다. 엄두를 내기 힘들어서다. 신라 멸망 이후 고려~조선시대에 월성이 ‘방치’되면서 신라 역사문화가 땅속에 보존된 것으로 보인다. 그 이름에 걸맞게 월성 안팎에서는 3~10세기에 이르는 10만여점의 다양한 유물, 왕궁·관청으로 보이는 건물터들이 확인되고 있다.

■ 빗·목간·인골·씨앗·벼루·토우…

신라인들이 기와·토기에 새겨놓은 글자(명문)는 귀중한 사료다.

신라인들이 기와·토기에 새겨놓은 글자(명문)는 귀중한 사료다.

신라 건국 후 첫 궁성(宮城)은 ‘금성(金城)’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박혁거세가 기원전 37년 금성을 쌓았다고 한다. 금성 위치를 놓고 여러 설이 있지만 아직 어디인지 명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월성이 축조되자 금성은 점차 쇠락한 것으로 보인다. 월성 관련 기록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신증동국여지승람> <동국통감> 등에 남아 있다. 성을 쌓은 시기와 관련, <삼국사기>에는 “22년 봄 2월 성을 쌓고 이름을 월성이라 했다” “파사왕 22년 금성 동남쪽에 성을 쌓고 월성 혹은 재성(在城)이라 불렀는데 그 둘레가 1023보다”라고 기록돼 있다. ‘파사왕 22년’은 101년에 해당한다. 또 <삼국유사> 등에는 보수·수리 기록도 보인다. 물론 월성 안팎에는 왕궁과 각종 행정기관, 문, 누각 등 여러 용도의 건물이 있었다. 신라의 핵심공간이던 월성은 신라가 무너지면서 시나브로 폐허가 된 것으로 보인다.

반달을 닮은 지형으로 반월성 등으로도 불린 월성은 일제강점기인 1915년 처음으로 성벽 일부가 발굴된 이후 성벽과 해자(외부 침입을 막기 위해 성벽 바깥을 따라 인공적으로 만든 수로 또는 연못) 등에 대한 부분적 조사가 이어지다 2014년 마침내 ‘제대로 된’ 발굴조사가 시작됐다. 성벽·해자는 물론 월성 내부도 조사 대상이다. 주변에 국립경주박물관, 월지(안압지), 첨성대, 계림 등이 있는 월성은 현재 바깥 둘레가 2340m, 면적 20만㎡다.

그동안 월성 해자와 성벽, 내부 일부에선 10만점이 훌쩍 넘는 유물이 출토됐다. 우선 명문이 보이는 목간·기와·토기류가 있다. 금·옥 등으로 만든 장식물과 달리 대중적 관심은 적지만 명문 자료는 신라인들이 당대에 쓰거나 새긴 1차 사료여서 학술적 의미가 크다.

종이가 귀해 나무조각에 문자를 쓴 6~7세기대 목간이 해자에서 많이 나왔다. 목간 내용은 세금 징수나 행정 명령, 불경, 물품표, 사람 이름과 관직 등 다양하다. 그중 한자를 우리말로 표기한 이두가 적힌 목간, ‘병오년’(526년 또는 586년)이란 제작 시기 등이 기록된 목간은 지방 사람을 동원했다는 내용으로 당시 중앙정부의 지방 통제력을 알 수 있다.

그 자체로도 소중하지만 명문이 있는 토기, 기와는 가치가 더 크다. 막새, 귀면(도깨비)기와 등 여러 종류의 기와가 나왔는데 귀면기와의 존재는 격이 높은 건물이 있었음을 뜻한다. 또 ‘의봉사년개토(儀鳳四年皆土)’명 기와는 의봉사년(679년·문무왕 19년)이라는 제작 시점을 알려주고, ‘재성(在城)’명 기와는 <삼국사기>에 월성과 함께 언급됐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당시 사용했을 토기도 쏟아졌다. 3~10세기에 제작된 토기들은 당대 생활문화 연구에 좋은 자료다. 그중에는 태자가 거처하는 궁을 말하는 ‘동궁(東宮)’, 사람 이름으로 보이는 ‘도부(嶋夫)’ 등 갖가지 명문 토기편들도 있다. 4~5세기대의 가야·일본계 토기와 비슷한 토기도 출토돼 교류 결과물인지 자체 생산품인지 궁금증을 더한다.

신라인이 쓰던 머리 빗.

신라인이 쓰던 머리 빗.

신라와 통일신라시대 최고 지배층이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벼루의 다리들.

신라와 통일신라시대 최고 지배층이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벼루의 다리들.

배·방패 모양은 물론 그릇과 국자, 빗, 건축부재 등 목제품들도 귀한 자료다. 길이 38.6㎝, 폭 5.0㎝, 높이 4.2㎝ 크기로 실제 배를 축소한 배 모양 목제품은 불에 타거나 가공한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방패 모양 목제품은 2점인데 이중동심원·띠 모양을 그린 후 붉은색과 검은색으로 채색을 했다. 의례용으로 보인다. 당시 중앙정부가 인공조림까지 하며 관리하던 잣나무로 만들어진 이 작은 유물들은 1600여년 전 월성에서 벌어진 어떤 의례에 사용됐을까? 상상력을 자극한다.

최상위 계층이 사용한 벼루도 주목받는다. 그동안 신라 벼루는 토제·석제·옻칠을 한 목제 등으로 30여곳에서 발굴됐는데, 월성 내부 한 건물터에서는 조각을 포함해 토제 벼루 120여점이 무더기로 발견돼 해당 건물의 성격을 짐작하게 했다.

토성인 월성 성벽의 실체를 규명하기 위한 성벽 발굴도 진행 중이다. 지금까지 조사 결과 성벽의 견고함을 위해 석회와 식물성 재료 등을 사용하고, 성질이 다른 흙을 번갈아 쌓아올리는 등 여러 방안을 도입한 것으로 나타났다.

월성 성벽에서 발굴된 신라인 남녀 유골.

월성 성벽에서 발굴된 신라인 남녀 유골.

특히 2017년 서쪽 성벽 기초부분 속에선 1600여년 전 살았던 50대 남녀 인골 2구가 발견돼 학계를 놀라게 했다. 문헌으로 전해오던 ‘인주 설화’를 보여주는 고고학적 첫 사례로 여겨져서다. 인주(인간 기둥) 설화는 사람을 주춧돌 아래에 묻거나 기둥으로 세우면 건물 등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으로 역사서 <고려사>에 언급돼 있다. 인골들 발치 쪽에선 5세기 전후 만들어진 토기 4점이 나와 성벽 축조 시기 등도 확인됐다.

흙으로 만든 인물상인 토우들도 흥미롭다. 춤을 추거나 말을 탄 사람, 성기가 강조된 남성, 말이나 염소·돼지 같은 동물상 등 다양한 형태의 토우들은 신라인들 생활의 단면을 엿보게 한다. 토우 중 화제를 모으는 것은 터번을 쓴 토우다. 학계에서는 고대 중앙아시아를 근거지로 한 상인들로 동서문명을 오간 소그드인으로 본다. 5세기 중후반~6세기대 제작된 토우는 신라와 서역의 교류를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다.

이 밖에도 월성 안팎에서는 금동불상 등 금동장식물과 도끼·칼 같은 철제물, 가락바퀴·그물추 등 직물 제작이나 어로 활동 관련 유물, 벼와 밀·콩·조 등의 곡류와 복숭아·자두·머루 같은 과실류 등 갖가지 식물의 씨앗도 나왔다. 또 곰·멧돼지·소·개·사슴 같은 육지동물과 상어·돌고래류·참돔 같은 해양생물 뼈도 확인됐다. 신라인의 먹거리 등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이런 작은 유물들까지 확인되는 것은 발굴조사단이 발굴 현장에서 나오는 모든 흙을 물로 체질까지 하며 세심하게 살핀 덕분이다.

소그드인으로 보이는 토우.

소그드인으로 보이는 토우.

■ 어떤 유물이 얼마나 있을까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발굴단은 월성 내부의 경우 A~D 4개 구역으로 나눈 뒤 C구역 발굴을 먼저 시작했다. 10여년 전 지하 레이더 탐사에서 건물지가 집중 분포돼서다. 2015~2016년에는 월성 내부 지층 변화를 파악하기 위해 시굴갱(테스트피트) 조사를 했다. 지표에서 약 3m 깊이에서 9개층이 나타났는데 그중 무려 7개가 문화층(자연적 퇴적층과 달리 인공적 활동으로 유물·유구가 있는 층)이다. 3~10세기 전후로 통일신라~신라시대 문화층이 존재하는 것이다. 불과 지표 30여㎝ 아래에 조선·고려시대 문화층은 없이 곧바로 1000여년 전 통일신라 말기 건물터가 묻힌 것으로 확인됐다.

통일신라시대 문화층에서는 여러 건물터와 유물이 나왔는데, 특히 3호 건물터는 회랑까지 있는 대규모다. 당시 우물터도 확인돼 나무 두레박 2점을 비롯, 토기·기와·구슬 등이 발굴됐다. 문헌상으로 볼 때 월성은 소지왕·진평왕·문무왕 등 여러 대에 걸쳐 증축·보수 등이 이뤄졌고, 영토 확장 등으로 행정업무가 급증하면서 월성 바깥에도 건물들이 들어섰다. 앞으로 발굴조사에서 통일신라와 신라시대 왕궁 시설물은 물론 어떤 유물·유구가 발굴될지 알 수 없는 셈이다. 월성 발굴조사에 눈길을 줄 수밖에 없는 이유다.

오늘도 계속되는 월성 발굴 현장은 학생과 일반인 등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보통 발굴 현장은 엄격히 통제되지만 월성 발굴 현장은 다르기 때문이다. 수시로 발굴 현장을 공개, 발굴 과정과 출토 유물의 해설은 물론 각종 체험행사 등 다양한 대중친화적 프로그램을 운용한다. 발굴 현장이 그야말로 ‘지붕 없는 박물관’으로 살아 있는 문화·교육 공간이 된 셈이다. 발굴단 측은 지난달 말에도 이틀 동안 오후 1시부터 9시까지 현장을 개방해 각종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그동안 호평을 받아 4번째 마련한 행사로 유물 설명회와 발굴 체험은 물론 밤에는 달빛 아래에서의 특별한 답사도 이뤄졌다.

월성 발굴조사가 언제 끝날지는 알 수 없다. 발굴되는 유물·유구 등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 데다 무엇보다 시간에 쫓긴 졸속 발굴은 안되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1000여년 동안 월성 땅속에 묻혔던 유물·유구가 우리가 알고 있는 지금까지의 신라와는 또 다른 면목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사진 제공 문화재청·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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