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은 세계사>, 문제는 지식과 교양의 외주화다

2021.02.05 16:19 입력 2021.02.05 23:26 수정
위근우 칼럼니스트

설민석 하차 후 재정비했다는 ‘벌거벗은 세계사’…이번에도 구설수

‘재정비를 마치고’ 한 달 만에 방송을 재개한 tvN <벌거벗은 세계사>가 페스트를 둘러싼 몽골군의 시체 투척 가설을 방영해 또다시 역사 오류 논란에 휘말렸다. tvN <벌거벗은 세계사> 화면 캡처

‘재정비를 마치고’ 한 달 만에 방송을 재개한 tvN <벌거벗은 세계사>가 페스트를 둘러싼 몽골군의 시체 투척 가설을 방영해 또다시 역사 오류 논란에 휘말렸다. tvN <벌거벗은 세계사> 화면 캡처

“재정비를 마치고 다시 여행을 준비합니다.” 지난 1월30일, 논문 표절을 인정한 설민석 하차 후 한 달 만에 방송을 재개한 tvN <벌거벗은 세계사>는 이런 자막과 함께 시작했다. 그렇다, 재정비. 하차 전에도 이미 설민석 개인에게 세계사 전반에 대한 강의를 맡기는 것의 불합리성에 대한 지적이 있던 만큼, ‘페스트’라는 주제에 맞춰 외과 의사이자 저술가인 장항석 교수가 강의를 맡았고, 역사 전공자인 전범선이 새 멤버로 합류했다. 그래서 그 재정비된 ‘히스토리 에어라인’의 세계사 여행은 성공적이었을까. 결과적으로 실패한 듯하다. 해당 회차 말미에 자문으로 표기된 박흥식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는 본인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카파 공성전에 대한 자료는 현장에 있던 사람이 기록한 것이 아니고 신뢰할 수도 없는데 마치 역사적 사실인 양 해석해 나쁜 것은 다 아시아에서 왔다는 잘못된 인식을 고착시켰다. (중략) 힘들게 자문해주었더니 내가 자문한 내용은 조금도 이용하지 않았다”고 강력하게 비판했다. 설민석이 진행하던 시기,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방송에 대해 역시 자문을 맡았던 곽민수 한국이집트학연구소장이 “사실관계 자체가 틀린 게 너무 많”으며 “내가 자문한 내용이 잘 반영이 안 되어 있는 것 같”다고 지적했던 것과 대동소이한 반응이다. <벌거벗은 세계사> 측은 “페스트와 관련된 내용을 의학사적 관점을 중심으로 구성”했으며 “대본과 가편집본, 마스터본을 관련 분야 학자들에게 자문을 받고 검증 절차를 마친 후 방송했다”고 반박했지만, 경향신문의 추가 취재에서 박 교수는 “그런 자문은 한 적 없다”고 재반박했다. 딱히 방송사 대 박흥식 교수의 진실게임으로 확대될 일처럼 보이진 않는다. 박 교수가 이미 SNS를 통해 왜 학자로서 동의할 수 없는지 간략하지만 구체적으로 밝히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박 교수가 문제 삼은 내용들은 장항석 교수가 쓴 <판데믹 히스토리>에서조차 정설로는 다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2018년에 집필한 <판데믹 히스토리>에서 장항석 교수는 “흑사병의 발생과 전파 경로에 관해서는 여러 가설만 난립할 뿐, 아직 정확하게 파악되지는 않았”으며, “중앙아시아와 실크로드를 통해 흑사병이 유럽에 유입됐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지만 “유럽의 한 지역에서 발생했다는 설도 만만치 않다”며 이번 방송에서 논란이 된 몽골군의 페오도시야(카파) 침략과 시체 투척을 통한 고의적 감염에 대한 설을 소개한다. 즉, 그조차 본인 저서에선 몽골군을 통한 감염 경로에 대해 온전히 신뢰하진 않는다. 물론 실크로드를 감염 경로로 보는 것도 “나쁜 것은 다 아시아에서 왔다는 잘못된 인식을 고착”시킬 수 있다는 박흥식 교수의 지적을 벗어나긴 어렵겠지만, 적어도 몽골군의 시체 투척 가설처럼 악마적이고 자극적이진 않다. 그리고 이러한 자극적 역사 서술은 <벌거벗은 세계사> 1화에서 설민석이 홀로코스트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이야기할 때부터 끊임없이 제기된 문제다. 그렇다면, 대체 이들은 무엇을 ‘재정비’했다는 것인가.

페스트를 주제로 강연한 장항석 교수는 국내 갑상선암 권위자이자 대중 교양서 저술가다.

페스트를 주제로 강연한 장항석 교수는 국내 갑상선암 권위자이자 대중 교양서 저술가다.

사실 장항석 교수가 국내의 갑상선암 권위자이자 대중 교양서로 대중과의 만남을 계속해서 시도해온 저술가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의학사 전문가가 아닌 그가 세계사 교양 프로그램의 연사로 출연한 것은 조금 의아한 일이다. 외과의로서 그의 분야가 전문적인 것처럼, 의학사나 중세사 역시 전문적인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방송사가 그를 연사로 부른 이유를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코로나19 팬데믹이 벌어지기 2년 전 <판데믹 히스토리>라는 직관적인 제목과 내용의 대중 교양서를 집필했기 때문이다. 단 한 달의 재정비 기간 동안 팬데믹 관련 주제 강연을 준비하던 제작진이 이런 이름의 책을 쓴 저자, 그것도 명의로서 신원이 보증된 지식인에게 접근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미리 말해두면 해당 저서는 팬데믹과 인류 문명의 관계를 연대기 순으로 읽기 쉽게 풀어쓴 좋은 교양서다. 다만 앞서 말했듯 의학사는 전문 영역이다. 장항석 교수조차 저술에 있어 역사가인 윌리엄 맥닐의 <전염병과 인류의 역사>, 의학사연구소 소장이던 로이 포터의 <의학, 놀라운 치유의 역사> 등에 많은 부분 빚졌음을 밝히고 있다. 하지만 장항석 교수 책만 읽어도 피할 수 있는 왜곡을 굳이 감행한 제작진이 해당 저서들이나 인용 논문을 꼼꼼히 공부했으리라 기대하긴 어렵다. 다시 말해 “페스트와 관련된 내용을 의학사적 관점을 중심으로 구성”했다는 제작진의 말은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 “페스트와 관련된 내용을 의학사적 관점으로 구성한 명저를 충실히 읽고 반영한 대중 교양서 저자를 섭외”했다고.

그래서 문제는 교양의 외주화다. 대중서 저술가(이 사안에서 장항석 교수는 전문의가 아닌 저술가다)를 섭외해선 안 된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비록 피에르 부르디외는 <텔레비전에 대하여>에서 “역사가로 인정받지 않는 어떤 사람(예를 들어 텔레비전의 역사가)이 역사가들에 대해 그의 의견을 말하면서 이에 정통한 것처럼 행동할 때 (역사가들의 장)의 타율성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매우 합당하게 비판했지만, 대중과 전문 지식의 가교 역할을 하는 지식소매상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는 건 사실이다. 뛰어난 학자가 좋은 연사라는 보장은 없다. 그 제한적 틈새에서 설민석, 최진기, 황교익 등의 지식소매상이나 저술가들이 제 역할을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방송사들은 이들과 좋은 교양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협업하기보다는 외주를 맡겼다. 최진기, 설민석을 인기인으로 만들어준 tvN <어쩌다 어른> 이후 어느 순간부터 방송사의 교양 프로그램 다수는 EBS <질문 있는 특강쇼-빅뱅>, JTBC <차이나는 클라스>, tvN <벌거벗은 세계사>처럼 연사의 스토리텔링에 의존하는 강연 형식으로 구성된다. 방송국의 역할은 섭외에 국한되며 책임은 연사에게 돌아간다. 모든 외주화가 그렇듯 방송사 입장에선 효율적이다. 문제가 생기면 말뿐인 ‘재정비’를 하면 그만이다. <어쩌다 어른>에서 조선미술사라는 전문 영역에 대해 강의하다 큰 팩트 오류를 내 하차했던 최진기가 1년 뒤 <어쩌다 어른>에서 역시 또 다른 전문 영역인 인공지능에 대해 강연하는 모습은 지식과 교양의 전달을 외주화한 한국 방송의 웃을 수 없는 상징적 장면이다. 설민석의 연이은 오류에 이은 이번 <벌거벗은 세계사> 논란은 그 연장선에 있을 뿐이다. 당장 이번주 프로그램 예고편에서도 설민석처럼 한국사 강사인 최태성이 진주만 공습과 히로시마 원폭에 대해 강의하고, ‘대충격’ ‘이해불가’ 같은 호들갑스러운 자막이 따라붙는다.

위근우 칼럼니스트

위근우 칼럼니스트

단순 게으름 문제라면 고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효율성의 문제라면 해결은 어려울 것이다. 이번 논란으로 프로그램 신뢰도가 크게 떨어질진 모르지만, 이미 오류 논란이 있던 시기부터 지금까지 <벌거벗은 세계사>는 5%대의 안정적인 시청률을 기록 중이다. 지난 1월7일 방송한 MBC <다큐플렉스> ‘신년특집 빅 퀘스천’ 편은 <사피엔스>의 유발 하라리에게 인류의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답을 구한다는 점에서 역시 지식의 외주화를 벗어나진 못했지만 적어도 연출과 구성에서 상당히 공을 들였음에도 1.8%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효율성에선 비교가 안 된다. 이런 상황에서 방송국 제작진이 자발적으로 직접 전문가들을 인터뷰하고 자료를 찾아보고 공부하고 검증하며 넷플릭스의 <익스플레인-세계를 해설하다> 같은 시리즈를 만들리라 기대하긴 어렵다. 그러니 벌거벗은 건 애꿎은 세계사가 아니다. 교양을 말하지만 외주를 통해 효율성만을 추구하는 방송사와, 방송사의 입맛에 맞춰 지식소매 시장에 진입하는 지식인들이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당당하게 행진하고 있을 뿐이다. 안데르센 동화와 다른 점이 있다면 사기꾼이 임금님을 속인 게 아니라, 벌거벗은 자들이 우리를 속이려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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